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속의 홍콩(인지구, 아비정전, 화양연화)
영화광으로서 처음 가보는 도시를 방문하면 제가 좋아하는 영화 속 배경이 된 장소를 찾곤 합니다. 뉴욕이나 파리 같은 도시는 수많은 영화의 배경이 되었고, 많은 경우 그곳이 유명 관광지여서 그냥 관광만 충실히 해도 많은 장소를 방문할 수 있지만, 너무 알려진 장소이면 오히려 좀 감흥이 없기도 했어요. 제가 가본 영화 배경지 중에서 가장 기억이 남는 장소는 비엔나 공동묘지 입구길이었는데요. ‘제 3의 사나이’의 롱테이크에 아주 의미있게 나오는 장소이자 알만한 예술가들이 잠든 유적지이고, 서구 공동묘지들이 흔히 그렇듯이 매우 평화롭고 아름다운 곳이었습니다.
이번에 홍콩을 가면서 여러 영화 배경을 찾아보았는데요. ‘중경삼림’의 배경이 된 중경맨션이나 미드레벨 엘리베이터도 있고, ‘다크 나이트’의 배경이 된 IFC빌딩, ‘트랜스포머’에 나왔다는 익청맨션 등등이 유명하더라고요.
하지만 제가 직접 가서 걸어보고 싶은 장소는 따로 있었으니 ‘인지구’에서 매염방이 장국영을 기다리며 걸어다니던 고가도로 아래 길이 먼저 궁금했고요. ‘아비정전’에서 장만옥이 유덕화와 헤어져 걸어가던 돌담 옆길을 거닐고 싶었습니다.
여행 전 구글 검색 결과 ‘인지구’길을 쉽게 찾았는데, ‘아비정전’길은 뭔가 지도상으로 알아보기 어려워서 일단 가 보기로 했습니다. ‘인지구’길은 Hill Road인데 홍콩대학 지하철 역에서 Hill Road로 표기된 출구로 나오면 바로 입니다. 홍콩 지형상 고가도로는 사방에 있고, 고가도로 아래 경사로도 몇십군데는 될 텐데요. 이 고가도로는 건축적으로 매우 특이하고 아름다운 기둥이 있어서 한눈에 알아 볼 수 있었습니다. 고가 아래의 상가들은 영화 촬영 이후에 많이 변한 듯 하고요. 고가 기둥 몇몇에도 좀 촌스러운 공공미술 벽화를 그려 놓았지만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들은 가 볼만 합니다. 길눈이 어두운 저는 혹시 찾기 어려울까 대낮에 갔지만 지하철역 입구 바로 앞이니 다음에 오게 되면 밤 시간대에 와서 매염방 유령을 기다리며 걸어 볼까 합니다.
‘아비정전’길은 Conduit Road가 Castle Road와 엇갈리는 지점이었는데요. 여기는 미드 레벨 꼭대기여서 접근이 더 어려웠습니다. 게다가 지도상으로는 두 길이 어떻게 교차하는지 알기 어려워서 헉헉대며 수많은 계단들을 올라가 보니, 높이 차이가 있어서 두 길이 만나는 부분은 경사진 차도만 있는 구조였습니다. 영화에서는 아무도 없는 돌담길이고, 길이 굽어지는 부분에 공중전화 박스가 있었는데요. 실제로는 차만 다닐수 있고, 사람은 걸어갈 수는 없는 곳이었어요. 영화 주제곡이 흐르는 가운데 공중전화 벨이 울리는 장면을 정말 좋아하는데, 이 곡을 들으면서 걸어보고 싶은 제 희망은 좌절되고 말았습니다. 게다가 워낙 외진 곳이라 숙소로 돌아가기도 힘들었고요.
세번째로 방문하고 싶은 공간은 ‘화양연화’에 나오는 스테이크 레스토랑인데, 이 가게는 벌써 몇 년 전에 폐업했데요.
이렇게 홍콩 배경 영화들을 찾다보니 제가 좋아하는 홍통 영화들의 공통점이 보입니다. '인지구'는 1930년대에서 온 유령이 있는 1987년 영화이고, '아비정전'은 1960년대를 배경으로 한 1990년 영화입니다. 심지어 화양연화도 1962년을 배경으로 한 2000년 영화이고요. 다들 과거의 홍콩을 아련하게 바라보는 영화들인 겁니다. 이 영화들도 다 이제 옛날 영화가 되었는데 거기에서 더 과거로 돌아가려는 제 노력은 실패할 수 밖에 없었던 겁니다.
생각해보니 '인지구'길은 심지어 영화 속 지리와도 일치합니다! 영화에서 나온 것처럼 트램 정거장에서 모퉁이만 돌면 '인지구'길이 나와요. 영화에선 1930년대 여인이 1980년대 거리를 보면서 변했다고 한탄하는데, 거기에 2020년대 사람이 찾아가서 더 변했으면서 또 그대로인 거리를 보고 왔으니 참 감회가 새롭습니다.
와 멋지십니다!!
사실 홍콩엔 가 본 적도 없는데 어려서 본 영화들 때문에 괜히 익숙하구요. 마침 최근에 '인지구'를 보면서는 말씀대로 이게 과거의 홍콩을 추억하는 이야기인데, 지금 저 거리를 가 보면 어떤 느낌일까... 라는 생각을 한 적이 있거든요. 근데 그걸 실제로 실행에 옮기시다니 정말 대단하세요. 하하.
실패할 수 밖에 없었다... 고 적으셨지만 과거를 회상하는 과거의 영화를 좋아하셨으니 오히려 맥락에 맞는 것 같기도 해요. 극중에서 매염방 유령이 80년대의 홍콩 거리를 걸으며 느꼈던 기분을 비슷하게 느끼실 수 있지 않았을까요. 그러니 만족하셔도 좋을 것 같다... 고 맘대로 생각해 봅니다.
홍콩은 21세기 첨단도시면서도 고풍스럽고 낡은 느낌이 있는데, 그런 감성이 살아 있는 홍콩 영화들이 20세기말에 많이 나왔던 것 같습니다. 영화평론가들이 1997년 홍콩 반환을 앞두고 홍콩 영화인들이 과거에 대해 느낀 향수와 미래에 대한 두려움이 반영된 분위기를 이야기했는데 이 분위기가 저에게 와닿아서 이 시기 영화들이 이렇게 좋은가봐요. 홍콩은 그리 멀지도 않은데 앞으로 자주 가보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