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월의 책과 잡담
[파졸리니의 길]
최근에 '맘마로마'가 개봉했죠. 전설처럼 전해진 소문만 듣던 감독이라 도대체 어떤 작품일까 드디어 봐야겠다 했어요. 하지만 못 봤습니다. 역시 산넘고 물건너 시간 맞춰 가야하는 관계로. 요즘 같은 추세면 언제 또 기회가 오겠죠? '이티'도 재개봉하고 오래 전 예술 영화들도 개봉하고, 이게 업계에 좋은 현상은 아니라고 하는 것 같지만 부지런하게 움직이면 더 이상 이런 영화 우리는 못 본다는 한탄이 통하지 않는 시간이 도래했구나 합니다.
이 영화는 놓치고 대신 책을 샀습니다. 뮤진트리라는 출판사에서 -작가의 삶과 작품에 관한 이야기를 찾아 떠난 길, 이라는 좀 긴 주제로 시리즈를 내고 있는데 지금까지 6권 나왔고 거기서 나온 첫 책입니다. 저자 피에르 아드리앙은 1991년 생입니다. 이십 대 초반의 불안과 그리움을 책으로 만난 파졸리니에 의탁해 풀어낸 글인 듯합니다. 저자는 프랑스 사람인데 이탈리아로 가서 파졸리니의 흔적을 찾아 움직이며 글을 썼고 책 소개에 의하면 내면일기 같은 글이라고.
저자는 이 첫 책으로 상도 몇 차례 받았네요. 책은 사이즈도 내용도 무겁지 않으면서 알차게 느껴집니다.

[파베세의 마지막 여름]
위의 책을 쓴 작가의 체사레 파베세에 대한 책이 이 시리즈 근작으로 또 나왔어요. 사실 이 책을 먼저 살펴보다가 위에 책도 같이 들였습니다. 저자는 자국보다 비극적인 삶을 산 이탈리아 작가들에 끌리나 봅니다. 위의 책 이후로 에세이도 더 내고 소설도 써서 작가로 잘 자리잡은 느낌.
책의 주인공인 작가 파베세가 쓴 [레우코와의 대화]는 최근에 개봉한 '너는 나를 불태워'란 영화의 원재료라고 합니다. 마티아스 피녜이로 감독은 아르헨티나 출신인데, 영화는 스페인 합작인 거 같고, 시나리오의 바탕이 되는 책은 이탈리아 작가의 것이네요. 이 책은 산문과 운문의 구분이 모호하고 신화를 소재로 전개된다고 해서 딱 봐도 어려워 보여요. 그래서 영화도 어쩐지 가까이 하기 어려워 보여 챙겨 볼 생각을 아예 안 했네요. 피에르 아드리앙이 파베세에 대한 책을 쓰고 파베세의 책을 바탕으로 마티아스 피녜이로가 영화를 만들고. 창작물들이 물고 물리며 이어집니다.
파졸리니의 책도 파베세의 책도 읽은 게 없어요. 파베세의 경우에는 이탈리아 북부 출신 다른 작가나 서경식의 책을 통해 이름만 들어봤죠. 2차대전 전후 이탈리아는 빨치산과 파시스트의 사이의 전투도 같이 있어서 우리나라하고 공통되는 점이 있는 거 같습니다. 그 시기를 거쳐온 작가들의 정서가 좀 익숙한 느낌이에요.

아래 사진은 그냥 가져왔습니다. 씨네21 사진 밑에 설명이 좀 웃겨서 그대로 옮겨 봅니다.(저만 웃기나요)
근데 저는 서양 테이블 세팅을 보면 가끔 그런 생각을 합니다. 먹을 거 보다 식기가 주인공 같다는....아래 사진은 음식이 나오기 전 같기는 하지만 음식이 담겨 있어도 그릇과 포크 나이프, 크고 작은 잔들 때문에 음식보다 얘들 비중이 큰 느낌. 이분들이 드시는 것은 무엇? 와인 드시나요...

마티아스 피녜이로, 홍상수 (왼쪽부터)
지금 읽고 있는 책은 수전 손택의 [여자에 관하여]입니다.
반 정도 읽었어요. 앞 부분에 여성의 나이와 외모, 여성의 아름다움에 대한 차별적인 기준, 이런 내용이 다루어지고 있어요. 매우 단호하고 어떤 부분은 선언적인 문장들로 되어 있습니다. 70년대에 쓰여진 글인데 그때는 얼마나 급진적으로 느껴졌을까 생각 안 할 수가 없어요. 50년 전, 손택은 아름다움은 계급의 문제라고 확실하게 말합니다. 일 안하는 사람임을 드러낼 수 있는 요소들이 아름다움의 기준이 된다고 하면서요. 하지만 점차 그 기준이 다양해지는 것을 볼 수 있고 이는 긍정적인 신호라고 쓰고 있네요. 시간이 흘러 지금, 제가 생각하기에 아름다움을 다양한 각도에서 발견할 수 있다는 합의가 넓게 퍼진 건 사실이지만 나만의 아름다움, 내 기준의 아름다움을 의식하며 그것을 믿을 수 있느냐는 문제를 생각해 보면 아직 멀게 느껴집니다. 여전히 일반에게 기준은 건재하고 여전히 이는 계급의 문제라는 것이 설득력을 갖는 설명인 거 같아요.
다음 꼭지 '매혹적인 파시즘'은 레니 리펜슈탈의 사진집으로 글이 시작됩니다. 레펜슈탈이라는 분, 백 세 넘게 사셨네요. 어릴 때 무용을 했다고 하고 인간 육체의 강인함에 관심이 컸다는데 오래 활동하고 장수하고......계속 읽어 보겠습니다.

수잔 손택! 흥미를 갖고 있는 작가인데 책 내용이 궁금하네요.
예전에 읽었던 손택의 문학 비평 글에 비해 문장이 아주 선언적이라고나 할까요 명료합니다. 이 책은 페미니즘 입장에서 근본적인 내용을 이야기하는데 현실과 실천으로 연결되어야 하기 때문에 문장들이 분명하게 쓰여진 거 같아요. 내용이 어렵지는 않지만 동의에 실천이 따른다는 점을 생각하면 쉽진 않습니다.
여성에게 아름다움이 무엇인지 쓴 것 중 일부 아래 옮겨 봅니다.
<"아름다움의 특권은 엄청나다"라고, 콕토는 말했다. 분명 아름다움은 권력의 한 형태다. 그래야 마땅하다. 개탄스러운 것은, 아름다움이 대다수 여성이 추구하도록 권장되는 유일한 형태의 권력이라는 점이다. 이 권력은 늘 남성과의 관계에서만 나타난다. 이 권력은 무언가를 하는 힘이 아니라 누군가를 끌어들이는 힘이며, 자신을 부정하는 힘이다.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힘도 아니고(적어도 여성은 그럴 수 없다) 사회의 비난 없이 포기할 수 있는 힘도 아니기 때문이다.>
통찰력 있는 내용이 많아요. 그런데 문장과 문장 사이에 비약이 있다는 생각이 드는 곳도 있었는데 제 사고가 거기까지 가지 않아서, 고민이 깊지 않아서 그럴 수도 있을 것 같고, 단정적 문장이 가져오는 본래 특성 때문일 수도 있을 거 같고 그랬습니다. 부연 설명, 상세한 문장들이 따라 붙으면 지저분한 글이 되기 쉬우니 손택이 이 에세이들을 빠르고 분명하게 쓰다 보니 그렇게 됐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흥미로운 에세이니 일독하시길!
레니 리펜슈탈이면 그 전설의 '의지의 승리' 감독님 아니신가요. 대학생 시절에 매우 복잡한 기분으로 그 영화를 봤던 기억이 있습니다. 이런 압도적인 재능으로 나치 선전 영화라니... 하구요. 장수 얘길 하셔서 확인해 보니 제가 그 영화를 볼 때도 멀쩡하게 살아 계셨군요. 허허;
네, 2003년 101세까지 살았답니다.
손택이 1974년 이 글을 쓸 당시에 레니 리펜슈탈이 일흔 나이에 수단의 누바족 사진집을 냈는데 이게 엄청 멋져서 화제가 되었나 봐요. 손택은 이 사진집을 계기로 하여 리펜슈탈이 오랫동안 어떤 부분은 침묵으로 어떤 부분은 강조와 자기변호로 커리어를 탈색시켜왔음을 하나하나 지적합니다. '의지의 승리'만 해도 리펜슈탈은 연출한 장면은 하나도 없다, 전부 진실이고 편향적인 해설도 없고 순수한 역사일 뿐이다, 시간 순을 따르는 기록영화, 단순한 르포르타주이다,라고 인터뷰했는데 손택은 전혀 그렇지 않다며 증거를 제시합니다. 영화에 해설이 없는 이유는 해설이 필요하지 않아서인데, '의지의 승리' 속 현실이 이미 철저하게 변형되어 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실제로 당 지도자들이 연단에 선 장면 일부가 잘못되자 히틀러가 재촬영을 지시했고 몇 주 뒤 세트장에서 몇 명이 모여 충성 맹세 장면을 연극하듯 다시 찍었다고 합니다. 이 기록이 있다고 하네요. 전당대회가 진행되는 것을 촬영팀이 곳곳에 끼어 들어 찍기만 한 게 아니고, 애초 전당대회 준비는 카메라워크 준비와 함께 이루어졌다고 해요. 히틀러와 진행 상황을 함께 의논하고요. 영화로 남기기 좋은 구도로 계획되었다고. 리펜슈탈은 히틀러와 개인적으로 친해서 모든 물적 지원을 받았고 '올림피아' 도 괴벨스 선전부의 전적인 지원하에 촬영되었다네요.
손택은 리펜슈탈의 재능을 인정하지만 나치의 주요 선전가였음을 교묘하게 덮는 가증스러운 행위를 지적하고 애초에 이 감독의 성향이 파시즘 미학과 일치한다는 것을 작품 분석을 통해서 드러냅니다. 누바족 사진에서도 확인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리펜슈탈의 재능에만 초점을 맞추고 감독의 주장에 호응하는 추종자들과 파시즘 미학에 너그러워진 일련의 사회 분위기 또한 분석하고 있었습니다.
읽어 보니 제가 아는 바 없어도 당시에 매우 의미있는 에세이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어 댓글을 길게 써 봅니다.
수전 손택의 폭과 깊이에 감탄하는 마음도 생겼습니다.
와 상세한 설명 감사합니다. 저도 리펜슈탈이 그런 식으로 핑계대며 버텼다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말씀하신 손택의 반박 내용은 설명 덕에 처음 알았네요. 수십 년만에 후련해지는 기분!! 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