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근 읽은 책.

최근 읽은 책 두 권을 짧게 소개합니다.

[밀크맨]

공식적으로는 영국인(이 지역도 잘은 모르지만 명쾌한 정리가 안 된 거 같아요..) 북아일랜드 출신의 애나 번스라는 작가가 쓴, 자기 경험이 많이 들어가 있는 소설입니다. 

70년대 벨파스트가 배경입니다.(짐작할 뿐, 지명이 나오지는 않습니다) 회상의 형식이지만 모든 이야기는 십대 후반일 때의 화자 자신의 이야기로서 현재 진행형으로 느껴집니다. 자신과 가족과 기타 주변 사람 이야기를 하면서 그들을 둘러싸고 매일 이어지는 정치적 긴장을 어느 편에 서서 진지하게 그리기보다는 갑갑한 시선으로 그리는 작품입니다. 정치적 긴장과 개인적인 문제가 얽히게 되면서 화자의 상황은 갈수록 갑갑하게 전개됩니다.

화자의 상황은 무엇인가. 일단 당시의 정치적인 문제가 있겠죠. 이쪽저쪽에서 일어나는 자동차 폭발과 체포구금의 일상 속에서 동조자나 반역자가 될까 전전긍긍해야 합니다. 주민들은 이편 저편 이도저도아닌편으로 갈라져 있고 매일이 표면적인 입장과 실질적인 내용 사이에서 적절하게 균형을 잡고 대처해야 하는 시간의 연속이거든요. 화자는 어린 여성이라 멍한 척 대처하며 무관심하려고 하여도 결국 그 판단의 올가미에 걸리게 됩니다. 그리고 생활 속에는 오랜 시간 이곳을 지배해 온 종교와 결합된 보수적인 사고방식, 전통적인 규범의 압박이 있고요. 이것은 엄마와 이웃 중심으로 가정과 지역사회를 또한 지배합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화자에게 문제가 뚜렷하게 생기는 계기는 어처구니없게도 '책읽기 습관'입니다. 나이가 찬 형제자매들은 여러 이유로 집을 떠났고 아직 집에 남아 있는 화자와 동생들은 보아하니 독서력이 굉장한데 특히 화자의 경우 야외에서 책 읽는 것을 아주 좋아합니다. 화자는 걷는 것을 좋아하고 걸으면서 좀 본격적으로 독서를 하는데, 이게 문제가 됩니다. 걸으면서 저렇게 집중해서 책을 읽다니! 별나다, 반항하나, 자기 보호 본능이 없다, 세상 돌아가는 걸 무시하나, 상황 판단력이 없다...로 사람들에게 받아들여지고 이상한 애로 찍힙니다. 거기다가 웬 놈 하나가 화자에게 접근하면서 말과 편견은 확장되고 고정되며 실질적으로 화자를 압박해 가는 식으로 전개됩니다. 


이 책의 대략적인 흐름을 짧게 소개했어요. 저에게 이 책이 남긴 인상은 내용보다 서술 방법이었습니다. 

아일랜드의 문학력이라고나 할까요, 문학적 전통은 유서 깊은 것 같습니다. 제 생각에 최근 활발한 활동을 보이는 작가도 이 지역 출신이 많은 것 같은데, 한강 작가 이후로 부커상에 대한 관심이 노벨상 못지 않게 커졌고 눈에 많이 띄어 그런 느낌을 갖는지 모르겠어요. 여튼 이 작가도 50주년 부커상 수상자라 화제가 되었다고 합니다. 그해 노벨상은 성추문 문제로 건너뛰었는데다가 이 소설의 내용이 그 문제와 결부되어 있거든요. 

이 책의 서술 방법이 녹록치 않습니다. 위에 쓴 정치적, 전통적 억압과 여성에 대한 성적 억압까지, 전방위의 뒤틀린 시선 속에 놓인 화자의 입장을, 작가가 말하는 방식을 통해 독자 또한 체험하게 만드는구나, 생각하고 있습니다. 모든 지명과 인명은 고유 명사가 아니고 설명식입니다. 십분 지역, 공동묘지가 있는 곳, 수녀원이 있는 곳, 저수지 공원, 물 건너, 저쪽 거리, 아무개 아들, 아무개 아들의 동생, 어쩌면 남자친구, 가장 오래된 친구, 진짜 밀크맨, 알약 소녀 등등으로요. 특정한 지역의 개별적 문제가 아니라는 것을 표현하는 의도인 듯한데 읽기가 익숙하진 않습니다. 서술 부분 경우 하나의 상황 속에서 뭔가를 보고 떠오른 연결들로 다른 상황을 설명하고 이후에 이어지는 상황에서 했던 설명을 반복하는 식이라 때로는 솟아나는 짜증을 다스려야 합니다. 문장의 연결이 집요하고 갑갑합니다. 전에 쓴 적이 있는 '바다'의 밴빌 작가는 쉬운 소통을 우선시 하지 않고 심리적인 묘사가 위주여서 힘든 면이 있었는데 그것과는 또 다른 성격으로 쉽지 않은 독서 과정이었어요. 으으, 이 문장들의 틈에 갇힌 기분이라니...여기, 이 아일랜드 쪽은 도대체 어떻게 된 동네인가...뭐 그런 감정에 빠지곤 했습니다.  

사소한 것도 문제를 만들 수 있는 시선의 폭력, 우리가 마주치는 은은한 압박과 부자유함이 결국은 어떻게 확실한 억압으로 표면화 되는지, 그리고 거기에 익숙해져 버리는지를 집요하고 세밀한 문장과 묵직한 분량으로 제시합니다. 재미가 있다거나 읽는 과정이 즐거운 책은 아니었지만 개성과 스타일은 확실한 소설이었습니다. 여러 인사들과 매체가 극찬을 하는 와중에 읽기가 만만하지 않았지만 새로운 작가를 만난 보람은 있었음을 후기로 남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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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의 한가운데]

루이제 린저의 이 책은 1950년에 출간되었다고 합니다. 저는 더 뒤로 기억하고 있었어요. 제가 주인공인 니나를 떠올리면 항상 짧은 머리의 진 세버그 이미지가 떠올라서 60년대로 잘못 기억하나 봅니다. 

앞 부분에 니나의 언니 마르그레트와 슈타인에 의해 묘사되는 니나의 외모와 언행은 열없달까 민망하달까 그랬습니다. 중2스러움 때문에요. 니나는 거만하게 보이고 매혹적이고 방종한 아름다움을 가진 현대 여성으로 표현됩니다. 니나는 우수에 차 있으며, 무섭게 많은 것을 알고 싶어했고, 생각에 빠지면 완전히 주변에 무관심하고, 진하고 검고 단 커피를 좋아하고.....어릴 때 읽었던 구절들이 기억이 났습니다. 그러나 이 소설이 이게 전부일 리가 없지요. 중반으로 가면 젊디젊은 니나는 결단력과 용기 같은 타고난 기질을 통해 행동으로 그대로 실천하는, 여러 일을 겪어냅니다. 시련 속에서 타협하지 않고 자신과 자신의 삶에 대한 사랑을 증명합니다. 소설이 끝날 때까지 곳곳에서 마주치는 감성적 표현이 난감하지만 인생을 사랑하는 것에 대해, 이를 소홀하게 여기며 시간을 보내는 것을 잠시 돌아본 점은 수확이었다고 생각합니다. 지금 읽기에는 걸리는 부분들이 많습니다. 어떤 시대를 특별히 타서 환호를 받았던 작품은 시간의 흐름에도 취약할 수 있는데 그 경우인 것 같습니다. 슈타인은 니나에 비해 너무 나이가 많습니다. 이 사람의 사랑이 절제와 최대한의 숙고 속에 진행된다고 해도 슈타인도 그리고 속사정이 궁금해지는 그 누이도 살아 있는 느낌이 부족했어요. 물론 슈타인과 같은 사랑의 방식은 유럽 소설 전통에서 익숙한 것이지만, 니나에게 무척 편리하게 도구적으로 쓰인다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그래도 이 책이 나왔을 때, 나치 치하에서 부끄러움 없이 살아내고 열정적으로 살아가는 당시 여성의 모델로 니나 이야기는 감동이었을 것입니다.  

이해가 잘 안 되는 문장이 조금 있어서 오래 전 번역을 손질했다고 하지만 전면 보수하기는 힘들어 그런가 생각했습니다. 그런데 가끔 뜻밖의 문장이 튀어 나오면서 인물 개성을 돋보이게 하는 경우가 있었어요. 이런 점은 마음에 들었습니다. 사소하지만 하나 예를 옮기면 

'첫날에 곧 면회허가서를 얻었어. 아주 쉬웠어. 다음날 오후 감옥으로 갔어. 감옥에 가본 적 있어? 언니? 

아니, 다행히도 없어, 라고 나는 대답했다. 

다행히도, 라고 말하지 마라. 그것을 체험하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야.' 

언니와 니나가 대화하다가 니나가 12살 터울의 언니에게 갑자기 아랫 사람 대하듯 '-마라' 라고 합니다. 예스러운 건지 전혜린스러운 건지 모르겠지만 낯설면서 생기를 넣어 주는 느낌이라 좋았어요. 

어릴 때 읽은 책을 다시 읽어 보니 어릴 때 나의 생각이 떠오르고 느낌이 괜찮았습니다. 그래서 전에 사뒀던 [적과 흑]을 시작할까 생각 중입니다. 

주말이네요. 오늘 걸으며 하늘을 보니 오랜만에 하늘이 깊다는 실감을 했습니다. 주말에 맛 있는 거 많이 드세요! 편안하게 잘 보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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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아일랜드와 영국간의 오래된 갈등(밖에 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는 이 단순함이라니!!!)을 영화나 드라마에서 보면 참 복잡한 생각이 들곤 합니다. 밀크맨이라는 제목과 표지 디자인은 참으로 평화로운데, thoma님도 힘드셨다니 전 시도하기가 겁나요ㅜㅜ


      생의 한가운데도 제목만 엄청 많이 들어본 책이에요. 이렇게 유명한 책들을 언젠가는 보긴 봐야한다고 생각만 하는 게으른 자입니다…


      전 요즘 연근에 빠져서 연근, 사과, 양배추를 주식처럼 먹고 있어요. 근데 연근은 요리법이 많지 않아서(달게 만드는 조림이나 전이 다인) 에프에 굽거나 데친 후에 기름 없이 팬에 구워서 먹고 있습니다. 껍질 까기가 힘들고 자른 단면에 집중하지 않으면 꽤 맛있습니다. 다음주엔 귤 좀 사먹어야겠구요ㅎㅎ

      다음주엔 추워진다고 하네요. thoma님도 맛있는거 많이 챙겨 드세요!!! 요즘 독감이 무섭다고 하네요.
      • 스토킹당하는 소녀 이야기라고만 생각하고 시작했는데 읽기가 빡빡했습니다. 전달 방법과 분량이 협조해서 독자를 경험하게 했네요.




        연근을 자주 먹진 않지만 좋아하는 편이에요. 어릴 때 우리 집은 명절 전에 연근을 안 썼는데 명절에 친구네에 가니 전인지 튀김인지 연근으로 한 게 있어서 처음 먹어봤고 뜻밖에 맛있어서 놀랐었어요. 연근 사와서 튀김이나 전을 해먹고 싶어졌습니다. 껍질 벗겨서 진공 포장한 거 팔던데 저는 손 덜가는 요걸로... 아 굴전도 맛있는데. 슬슬 튀김이 땡기는 계절이에요. 감기몸살 왔다가 거의 괜찮습니다. 기미가 보일 때부터 약먹고 자고, 보내려고 애를 썼더니.. 쏘맥 님도 위에 음식 사이에 뜨거운 음식도 드시고 환절기 건강관리 잘 하시길. 

    • 인생이 복잡하고 피곤하며 힘든 사람들에게 최적화된 게 예술 아닐까. 그런 생각을 하곤 합니다. 동네와 사람에 따라 음악일 수도 있고 미술일 수도 있고 문학일 수도 있겠지만요. 영화나 드라마 판을 봐도 눈에 띄는 분들 중에 인구 대비 아일랜드 출신들이 유난히 많아 보이기도 했구요. 웃기는 건 어릴 땐 소설이나 영화를 통해 접한 이미지로 [아일랜드=주정뱅이 비매너 사람들] 같은 인상이 강했는데 요즘엔 [아일랜드=주정뱅이 비매너인데 매력적인 사람들] 뭐 이런 인상을 갖게 되었다는... ㅋㅋ




      [생의 한가운데]는 제목부터 세기말 감성에 딱 떨어지는 느낌이에요. 옛날에 읽었을 때도 (내용은 다 까먹었지만!) 뭔가 그런 감상 충전에 좋은 작품이었다는 느낌이었구요. thoma님께서 적어 주신 후기를 봐도 역시 그런 인상이 강력해지는군요. 하하. 심지어 작가님 성함조차도 그 시절의 낭만 같은 데 참 어울리는 느낌이지 뭡니까.

      • 우리 나라 6.25 전후에 지리산 인근 동네가 낮엔 경찰, 밤엔 산사람이었다고 하는데 소설 속 상황이 현대판으로 비슷했습니다. 말씀대로 아일랜드는 영국 옆에서 이래저래 시련이 많았고 그런 게 예술적인 역량과 틀림없이 관계가 있을 거예요. 




        어릴 때 독일 소설에서 느꼈던 그 시절의 분위기가 있습니다. 프랑스나 영미권과는 다른데, 이 책 읽으며 그게 떠올랐어요. 그래서 고등학교 때도 2외국어를 독어를 하려고 시도했었는데 지금 생각하니 나름 문학소녀였나...싶네요. 그때도 문학소녀 같은 말은 질색이었는데.ㅎㅎ 지금은 독일의 현역 소설가가 누군지도 잘 모르겠네요. 독일 쪽은 문학 경우에 요즘은 조명이 잘 안 되는 거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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