샘 페킨파의 [하오의 결투]를 보고

영상자료원에서 한 3주간 '누아르의 타자들'이란 책을 가지고 강연을 한다고 해서 신청했습니다. (혹시 듀게에서도 듣는 분 계실려나요?) 누아르라는 장르에 대해 피상적 이해만 있는 상태에서 이 강의를 듣는게 괜찮을지 모르겠네요.

오늘은 1강 교재로 [하오의 결투]를 한다기에 새벽에 일어나서 영화를 봤습니다. 제가 유튜브 결제로 처음 본 영화이기도 하네요.

영화를 보면서 처음에는 조금 맥이 빠졌습니다. '누아르'라고 하면 떠오르는 차가움, 밤, 도시의 이미지가 있는데 이 영화는 전통적 서부극의 이미지가 훨씬 더 강하더군요. 대낮에 웬 인상좋은 아저씨가 허름한 행색으로 등장해서 이야기를 끌고 가는데 놀랍게도 런닝타임 한시간 반 중 앞선 한시간은 액션이 거의 나오지 않습니다. 웬 건달패들과의 술집 몸싸움이 잠깐 나오는데 그걸 빼면 그냥 터벅터벅 말타고 목적지까지 가면서 아저씨들의 조금 지루한 농담따먹기로 영화가 흘러갑니다. 사건이랄 게 거의 없달까요.

이 영화의 주인공인 스티브 저드는 제법 이름이 알려진 총잡이입니다. 왕년에 날렸던 모양인지 사람들이 그의 이름을 들으면 뭔가 아는 척을 합니다. 그는 광산으로부터 금을 안전하게 운반하는 계약을 맺고 옛동료인 길 베스트럼과 신출내기 헥을 그 운반임무에 고용합니다. 그리고 이들은 하룻밤 묵어가는 집에서 젊고 아리따운 엘사를 만나게 됩니다. 엘사는 엄한 아버지 밑에서 자라느라 마을을 내려가본 적도 없습니다. 그런 그에게 헥은 자꾸 추근댑니다.

재미있는 건 이 영화가 처음부터 배신으로 굴러간다는 점입니다. 스티브 저드는 원칙을 지키려는 사람입니다. 그는 금 호송 계약을 맺은 은행 운영자들이 금을 25만 달러치가 아니라 사실 2만달러 만큼을 운반하면 된다고 하자 화를 내며 바로 자신의 계약금을 올립니다. 그런데 그가 찾은 옛동료 길은 그 임무를 듣자마자 젊은 헥에게 자신들이 그 금을 가로채자고 계획을 짭니다. 영화는 이걸 숨겼다가 반전으로 보여주지 않습니다. 관객들에게 대놓고 정체를 드러내며 이 임무가 언젠가는 어그러질 것이라는 운명을 아예 전제해놓고 있죠. 스티브 저드 일행은 이미 믿음이 깨진 상태의 공동체입니다. 그러나 영화는 한 한시간 동안은 어떤 조짐도 없습니다. 그래서 저는 그 음모를 꾸민 대화가 잠깐 나오고 그냥 지나가는 건 줄 알았습니다. 본격적인 배신은 시간이 한참 흘러서야 나옵니다.

이 영화의 핵심적 갈등은 엘사라는 인물에게서 나옵니다. 그는 아직 젊고 다른 사람들과도 어울리고 싶은 호기심많은 청년입니다. 그러나 아버지는 늘 정숙을 요구하면서 그의 외출이나 교류를 허락하지 않습니다. 그는 집을 몰래 빠져나와서 스티브 일행에 합류합니다. 엘사에게는 광산에서 일하는 약혼자 빌리가 있습니다.

그러나 광산에 가서 빌리를 만난 엘사는 당황합니다. 빌리와 함께 머무르는 그의 동료남성들은 엘사를 계속해서 희롱합니다. 엘사는 결혼을 하기 위해 예복까지 챙겨왔지만 광산은 경박하고 추저분합니다. 결혼식이 진행되는 술집에서도 엘사는 자신이 빌리에게 사랑받는다는 느낌을 받지 못합니다. 결혼을 승인하는 판사는 술에 찌들어있고 빌리는 술집 여자들과 번갈아가며 춤을 춥니다. 빌리의 동료들은 자기 차례라면서 엘사에게 계속 키스하려고 합니다. 엘사는 이 분위기를 견디지 못하지만 정작 빌리는 성욕을 주체하지 못해 엘사를 강제로 범하려고만 합니다. 그리고 빌리가 자리를 비운 틈에 빌리의 동료들이 엘사를 강간하려고 하고 엘사는 그 자리를 견디지 못해 도망치려고 합니다. 이 때 스티브 일행이 나타나고 스티브는 총으로 위협하며 엘사를 구해냅니다.

이 부분에서 왜 이 영화가 첫번째 강의 교보재로 선택되었는지 이해했습니다. 엘사는 이 남성들의 세계에서 완전한 타인입니다. 이 남성들의 세계에서, 엘사는 남성이 사랑을 해주거나 혹은 희롱을 해서 그 남성들의 선택에 반응을 하는 존재입니다. 심지어 엘사를 연모하고 엘사에게 신뢰를 받는, 이 영화에서 엘사의 존재에 가장 큰 관심을 쏟는 헥조차도 초반에는 억지로 키스를 이어나가려다가 엘사가 싫어서 비명을 질렀습니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엘사의 남성사회 탈출기로 읽을 수도 있을 것입니다. 아버지의 종속에서 탈출하려는 여성은 이내 남편의 종속에 갇히게 됩니다. 그리고 그는 자신의 운명을 원칙주의자 남성에게 맡기게 됩니다. 종속도 해방도 모든 다른 남성에게 달려있습니다. 영화는 자신이 엘사를 아내로 소유했다며 주장하는 빌리 일행과 스티브 일행의 대결로 흘러갑니다. 그럼 이 안에서, 엘사란 여성은 어떤 존재가 되는 것인지 묻게 됩니다. 이것은 좋은 환경을 고르느냐의 문제가 아닙니다. 기독교 교리에 꽉 막힌 정숙한 사회와 난잡하고 문란한 사회의 이분법 속에서 엘사가 선택을 잘 해야하는 문제는 절대 아닐 것입니다.

한편으로 이 '타자'란 명명에서 영화 속 주인공인 스티브 저드와 길 벨스트롬을 생각해보게 됩니다. 젊은 헥이 엘사를 위해 싸우는 건 그가 엘사에게 연정을 품고 있으니 그럴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스티브나 길은 엘사에게 딱히 큰 관심이 없습니다. 더군다나 스티브는 계약을 중요시하는 원칙주의자입니다. 그리고 엘사는 어찌되었든 결혼이라는 계약을 스스로 맺었습니다. 그렇다면 이들에게는 엘사를 구할 명분이나 동기가 크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이들은 금을 운반하는 목적에 부담을 더해가면서까지 엘사를 구해냅니다. 왜 '남'인 그들이 엘사를 둘러싸고 이렇게 싸우려드는가. 이 지점에서 타자와 타자가 아닌 자를 구분하는 기준은 혈연 관계나 계약 관계가 아니라 인간성을 공유하는 것이 아닌가 하는 근본적인 질문을 다시 던지게 됩니다.

스티브와 길은 엘사의 집에 도착하지만 엘사의 아버지는 이미 죽어있습니다. 그곳에 잠복해있던 빌리 일행은 이들에게 총을 쏘기 시작합니다. 이 총격전에서 스티브와 헥은 부상을 당하고 금을 빼돌리려다가 혼자 총을 챙긴 길은 갑자기 이 총격전 한복판에 뛰어들어 스티브와 같이 싸웁니다. 이들은 "사나이답게" 대결을 하기로 하고 빌리 일행은 전부 죽지만 그 가운데 스티브도 총격에 치명상을 입습니다. 금을 빼돌리려했던 길이 이 대결의 최후 승자가 됩니다.

누아르란 어떤 세계인가. 적어도 이 영화에서 가리키는 것은 "무도한 세계"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 안에서는 신의 은총도 현실의 원칙도 통하지 않습니다. 배신과 착취가 난무한 가운데 남는 것은 아무리 그래도 그건 안된다는, 최후의 도리라고 할까요. 이 영화로 강의를 어떻게 풀어갈지 궁금합니다. 볼 영화가 많으니 부지런히 예습을 해야겠습니다.
    • 영화는 안 봤지만 소개하신 줄거리를 보니 강의 제목과 어울리네요. 누아르의 '타자들'이니까요.


      소중한 새벽 잠을 포기하고 영화 공부에 투자하셨네요! 

      • 유료강의라 영화를 안보면 안될 것 같더라고요 ㅎㅎ 저녁에 볼 상황이 안되서 새벽에 봤습니다. 강의가 재미있으면 좋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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