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브스턴스]에 대한 의문

이 영화는 여성의 외모를 가지고 판단하는 남성 주류의 세계를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 현실은 너무나 명약관화해서 달리 부정할 필요가 없습니다. 그러나 이 영화의 비약에 대해서는 한번 질문해볼 필요가 있을 것 같습니다. 어떤 주체를 압박하는 사회적 부조리가 있다, 는 진단과 그러니까 그 주체들이 무엇무엇을 할 수 밖에 없다, 는 진단은 상관관계와 인과관계를 뒤섞어놓은 편의적 주장 같습니다. 여성이 성형을 할 수 밖에 없는 압력이 존재한다, 와 그러니까 어떤 여성이 성형을 했다는 건 좀 연결고리가 허술해보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의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계속해서 젊음/성형 중독에 빠지는 것이 부조리의 필연적 결과인지를 되묻게 됩니다.


영화는 오프닝 때 계란의 노른자가 두개가 되는 것을 보여주면서 "서브스턴스"의 효과를 암시합니다. 그리고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라는 한 여성이 어떻게 헐리우드에서 주목바다가 사라지는지 명예의 전당 손바닥 표시가 햄버거 소스에 더럽혀지는 것으로 묘사합니다. 속된 말로 그는 한물 간 배우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는 이 이야기가 모든 여성을 향하는 보편적 욕망과 압력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이런 약품이 있구요, 이런 여성배우가 있습니다, 라고 이 이야기의 대상을 어느 정도 한정시키고 있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엘리자베스 스파클의 현재를 보여주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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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복도를 지나 화장실에 들어갔을 때 그는 프로듀서 하비가 자신의 외모에 대한 뒷담화를 하는 걸 듣게 됩니다. 이 장면에서의 미장센이 그 유명한 [샤이닝]의 복도와 화장실을 인용했다는 것을 곱씹을 필요가 있습니다. [샤이닝]의 그 오버룩 호텔 복도에서, 그리고 화장실에서 사람이 미쳐갔습니다. 화장실에서 주인공인 잭은 오래전에 가족을 몰살했던 투숙객 딜버트 그레디의 환영과 대화했습니다. 어떤 고전의 미쟝센을 인용하는 것은 그 미쟝센이 품고 있는 함의도 인용하게 됩니다. [샤이닝]에서의 복도와 화장실에서 벌어지는 일은 단순합니다. 자기가 제일 무서워하던 일을 전조로 맞닥트리는 공간입니다. 잭이 화장실에서 토렌스를 만났을 때, 그는 자신이 통제하지 못하는 폭력을 내면에서 다시 발견하고 불안해했습니다. 마찬가지로 엘리자베스도 이 화장실에서 자신이 제일 두려워하던 공포를 조우하고 맙니다. 그것은 자신이 사람들에게 늙고 추한 여자로 취급받을지도 모른다는 공포입니다.


그런 면에서 사회의 부조리를 이야기하는 것과, 부조리에 의해 생긴 공포를 다루는 건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 [샤이닝]을 보면서 가부장제의 폭력성을 이야기할 수는 있지만 잭 토렌스를 가부장제의 희생자나 그에 세뇌된 피해자로 보기는 좀 무리가 따릅니다. 외모지상주의 세계가 젊고 예쁜 여자를 선호하게 한다는 압력과, 그 압력에 의해 여성이 어떤 공포를 가졌다는 걸 분리해서 봐야됩니다. 지금 여기는 미친 사람들의 공간이고 여기서 또 다른 미친 사람이 생겨나고 있다는 미쟝센을 조금 더 들여다볼 필요가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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엘리자베스 스파클은 한 때 헐리웃에서 전성기를 누렸던 스타 여성배우입니다. 그리고 그는 무례하고 남성중심적인 프로듀서 하비에 의해 강제적으로 하차를 당하게 됩니다. 당연히 모욕적이고 열받는 일이겠죠. 그런데 이상한 것이 있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꼭 그 에어로빅 방송을 계속 할 수 있어야 하냐는 것입니다. 사람이 하던 일을 그만뒀을 때 가장 먼저 들이닥치는 곤란은 바로 생계유지의 어려움입니다. 내가 밥을 먹고 계란을 사고 집세를 내는데 필요한 돈이 없어집니다. 생존을 위한 의식주가 위협을 받습니다. 그러니까 이 조건을 엘리자베스 스파클에게 묻게 됩니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그 요가방송을 그만 두면 그가 생계의 위협을 느끼냐는 겁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영화에서는 그가 이 방송을 그만두면서 경제적 곤란이 찾아왔다는 묘사는 아예 없습니다. 그는 굉장히 크고 화려한 집에서 살고 있으며 영화가 끝날 때까지도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이런 점에서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에어로빅 방송에 갖고 있는 집착은 생계와는 동떨어진, 개인적 요소라고 봐야할 것입니다. 그는 이미 이룰 걸 다 이룬 헐리웃 배우입니다. 그리고 어느 헐리웃 배우나 겪는 전성기 이후 대중에게 잊혀지는 과정을 겪고 있을 뿐이죠. 물론 그 자신에게는 서럽고 처참한 일이겠습니다만 동시에 반문을 던지게 됩니다. 왜 그 은퇴를 그렇게까지 수용하지 못하고 저항하는가, 그런 것이죠.


이런 점에서 저는 엘리자베스 스파클이라는 캐릭터의 특수성과, 그로 인한 욕망의 특수함을 조금 더 구체적으로 들여다보고 싶어집니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20대에 사랑받는 여성배우로서 스타가 되었던 사람입니다. 대중에게 열광적 예찬을 받는 게 일상이었던 사람입니다. 그런 사람이 이제 에어로빅 방송에서마저 밀려났을 때, 더 이상 대중으로부터의 사랑과 찬사를 들을 길이 없어진 것입니다. 그는 젊어서부터 직업적 특수성 때문에 외모로 누리던 찬사, 경제적 수입이나 사회적 명예를 계속 충족해왔던 사람입니다. 일반 여성과는 궤가 다른 삶을 사는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그는 이 외모로 얻는 찬양에 중독되어있는 사람입니다. 영화는 여기서부터 시작합니다. 이 출발점의 특수성을 간과한 채로 이것을 보편적 여성의 삶이라 여기는 것이 정확한지 좀 의문을 품게 되는 거죠. 저는 오히려 이 영화가 중산층 여성의 욕망을 대변하는 것처럼 느껴집니다. 사회적, 경제적 안정은 어느 정도 구축해놓았으니 이제 노화만 통제하면 된다는 그런 계급적 욕망을 더 느끼게 된달까요. 


너가 여자의 삶을 안살아봐서 그렇다고 누군가는 꾸짖고 싶으실 수도 있겠죠. 저는 또 다른 근거로 이 영화의 다른 부분을 갖고 오게 됩니다. 엘리자베스가 서브스턴스를 맞고 수가 되었습니다. 그 다음에 수가 하는 일이 뭡니까. 수가 다시 그 에어로빅 방송에 도전합니다. 그는 그 재수없는 하비에게 다시 한번 매력을 어필하면서 똑같은 방송을 하려고 합니다. 이건 좀 이상하지 않나요? 자기보고 50대 되어서 매력없고 추하다고 씹은 남자한테 왜 굳이 인정투쟁을 합니까? 왜 자기를 못났다고 욕한 남자에게 그렇게 기를 쓰고 매력을 확인받아야할까요. 다른 길들이 널리고 널렸습니다. 유튜버가 되도 좋고 인스타그램이나 틱톡의 인플루언서가 되는 것도 방법입니다. (서브스턴스의 조건을 맞추기도 훨씬 편합니다) 엘리자베스가 김종국 같은 사람이라 그런 걸 잘 몰라서 그랬을 수도 있겠습니다만, 그래도 다른 길이 얼마든지 있습니다. 아니면 아예 외모와 상관없이 그냥 그 젊음을 만끽하면서 다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자신을 늙었다고 모욕하는 남자는 멀리하고, 젊어진 채로 대중에게 사랑받는 다른 길이 많습니다. 엘리자베스 스파클은 애초부터 에어로빅 진행자가 아니라, 헐리웃 여자배우였던 사람입니다. 그러니까 수가 되었다면 헐리웃에 도전해도 됐을 일입니다. 그런데 굳이 그 에어로빅 프로그램을 다시 하겠다고 합니다. 우리 다 한번 생각을 해봅시다. 거울로 봐도 자기자신이 너무 예쁘고 매력이 장난 아니게 되었는데, 나를 무시하고 싫다고 한 사람들을 굳이 찾아가서 후회하게 해주거나 그 사람들이 자신에게 반하게끔 노력을 할 것인지. 그냥 잘나가는 다른 사람들 만나고 다른 사람들한테 매력인정받으면 그만 아닐까요.


이걸 토대로 20대의 몸은 가졌지만 50대의 욕망에 갇힌 그 의식구조로 영화를 풀어갈 수도 있겠지만,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본질은 엘리자베스의 결핍입니다. 이 사람이 심각한 결핍에 빠져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니까 자신이 좋아하지도 않는 남성에게 인정투쟁을 벌이는 지경에 이미 이르렀다는 것입니다. 이 캐릭터는 '사랑받음'에 중독된 상태입니다. 보통 사람은 이렇게까지 사랑받음에 중독되지 않습니다. 나를 싫어하는 사람의 마음을 기어이 돌리고 사랑받을려고도 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극중 엘리자베스는 객관적으로 봤을 때 너무 별로이고 후져보이는 어떤 남자동창과 굳이 약속을 해서 나가려다가 안나갑니다. 내가 좋아하지도 않는데, 그런 사람의 관심과 애정조차도 확인하고 싶어서 약속을 잡는 지경에 빠진 사람입니다. 서브스턴스를 하기도 전부터, 이 사람은 이미 이 사랑받음의 결핍에 지독하게 시달리고 있다는 것입니다. 


저는 이런 점에서 이 영화가 보편적 교훈으로 작동하는지 조금 의심하게 됩니다. 헐리웃 여성배우들에게, 혹은 미디어업계에 종사하는 여성들에게 그 영역이 위험하다는 경고장으로 작동할 수는 있을 것입니다.  


이 영화를 보편적 페미니즘 교훈극으로 마냥 해석하기는 어려운 또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별다른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그는 서브스턴스를 맞고부터는 완전히 중독 상태가 됩니다. 속된 표현으로 주사 효과에 그냥 뿅갑니다. 물론 이것은 현실 속의 수많은 안티노화를 표방하는 젊음장사 및 성형수술들에 대한 경고이기도 하겠지요. 거울 속 달라진 내 모습이 주는 효능감을 너무 믿지 말라는 말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런데 이 영화에서 엘리자베스 스파클로 대표되는 '여성'은 아무 선택도 못하고 아무 성찰도 못합니다. 그는 계속해서 망가져만 갑니다. 노화도 그냥 노화가 아니라, 피골이 상접하고 봐주기 힘든 몰골입니다. 그러니까 이 영화를 그대로 따라가면 이런 결론이 나옵니다. '여자들아 성형 조심해라, 성괴 아니면 노괴 된다.' '여자들아 남자들한테 너무 잘 보이려고 하지 마라, 인생 아작난다.' 세상의 어떤 부조리는 너무 강력하니 그에 현혹되지는 말라는 주장이 혐오스러운 여성의 외모로 완성됩니다.


물론 영화는 이에 대한 알리바이를 마련해놓기는 했습니다. 이 썩을 놈들아 다 한번 엿되봐라, 하고 몬스트로 엘리자수가 피를 분수처럼 뿜어냅니다. 이 장면에서 인용하는 [캐리]를 생각해본다면, 그것은 자신이 온전히 모욕의 대상으로만 남지 않을 것이며 감히 평가를 할 수 없고 편하게 골려먹을 수도 없는 주체로서 저항하겠다는 뜻이기도 할 것입니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은 끝내 사회의 인정을 받지 못한 채로 울분을 토해낸 개인의 모습이며 결국 아무도 구원받지 못했다는 함의도 의심하게 됩니다. 실제로 이 이후에 영화는 몬스터 덩어리에서 엘리자베스의 얼굴만 떼어내고 그 얼굴은 명예의 전당 별자국 위에 떨어져 숨을 내쉬다가 죽어버립니다. 그는 한순간 꿈틀대기는 했지만 비참하고 잊혀지는 존재로 영화는 마무리됩니다. 


요즘 들어 어떤 여성들의 피해자성을 부각하고 그것을 강조하는 것이 과연 정확한 페미니즘인지를 고민하게 됩니다. 혹은, 그것을 무비판적으로 페미니즘 교보재처럼 소비하는 것이 맞는 것인지도 의문입니다. (예전에 들었던 어떤 강연에서 소설 82년생 김지영을 페미니즘 소설로 봐야되는지 정말 많은 의문이 든다고 모 교수님이 했던 말이 생각납니다) 여자들이 행복하게 산다거나, 여자들이 어떤 문제를 충분히 극복할 수 있다는 무조건적 긍정을 하려는 게 아닙니다. 미디어산업에서 여성의 신체를 착취하고 있는 현실에 문제제기를 해야하는 것도 맞습니다. 그러나 그 문제를 각성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인생이 망가진 여자'의 이야기를 신화 속 금기처럼 다뤄도 되는지를 잘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이 영화는 그 문제를 아주 짜릿하고 쾌감 넘치는 에어로빅 방송처럼 찍고 있습니다. 영상물이 주는 특유의 '도파민'이 우리에게 주입하는 것이 결국 무엇인지 좀 곱씹게 됩니다. 저는 이 영화의 호러장르적 부분을 굉장히 좋아하지만 이 영화의 정치적 부분에 대해서는 조금 섬뜩해지기도 합니다. 장르와 메시지는 충돌하는 경우가 많으니 그 둘을 더 구분해봐야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 저는 데미 무어가 이 영화로 오스카 여우주연상 후보에 올랐다는 것을 굉장히 감동적으로 봤습니다만, 한편으로 데미 무어가 다른 젊은 여자배우한테 여우주연상을 뺏겼다면서 슬퍼하는 괴상한 감상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가 없더군요. 이 영화의 부작용이 딱 그런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 잘 읽었습니다. 전반적으로 동의하며 읽었어요.


      '보편적 페미니즘 교훈극으로 마냥 해석하기는 어려운 또다른 지점이 있습니다. 영화 속에서 엘리자베스 스파클이 별다른 주체성을 발휘하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저도 이 생각이 강하게 들었지요. 끝이 빤한 동일한 업계로 돌아가는 것을 보면서 자기 안에 갇힌 여성, 성찰없는 여성을 그렸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결국 피해자로만 남게 되는 결말이었습니다. 


      그런 면은 데니스 퀘이드 중심으로한 업계 남성들 표현에서도 느낄 수 있었어요. 이 사람들은 적으로서의 강함이나 비열한 권위나마 위엄이 하나도 없고 그저 우스꽝스럽고 혐오스러울 뿐으로 표현되어 있어요. 대항할 적의 위용이라고는 없이 묘사되어 있어요. 그냥 하찮은데 그럼에도 이들의 논리에 복속합니다. 의심되지 않는 기본 조건으로요.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적은 시스템이 아니고 젊은/ 늙은 자신이고, 둘이 싸우고 거기서 맴돌다 벗어나지 못합니다. 


      늙고 추해지는 것에 대한 공포를 조장하고 압박하는 외부에 시선을 돌리게 하는 영화는 아니었고, 글에 쓰셨지만 그 공포에 굴복하면 이렇게 된다는 여성에게 주는 교훈극 정도는 되는 것 같습니다.  


       





      • 저는 엘리자베스의 집을 볼 때부터 와... 잘사네... 그런 생각을 했는데 수가 되면서도 굳이 그 에어로빅 일을 하겠다는 게 좀 이해하기 어렵더라고요. 물론 이 영화 자체가 변신을 소재로 하는 신화적 속성이 있긴 한데 그렇게 할 경우 여성이란 존재가 남성의 욕망과 지배를 영원히 떠나지 못하고 회귀해서 복무하고 만다는 존재로 그려진다는 게 좀 걸리더라고요. 그런 사람들이 없는 게 아니고 그 중독이라는 걸 개인이 쉽사리 극복할 수 없다는 걸 이야기한다는 건 알겠지만...




        트위터에서 어떤 분이 메를로 퐁티의 철학을 좀 알면 이 영화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될 거라고 해서 관련 책들을 읽어볼까 생각 중입니다.

    • 감독이 하려던 이야기는 여성이 얼마나 자기를 혐오할 수 있는가였다고 생각합니다. 스스로 자신의 늙은 부분을 보고 이 영화를 떠올렸다고 하기도 하니까요. 페미니즘 서사는 그 과정의 부산물이었다고 보여요. 얼마나 자기가 늙을 자신을 싫어하는지 그것이 내재된 것이든 외부로부터 주입된 것이든 얼마나 부조리한지 보여주죠. 당연히 답은 없습니다. 피의 분수일 뿐. 저는 그래서 좋았어요.

      • 음, 저는 이 영화에 따라붙는 반응에서 외재적 해석을 하게 되는데요. 많은 사람들이 '피해자로서의 여성'을 이 영화를 보고 깨우치길 원하는 걸 보면서 여러 질문들을 던져보게 되더군요. 말씀하신 관점에서 이 영화를 보는 방법도 있을 것 같습니다. 내재적으로 따라가더라도 보는 관객을 막다른 궁지에 몰아넣는 힘이 대단하다고 생각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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