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리볼버' 잡담

오승욱 감독의 영화는 오래 전에 '킬리만자로'를 좋게 본 기억이 있습니다. 

'무뢰한' 좋아하시는 분들이 많던데 저는 취향상 그냥 그랬고 그보다는 이번에 본 '리볼버'가 조금 더 마음에 드네요. '무뢰한'이 벌써 십 년 전 영화예요.

'킬리만자로'를 지금 보면 어떨지 모르겠습니다. 그때는 좋았지만 지금은 그저그럴 것 같은 느낌적 느낌이 있어요. 내용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므로 별 근거 없이 그런 생각이 듭니다. 일단 주연 배우부터 그때는 아무 생각이 없었으나 지금은 비호감 쪽이 되었거든요.

 

'리볼버'는 흠을 잡자고 시작하면 이상한 구멍이 한두 군데가 아닙니다. 

조무래기 불량배들은 항상 서두가 길다가 당한다든지, 결정적인 순간에 주저하는 악당 캐릭터라든지, 할 줄 아는 건 욕설밖에 없는 돈 많은 말종, 속세를 떠난 조력자의 등장...이런 흔한 설정은 통과하겠습니다만, 주인공 수영이 2년 수감되었다가 출감하는데 사람이 그 정도로 바뀌는 거는 좀 그렇죠. 그런 냉정함과 평정심, 강단을 갖추기에 2년은 너무 짧지 않은가요. 그러면 몇 년이면 될 것인가, 물으면 정답은 없지만 사람이 다짐 좀 한다고 쉽게 변하긴 힘든다고 생각하기 땜에 변모가 비약으로 느껴졌어요. 정재영이 연기한 선배가 '칼침 맞고 홍보실로 도망간 놈이...'란 대사를 합니다. 이런 걸 보면 원래 강단 있는 캐릭터는 아니었거든요. 또 폼 잡던 어떤 인물이 흐지부지 되는 것도 이상했어요. 앞에서 포스로 봐선 한 법석을 할 인물인데 뒷소식 없이 없어지네요. 바닷가에서도 정체가 긴가민가했던 윤선이 보이길래 돈가방을 노리는 최후의 혈전이라도 벌이는가 해서 남은 시간을 확인했어요. 지금 떠오르는 이상했던 부분은 일단 그런 것입니다.    


그런데도 전도연 얼굴이 클로즈업 되면서 피아노 주제가 흐르자 괜찮게 봤다고 생각했습니다. 소주와 꽁치구이(꽁치구이 좋아합니다), 비오는 바다와 조영욱 음악 때문인지 모르겠습니다만. 음악의 힘은 많은 것을 들어올려 주고 안아 줍니다.

그러고 보니 바다와 조영욱 음악의 조합은 '헤어질 결심'과 같네요!

하나도 안 강하면서 폼잡고 밀고 나가고 하나도 안 무서우면서도 무서운 인물인 것처럼 연막을 친 장식들, 그런 껍데기들을 벗겨낸 이야기 같아서 그동안 워낙 많이 나온 이런 류의 이야기를 조금은 벗어나는 시도 같기도 했어요. 치고받는 폭력 장면도 매우 적고 제목의 리볼버도 수영 입장에서 보자면 쓰지 않는 절제에 방점이 찍혀 있습니다. 기존의 이 장르의 과함 일변도, 그 가속도에서 벗어나려는 면이 보여요.  

휠체어를 밀고 산을 오르는 여자, 휠체어를 자갈길에서 밀어내지 못해 안간힘 쓰는 여자 - 이 장면을 유심히 보게 찍었습니다. 내 몫을 지키겠다, 내 책임을 다하겠다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보였고요, 영화를 만든 사람이 끝까지 이 포인트를 잘 전달하기 위해, 과정을 조심스럽게 구축해나가며 이야기가 성립될 수 있도록 고심한 듯함이 느껴져서 좋게 본 것도 있는 것 같습니다.   

쿠팡에서 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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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오승욱이 데뷔작 킬리만자로가 2000년작이었으니 연차로만 따지면 상당한 중견감독인데 여태 총 세 작품 만들었으니 엄청 과작이네요. 이전 작품이 둘 뿐이라 고유의 스타일을 정의하기가 애매하지만 다소 전형적인 한국 조폭/남성의 그 칙칙한 느와르 느낌이었어요. 무뢰한은 전도연이 주인공이었어도 마찬가지였는데 이번엔 쓰신대로 내 몫을 지키고 내 책임을 다하는 여자들의 이야기로 의도적으로 나름 감독 본인으로서는 전복적 시도를 한 것 같았습니다.




      지적하신 문제점들은 정말 눈에 확 들어오긴 하는데 애초부터 그 멋진 쟈켓을 걸친 전도연의 존재감과 스타일로 방점을 찍자는 영화인 것 같아서 중반부터는 크게 신경 안쓰고 그냥 즐기듯이 봤던 것 같습니다. 애초에 오승욱이 놀고 있는데 전도연이 불러내서 술 사주면서 '뭐하냐, 작품 하나 하자'라고 제안을 해서 각본을 썼다고 인터뷰에서 봤어요. 이걸로 백상에서 감독, 여우주연상 탔던데 무뢰한 때도 그랬지만 흥행성적과는 별개로 작품적으로 서로 궁합은 잘 맞는 조합인 것 같습니다.




      대체 행동 동기가 뭔지 갈피를 잡기가 어려웠던 캐릭터를 개인기로 참 재밌게 살려내는 걸 보고 임지연 배우도 참 많이 컸다(?) 싶었어요. 데뷔 초엔 발연기 소리 많이 들었던 것 같은데 피나는 노력과 경험이 쌓여서 가능했겠죠.

      • '무뢰한'이 이야기 면에서는 더 잘 짜여졌는지 몰라도 끈적이는 치정의 내용이 안 맞았습니다. '킬리만자로'가 그 방면에서, 관계자들(?) 끼리는 고평가를 받는 경향이 있던데 시간을 이겨낸 영화 같지는 않아요. 여전히 그때 나름의 감성으로 즐기는 분들도 있겠지만 저는 힘들 것 같아요.


        저는 임지연의 연기를 '더 글로리'에서 보고 이번이 두 번째로 본 것이었는데 연기 잘 한다는 생각을 했어요. 발연기 소리를 듣기도 했나 보군요. 캐릭터가 연기할 만하기도 했지만 여타 인물들 중엔 눈에 많이 들어왔어요. 정재영도 반가왔고요. 지창욱은 여기서 첨 봤는데 자기 몫을 했다고 생각했고, 이정재는 좀 아쉬웠어요.    

    • 아주 오래 전에 평론가들의 호평을 읽고 '킬리만자로'을 뒤늦게 비디오 테이프로였나... 아님 케이블 티비로였나. 암튼 보기 시작했는데 대략 30분을 못 버티고 포기했던 추억이 있습니다. '좋은 영화일진 모르겠지만 내 취향은 아님이 분명해!!' 라구요. ㅋㅋ 그러한 이유로 '무뢰한'도 주변에 좋아하는 사람이 꽤 많음에도 멀리했었고. 이번 '리볼버' 역시 멀리하는 중이었는데요. 이 글을 읽어 보니 이 영화는 한 번 시도해볼만 한가? 라는 생각이 드네요. 확인해보니 듀나님도 우호적으로 평하신 듯 하고.




      임지연씨는 제가 본 작품이 없어서 (정말 아예 없습니다 ㅋㅋ) 데뷔 초에 연기 못 한다고 놀림 당하던 이미지만 오래 갖고 있었는데. 저번에 '더 글로리'로 완전히 역전하더니 이후로는 칭찬만 들려오네요. 원래 잘 하던 분이 나쁜 각본과 연출로 데뷔해서 욕을 먹으셨던 건지... 아님 그동안 일취월장하신 건진 모르겠지만 암튼 흥미로워요. 이제사 '인간중독'을 찾아 볼 생각은 없으니 이 영화라도 보면서 어떤 분이신지 확인해 봐야겠습니다. 하하.

      • 이 감독님은 수십 년 걸쳐 세 작품을 아주 띄엄띄엄 내놓으셨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시간의 흐름만큼 시대의 변화를 파악하고 작업하시는구나,라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몇 년 후에 나올 작품도 볼 것 같아요. 저는 막 재미있지는 않아서 막 추천하기는 어렵지만 저보다 로이배티 님께선 레퍼런스도 많이 찾아내실 거 같고(감독님이 이소룡 영화를 좋아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거 같아요) 호기심 있으시면 시도해 보시길요.


           


        임지연 배우가 '인간중독'에 나왔었군요. 제가 본 두 편은 독한 역할, 튀는 스타일의 연기였는데 다른 역할들도 잘 해낼지 보고 싶네요. '인간중독'은 안 보고 싶지만요.  

    • 저는 전도연 캐릭터가 어린 나이부터 검도계에서 산전수전 겪으면서 냉정함과 평정심, 강단을 갖추게 된 사람이라고 봤습니다. 사실 대부분 여자들은 물리적인 폭력과 거리가 멀어서, 사소한 육체적 위협에도 움츠러드는데-상대가 팔을 치켜올리기만 했는데도 임지연 캐릭터가 머리를 감싸며 엎드린게 꽤 정확한 묘사죠-검도부 경험으로 그런 벽을 넘어선 사람이라고요. 칼침을 맞고 홍보실로 후퇴했더라도 일단 칼침을 맞을 수 있는 일선에서 일한 적이 있다는 것 자체가 꽤 독특한 경력이었다고 봅니다. 뭐 나름 부패 경찰로 범죄계의 온갖 위험과 가까이 하며 그걸 통제하며 살아 온 사람이 뒤통수를 맞아 감옥 씩이나 갔으니 이런 결과가 나올 수 있었다고요. 사실 말도 안되는 사기 캐릭터이긴 하지만 전도연이 근사하게 연기해서 그냥 속아주게 된달까요.      

      • 감옥 가기 전부터 속물적이고 현실적인 사람인 것은 맞는데, 출감 후 실질적인 대책은 부족한 채로 혈혈단신 거악을 상대하며 직진하는 게 뭐 믿고 저러는지? 란 의아함은 생겼습니다. 목숨 내 놓고 간다는 심정이라고 짐작하는 수밖에 없었어요. 그런 결심 부분이 조금더 조명되었으면 좋았겠다 싶었어요. 하여튼 전도연의 평정심과 강단이 근사했다는 것은 모두 동의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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