[영웅서사] 보고 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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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성폭력상담센터에서 특별상영회로 [영웅서사]라는 독립영화를 보고 왔습니다. 이른바 서울예대 황금폰 사건 이라는 사건의 피해자분들이 직접 찍은 다큐멘터리 영화인데요. 성폭력 피해자들의 서사를 한국성폭력상담센터에서 이렇게 보는 게 참 뜻깊게 느껴지기도 했고, 어떤 영화를 정확한 장소와 사람들 사이에서 본다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본래 7시에 상영이 시작됐어야 하지만 퇴근 후 늦는 사람들이 좀 많아서 한 10분 정도 있다가 상영이 시작되었습니다. 저는 어쩌다보니 출연자 분들의 바로 뒤에 앉아서 영화를 볼 수 있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가 주인공이라고 하면 일단 떠오르는 장르나 정서의 고정관념들이 있습니다. 감히 말하건대 이 영화는 그 고정관념들을 다 박살내버립니다. 성폭력 피해 사실이 인생 전체를 삼키는 듯한 서사를 이 영화는 일상의 부분부분으로 반증합니다. 어떤 피해 사실에 사람들은 조금 위축되고, 할 일이 많아지고, 또 심적으로 피로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그 경험조차도 여태 이어져온 일상의 한 부분에 있습니다. 이 영화는 '성폭력 피해'가 아니라 '일상 속에서 성폭력 피해가 생긴 후 이어지는 일상'이라고 보는 게 더 정확할 것 같습니다. 


이 영화를 보면서 러닝타임 내내 다같이 웃었습니다. 정말이지 처음부터 끝까지 쉴 새없이 웃깁니다. 주인공들은 계속해서 엉뚱한 소리를 하거나 무슨 성대모사를 하면서 놀고, 종종 성폭력피해자로서 부딪히는 현실의 부조리에 아이러니를 표현하기도 합니다. 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주인공 셋은 모여 "수색 축하합니다~ 수색 축하합니다~"라고 노래를 부르며 케이크의 촛불을 끄는데 이건 경찰이 가해자의 집을 압수수색하는 과정이 시작되었다는 걸 축하하는 파티입니다. 이런 식으로 주인공들은 지지부진하지만 그 안에서 자기들끼리 뭉쳐서 투쟁 과정에서의 승리를 즐기고 때로는 해학적인 말들을 주고 받습니다. 25년 한 해 봤던 영화들 중 저에게는 가장 웃기는 영화였습니다. 


이 영화에서는 의도적으로 지워진 장면들이 있습니다. 주인공이나 친구들이 우는 장면이 거의 안나옵니다. 이들이 울지 않았을리가 없습니다. 어쩌면 최종승소로 이어지는 몇년의 시간 동안 울지 않은 날보다 울었던 날이 더 많았을지도 모릅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주인공이 슬퍼하거나 비감에 젖는 장면이 거의 없습니다. 감독이 그런 장면들은 굳이 남길 필요가 없다고 판단했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면 놀랍게도 슬픔과 우울의 감정이 느껴지지 않습니다. 오히려 시트콤처럼 우당탕탕 어떻게든 할 수 있는 걸 해나가고 진전이 이뤄질 때마다 기뻐하는 그런 장면들이 주를 이루고 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의 서사에 과연 '울분'이 어디까지 빠질 수 있는지 실험을 하는 것처럼도 느껴집니다.


한편으로는 이런 시도의 목표가 뚜렷하게 느껴집니다. 인간은 기억을 기록으로 남기고 기록을 통해 기억을 재구성합니다. 그리고 기록은 기억을 선택하고 추리는 과정입니다. 아무리 힘들고 괴로웠던 시간들도 지나고 나면 어느새 희미해지게 마련이고 그 안에서 웃겼거나 즐거웠던 일들이 더 크게 남기도 합니다. 이 영화를 통해 주인공들은 기억을 취사선택했고 어떤 순간들은 편집해내기로 결정한 것 같습니다. 인간은 기억의 주체가 될 수 있는가. 혹은 모든 기억을 다 기억하고 배열하는 것이 객관인가. 이런 질문들이 맴돕니다. 물론 지워지지 않는 다른 기억들이 분명히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것을 다수의 대중과 나누고자 할 때, 제일 최우선으로 나눌 기억을 골라낼 수 있고 또 그것들을 더 열심히 나눌 수 있을 것입니다. 슬프고 괴롭고 외로운 시간들을 이 사람들이 계속해서 떠올리고 그걸 굳이 기록까지 해야할 필요는 없을 것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성폭력 피해자들의 회복에 아주 중요한 일일 것입니다. 최소한 이 기록에서 이들은 행복하고 즐거운 순간들을 남기면서 이것을 더 열심히 기억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이것은 이들이 사건 자체를 '성폭력 피해'가 아니라 '성폭력 피해 후 투쟁과 회복'으로 인식하기 때문일 것입니다. 주인공을 포함해 친구들은 계속해서 뭔가를 합니다. 이 영화에서 주인공들이 가해자를 고소하고 경찰 수사나 법의 집행, 언론에 이를 알리고 공유하는 과정들은 어떤 프로젝트처럼 하나하나 진행해갑니다. 이 영화가 꾸준히 보여주는 것인 피해자라는 수동적인 이미지가 아니라 행위하는 주체로서의 적극적인 이미지들입니다. 성폭력 피해 이후 어떤 사람들은 분명히 모욕과 수치를 느끼며 우울감에 짓눌릴수도 있을 것이고 싸움 자체가 너무 힘겨워 포기할 수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투쟁하기를 선택하고 뭔가를 계속 하려고 합니다. 이 영화는 그렇게 뭔가를 하려고 하고 마침내 해낸 증거로 남아 어떤 사람들에게는 용기를 줄 수 있을 것입니다.


아마 이렇게 계속해서 투쟁을 할 수 있었던 건 주인공의 의지와, 그 곁에 있는 친구들 때문이었을 것입니다. 성폭력 피해자들이 겪는 이 고립감은 싸움을 더 피폐하게 만들기도 한다는 걸 실제로 보기도 하고 또 여러 증언들에서 봐왔는데, 혼자가 아니라면 길고 지독한 싸움이어도 계속 이어나갈 수는 있을지도 모릅니다. 그리고 이 연대는 대단한 인격적 위대함이나 놀라운 감수성을 필요로 하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그의 처지를 이해하고 또 투쟁이 외롭지 않게 하면서 함께 어울린다는 것... 이건 사실 모든 인간관계의 기본일지도 모릅니다. 


모든 성폭력 피해자들의 투쟁이 이렇게 진행될리가 없습니다. 실제로 영화가 끝난 후 현장에 있던 다른 성폭력 피해 경험자들이 본인들의 투쟁이 얼마나 지지부진한지, 또는 허무하게 끝났는지를 토로했습니다. 그러면서도 이렇게 잘 싸워서 이겨주신 게 너무 감사하다고도 전했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이번 상영 한번으로 끝나지 않길 바랍니다. 이 영화는 저에게 믿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증거를 제시했습니다. 믿을 수 밖에 없는 어떤 기록을 보며 믿음과 희망이 필요한 사람들이 그걸 채울 수 있길.

    • 검색해도 전혀 정보가 나오지 않을 정도의 진짜 작은 독립영화군요. 써주신 대로라면 꼭 챙겨볼 작품인데 빨리 영화제들에 출품해서 입소문 타고 배급도 되고 그랬으면 좋겠군요. 출연진들과 같이 감상하셨다니 더 뜻깊으셨겠네요.

      • 네 개인적인 다큐멘터리 영화라서 성폭력 상담센터에서 특별 상영했던 작품이더군요. 이 작품이 훨씬 더 많이 상영하고 많은 관객과 만날 수 있길 빕니다.


        출연자도 출연자인데 지브이 시간에 많은 성폭력 피해 여성들이 울고 웃으면서 각자 이야기를 해주셔서 좀 뭉클하기도 했습니다.
    • 제목만 보고 제가 잘 모르는 고전 영화인 줄 알았는데 독립 다큐멘터리 영화였군요. 다큐멘터리의 배경이 된 사건은 신문 기사로 보았는데 이런 종류의 사건이 워낙 많다 보니 잊고 있었습니다. 성폭력 피해자 다큐멘터리 제목을 '영웅서사'라고 지은 것만 보아도 이들을 수동적인 대상이 아니라 적극적으로 행동하는 주체라는 걸 나타내려고 했다는 걸 알 수 있네요. 이런 작은 영화들도 여러 경로를 통해서 볼 수 있는 기회가 많아졌으면 합니다. 

      • 영화 감독도 주인공 중 한명으로 영화 안에 계속 나오는데 네 이야기가 완전히 영웅서사다 영웅서사~ 하면서 말을 하더군요. 이 영화의 공기는 주류 사회의 장엄하고 숭고한 그런 분위기와는 완전히 다르게 흘러간다는 점에서 영웅서사의 새로운 결을 느꼈습니다. 이 영화가 ally님을 포함해 여러 사람에게 닿을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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