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난' 잡담

1970년대 중반쯤에 코난 팬이었던 각본가 에드 서머는 아놀드 슈워제네거의 보디빌딩 다큐멘터리 [펌핑 아이언](당시는 영화가 공개되기 전)을 미끼로 제작자 에드워드 프레스먼을 꼬십니다.
아놀드는 마치 프랑크 프라제타의 코난 그림을 찢고 나온 것 같은 인물이었습니다. 프라제타는 화가이기 때문에 그가 그린 코난 그림은 실제 사람의 몸을 그렸다기 보다는 화가가 생각하는 이상적인 몸을 묘사한 것이었지만, 그런 근육을 가진 사람이 세상에 실제로 존재했던 겁니다.
이사람을 주인공으로 영화를 만들면 실패할 리 없다고 생각을 굳힌 프레스만은 아놀드에게 출연제의를 했고, 이미 영화판에서 쓴맛을 한번 본 적이 있던 아놀드가 주저했지만 끈질기게 설득합니다.

에드 서머는 마블의 로이 토마스(마블 코난 만화의 대부분을 쓴 사람으로 코난 월드에서는 아주 중요한 인물입니다)와 친분이 있어서 둘이 공동으로 각본을 썼고, 이런저런 사전작업에 들어가...려고 하는데 중대한 난관에 봉착합니다. 제일 먼저 처리해야할 일, 라이센스 획득에 난항이 생긴 겁니다.

원작자인 하워드가 일찍 죽고 후계가 없었기 때문에 저작권이 꼬이게 되었는데..... (작가 사후 잊혀져가던) 코난 소설을 세상에 다시 알려 유명해지게 만들었고 코난 월드를 구축해 코난교의 교주격으로, 실질적인 저작권자 행세를 하던 엘 스프레이그 드캠프와, 하워드의 유산을 물려받은( 하워드와 혈연지연등은 일체 없는) 사람들의 권한대행을 하고있던 글렌 로드 사이에서 분쟁이 벌어진 것이었습니다.
드캠프는 본인이 짜놓은 틀에 맞추기 위해 하워드의 작품들을 개작해서 세상에 내놓았었고, 하워드 골수팬이던 로드는 그걸 못마땅해해서 하워드의 원본 텍스트를 그대로 출판하고싶어했습니다. 그래서 양측간에 충돌이 벌어진 것이었죠.

이 분쟁은 몇년을 이어졌고 그동안 프레스만은 손가락만 빨아야했습니다. 결국엔 양측이 합의하게 되었는데,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이 합의를 이끌어낸 건 [스타워즈]가 아니었나 싶어요. [스타워즈]는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박스오피스 성적을 거두었을 뿐 아니라, 영화 외적으로도 사상 유례가 없는 엄청난 관련 프랜차이즈 성공을 이끌어냈죠. 이걸 지켜본 코난 관련자들이, '영화 한편이 성공하니 이렇게까지 벌어들일 수 있는데, 지금 영화화 신청이 들어와 있는 마당에 우리가 이렇게 싸우고 있을 때가 아니다...' 이렇게 된건 아닐까 하고...ㅎㅎ

뭐 어쨌든, 프레스먼은 드디어 코난의 라이센스를 얻을 수 있게 되었고, 하는 김에 레드 소냐와 정복자 칼의 권리까지 같이 샀습니다. 꼭 영화로 만들겠다고 마음먹었다기 보다는 다른 사람들이 채가서 아류를 만드는 것에 대한 방어 목적이 아니었나 싶습니다만... 어쨌든 나중에 다 활용이 되긴 했죠.

라이센스 따냈다고해서 다 해결된 건 아니었습니다. 영화 찍을려면 돈이 있어야죠. 코난은 이미 60년대말에 다른사람도 아닌 해리하우젠이 영화화를 진지하게 검토했던 적이 있습니다. 하지만 돈 대겠다는 제작자가 안나서서 결국 포기했어요. (그때 해놓은 디자인들을 버리기 아까워 나오게된 게 이상할 정도로 아랍과는 동떨어진 이미지들로 가득차있던 70년대의 신밧드 영화)
프레스먼도 물주를 찾지 못해 고민합니다. 장르 팬덤에서의 기대치는 높지만 영화계쪽 인사들한테는 코난이 잘 알려져있지 않았으니까요. 정작 프레스먼 본인도 서머가 알려주기 전까지는 코난이 뭔지도 몰랐다고 해요.

에드 서머나 로이 토머스 둘다 영화계쪽에서 그닥 자금동원력이 있는 인물은 아니어서, 프레스만은 마침 그시기에 아카데미 각본상을 수상해 주가가 팍 뛰어오른 올리버 스톤을 영입합니다. 스톤도 코난 팬이었다고 해요.
서머/토마스 각본은 폐기되고 스톤이 처음부터 이야기를 다시 씁니다.

프리 프로덕션만 몇년째 하고있던 코난 프로젝트는 이탈리아 출신 제작자인 디노 데 라우렌티스가 참여하면서 본격적으로 진행이 되기 시작합니다.
프레스먼과 라우렌티스를 연결시켜준건 라우렌티스 제작 영화 [바람과 라이온]의 감독인 존 밀리어스라고 합니다.

원래 밀리어스는 프레스먼이 코난 영화화를 결정했던 초기부터 생각했던 감독후보였는데, 당시에는 다른 영화 스케줄이 잡혀있어서 고사했었더랬습니다. 그 후 프레스먼은 이런저런 감독들(엄청 쟁쟁한 이름들이 나옵니다)을 후보로 올렸지만 이런저런 문제로 지연이 되는동안 다 무산되었고, 밀리어스가 영화 다 찍고 난 다음에도 감독이 결정되지 않아서 걍 하게되었다고 합니다.

그시기에 디노 데 라우렌티스는 [스타워즈] [슈퍼맨]등이 히트하면서 동시에 각종 프랜차이즈 라이센스로 엄청난 수익을 올리는 것을 보고 감명받아 그 비슷한 건수를 찾고 있었다고 하는데 밀리어스가 요새 잘나가는 만화라고 코난을 추천했다고 합니다. 거짓말은 아니었던게, 실제로 70년대에 코난은 마블 코믹스에서 제일 잘나가는 만화였거든요.

밀리어스가 감독을 하게되면서 우선적으로 해야했던 게 각본을 고치는 일이었습니다. 밀리어스 본인도 알아주는 각본가였으니까요. 스톤의 각본은 현실적인 제작 가능성보다는 스톤 본인의 빠심이 반영되어 있어서 '영화화 불가능한' 이야기였다고 합니다. 온갖 괴물들이 나오고 마지막엔 반지의 제왕급 대규모 전투가 있었다고 하네요. 뭐 굳이 만들려고 하면 불가능까지는 아니었겠지만, 이런저런 당시 형편상 영상화 난이도및 투자비용이 너무 높았던 거겠죠.

고쳐쓰다보니 걍 처음부터 끝까지 새로 써버렸습니다. 그래서 스톤이 쓴 각본과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가 되었지만, 올리버 스톤의 이름은 공동각본이라는 명목으로 크레딧에 남았습니다.
애초에 스톤을 영입한 이유가 아카데미 수상자라는 이름값 때문인데 버리긴 아까웠겠죠. 그래도 그동네 규정상 최종각본에 일정지분 이상 기여한 사람은 공동각본으로 올리게 되어있었고, 스톤의 각본은 코난이 납치된 공주를 구하러가는 이야기였는데, 밀리어스의 각본에도 공주 구하는 이야기는 끼어들어가 있습니다.(아무도 그게 중요하다고 생각 안하지만)

어쨌거나 이래저래 해서 영화는 최초 기획으로부터는 물론이고 영화화 발표가 공식적으로 났던 70년대 말에서부터도 한참이 지난 82년 봄이 되서야 유렵에서 공개가 됩니다. 미국에선 몇달 뒤에 개봉했고요. 그 사이에 이미 미국에선 아류작 [스워드]가 선수를 치기도 했죠.
코난은 장르팬덤에서의 사전 기대치가 높았던 영화라서 다들 대박날거라 예상하고 있었는데 그런 거에 비해서는 그렇게까지 크게 성공한 건 아닙니다. 미국에선 아류작인 [스워드]가 [코난] 거의 뺨칠 정도의 흥행을 했고, 저예산인 [스워드]가 가성비면에서는 더 대박났다고 볼 수도 있죠. 미국내 박스 오피스 순위상으로는 아주 높은 편은 아니지만 세계흥행으로는 상당한 성과를 올립니다.
글고 영화가 나옴으로 해서 코난이라는 캐릭터의 인지도가 급상승했죠. 미국내 환타지 장르 또는 만화팬들은 이미 잘 알고 있는 캐릭터였다고 해도 영화는 그와는 비교도 안되게 파급력이 크니까요. 미국 이외의 지역에 코난이 알려진 건 영화의 덕이라고 할 수 있고요.

원작팬들도 당시에는 열광했습니다. 문제점이 없는 건 아닌데, 당시엔 그게 눈에 들어오지 않았고, 팬들은 영화 [코난]이 하워드의 세계관을 충실히 재현한 작품이라고 생각했습니다.

근데... 아마 라우렌티스 영감님은 나중에 코난이 어떤 작품이라는 걸 알고는 자기가 속았다는 걸 깨달았을 겁니다. 원작 소설은 [슈퍼맨]처럼 아이들 대상으로 프랜차이즈를 펼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죠.(해리하우젠 영화화가 빠꾸먹은 것도 그 이유때문이었다고 합니다.) 거기다 밀리어스가 절대 그렇게 못하도록 영화를 만들었습니다. 그래도 이분은 예술의 나라 사람이라 그런지 영화 자체에는 터치를 하지 않았습니다. 대신에, 속편은 좀 더 도끼눈을 뜨고 관리했겠죠ㅎㅎ

21세기 들어서는 존 밀리어스의 [코난]이 원작에 충실하지 않다는 이유로 까는 사람들이 꽤 생겼습니다.
영화가 개봉될때만 해도 코난교에서 가장 영향력이 있는 인물이 드캠프였지만 2000년대에 드캠프가 사망하면서 영향력이 팍 추락하게 되고, 하워드의 원본 텍스트를 중시하는 쪽이 득세하게 됩니다.

밀리어스의 각본은 그때까지 코난 패스티시를 쓰는 작가들이 암묵적으로 지키던 금기를 깨뜨린 거였습니다. '하워드의 정전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거.
하워드가 쓴 코난 소설들이 처음부터 듬성듬성 중구난방식이었기 때문에 -일부러 그렇게 쓴 거라고 하고요- 이야기 사이사이에 빈 시간대가 엄청 많고, 패스티시 작가들은 그 빈틈을 메꾼다는 식으로 이야기를 만들었습니다.
그렇게 해서 하워드의 원전을 기본틀로 해서 그 사이에 다른 작품들을 끼워넣어 하나의 연대기로 정리될 수 있도록 만드는거. 그 사이사이 자잘한 설정충돌 오류가 있을 수는 있어도 큰 틀을 깨뜨려선 안됩니다. 서머/토마스의 각본도 그런 이야기였다고 하고요.

하지만 밀리어스는 코난의 어린시절부터 성인이 될 때까지의 일대기를 새로 써버렸습니다. 기존의 코난 연대기에 끼워넣을 수 없는 완전 별개의 이야기죠. 그리고 코난의 캐릭터성에도 변형을 줬는데, 코난이 말 없는 무뚝뚝한 인간이 되어버린건 아놀드라는 배우의 대사치는 능력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고는 해도, 어려서 노예생활을 했다거나 하는건 하워드의 코난상과는 거리가 있습니다(이건 실은 정복자 컬의 어린시절 이야기고 드캠프가 자신의 코난 연대기에 슬쩍 집어넣은 거였다고 합니다. 밀리어스가 각본을 쓰던 시기는 드캠프가 교주이던 시절이니까 그 영향을 받았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절대 기도따윈 하지 않는 코난이 신에게 기도하는 장면도 21세기 코난 팬들은 불평을 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2011년에 제이슨 모모아를 기용해서 만든 리메이크는 82년작보다 원작에 더 충실한 이야기를 만들겠다고 공언했지만 그 원작에 충실하다는 게 밀리어스처럼 큰 틀을 깨지는 안겠다는 정도였던 거 같고요... 영화도 뭐 그저그런 패스티시 수준이었죠.

근데 뭐 영화가 원작과 똑같아야하는 법은 없으니까요. 제임스 본드도 플레밍의 본드와 스크린 본드는 다른 인물이고...
그보다는 사람들에게 코난=아놀드라는 이미지가 꽉 박혀버린 것이 코난 이야기가 스크린에서 확장되지 못한 가장 큰 문제였을겁니다.
84년에 나온 속편이 팬들뿐 아니라 아놀드까지 실망시켰기 때문에 이후 아놀드가 코난역할을 거절하게 되면서 다른 배우로는 대체가 불가능해 수십년간 시리즈가 헛돌았죠. 007은 코너리에서 무어로의 성공적인 교체가 가능했기 때문에 지금까지 이어올 수 있었던 거지만...


    • 예전에 (아마도 그 때도 돌도끼님 글 때문에?) 한 번 코난 저작권의 연대기를 정리한 글을 찾아 읽어본 적 있는데 정말 무슨 대하 드라마 수준인 것이, 그냥 이걸로 영화를 만들어도 되겠단 생각이 들었습니다. ㅋㅋㅋ




      사실 그 원작과 팬들의 이야기는 이제 세월이 흘러 정말 팬들 사이에서의 문제가 되었고 일반인들 인식 속에서 코난은 그냥 아놀드 그 자체가 되었죠. 그나마도 이제 흘러가 희미해지는 중이구요. 이야기 성격을 봐도 요즘 세상에 크게 흥행할 것 같진 않고 OTT 드라마 시리즈라면 혹시 모르겠다... 싶은 정도네요.




      그리고 이 댓글을 적으면서 '라스탄 사가'가 다시 하고 싶어졌습니다. ㅋㅋㅋㅋㅋ 게임이라면 지금도 잘 먹힐 수 있을 것 같은데요. 흠...

      • 코난이 늙은 왕으로 나오는 이야기도 있어서 아놀드가 계속 나온다는 말은 꾸준히 나왔는데 이제는 그것도 시들해진 것 같고


        레드 소냐는 아직도 어디선가 진행중이라는 소식을 들은것도 같고  아닌 것도 같고 뭐 그렇네요


        영화 안나오는 동안에도 이런저런 게임은 많이 나오고 히트한 것도 있는 것 같더군요. 라스탄 사가는 너무 어려워서 저는 한화면도 못넘어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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