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 표범과 영화 레오파드
토마님의 추천으로 소설 <표범>을 읽었습니다. 영화 <레오파드>를 무척 좋아하지만 원작 소설을 굳이 찾을 생각을 안 한 것이, 저는 원작에 대해서 제멋대로 오해를 했던 것 같습니다. 시칠리아 격동기에 신규 세력이 부상하는 가운데 구세대의 대표자인 공작이 주인공인 영화와 달리, 원작 소설은 격동기를 담은 대하드라마라서 신규 세력의 대표자인 탄크레디가 주인공이고 공작은 주변 인물일 거라고요. 제 오해도 어느 정도는 말이 되는게, 영화와 소설에서 주인공인 공작은 관찰자라서 무슨 일을 벌이는게 별로 없습니다. 그리고 영화는 소설에 없는 전투 장면 같은 스펙타클이 추가 되어서 제가 원작에 대해서 오해하게 만들기도 했고요.
그래서 읽은 소설은 거의 완전히 공작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생각으로 이루어졌고요, (주임신부가 고향을 찾아가는 에피소드나, 공작의 사후 벌어지는 일들은 예외) 시칠리아 역사의 특수성을 빌어서 구세대의 몰락을 정교하게 이야기합니다. 하지만 이태리 근대사도 잘 모르는데, 시칠리아라는 특정 지역 이야기다 보니, 지역의 특수성이 너무 특수해서 따라가기 무척 어렵습니다. 게다가 중간에 나오는 이태리 내 다른 지역에 대한 언급들도 역시 이해하기 힘들어요. 한국 소설에서 그 사람이 전라도 사투리를 쓴다거나 제주도 출신 티를 낸다고 하면 그 의미를 어느 정도 이해하겠지만, 밀라노 말투나 피렌체 지역 티라고 하면 그게 무슨 의미인지 제가 어떻게 알겠습니다.
이런 특수성이 그리 두드러지지 않는 영화가 어떤 의미에서는 더 이해하기 편하고요. 완벽하게 캐스팅된 주인공들 덕분에 그 사람들이 누구인지 금새 알게 됩니다. 사라져가는 구시대의 주역으로 야생 표범같은 카리스마와 자부심을 가졌지만, 미래가 없음을 알고 죽음을 고대하는 주인공 파브리지오로 버트 랭카스터는 기가 막힌 선택이었고요. 시류를 잘 타서 미래의 주인공이 될 탄크레디 역으로 아랑 드롱도 특유의 비열한 매력을 뽐냅니다.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의 안젤리카도 재색을 겸비한 미녀이지만 약간의 광기와 백치미를 엿볼 수 있는 부분까지 잘 소화했다고 봅니다.
원작 소설의 저자와 마찬가지로 귀족 출신으로 유명한 비스콘티 감독은 영화에서 이 사라져가는 세계를 기가 막히게 재현해냈습니다. 특히 영화 부반부 유명한 무도회 장면에서 엑스트라를 포함한 배우들의 의상, 세트의 배경, 카메라 워크가 삼박자를 이루어서 두번 다시는 못 볼 아름다움을 보여줍니다.
쓸데없는 디테일1: 저는 이 영화를 처음 볼 때부터 도나푸가타 방문에 활용되는 베르디 곡을 좋아했는데요. 이게 영화를 위해 선곡된 것이 아니라 원작 소설에 나오는 디테일이라는걸 알고 놀랐습니다. <라 트라비아타>에 나오는 곡들인데 오페라가 1853년 초연이고 이야기는 1860년을 배경으로 펼쳐지니 당시로서는 비교적 신곡이었더라고요.
쓸데없는 디테일2: 영화 <빅 나이트>(1997)에 나오는 팀파노라는 이태리 요리 기억하시나요? 영화는 잊어도 음식은 기억에 남는 중요한 소재였는데, 표범 소설/레오파드 영화에 이 요리를 먹는 장면이 나옵니다. <빅 나이트>에서 이게 엄청 중요한 요리라고 할 때는 생전 처음 보는 거라 그냥 그러려니 했는데, 소설의 묘사를 보니 정말 이태리에서는 귀하고 맛난 요리인가 봐요. 만드는 과정이나 시간을 봤을 때 이태리에 가도 맛보기 어려울 요리인데 이게 궁금해지면 저는 어쩌라고;;;;
쓸데없는 디테일3: 무도회장 화장방에 있는 요강 이야기는 책을 읽고서야 이해했습니다. 영화에 나오는 서양 요강들 일부는 한국 요강과 다르게 키가 높은 디자인이라서 저는 안쓰는 꽃병을 모아놓은 데인줄 알았어요. 제가 아는 요강은 납작하고 원형인데, 이 서양 요강 중 일부는 스툴 높이에 사각형이더라고요.(혹시 남성용 소변기?) 1860년대 이태리 요강이 이렇게 생겼는지 누가 알겠습니까;;;;;
크라이테리온 dvd 영화 평론가 코멘터리에 따르면 이태리 영화사가 판권을 가지고 MGM과 공동 제작 예정이었는데, 영화사에서 미국 배우를 원해서 랭카스터를 선정한 걸로 알아요. 비스콘티는 마론 브란도나 로렌스 올리비에를 주연으로 하고 싶어했다고 하고요. 제작사가 맘대로 정한 주연을 비스콘티가 처음에 못마땅해 하다가 나중에 친해졌다고 하지요. 그에 비해 비스콘티 이전작에 출연했던 아랑 드롱은 3인 주연 중에서 유일하게 개인 분장실을 가지고 스타취급을 받았고, 진짜 주연인 버트 랭카스터는 촬영 중간에는 땡볕에서 대기했다고 하네요. 자막도 없는 영문 코멘터리라 뭔가 많이 놓치고 있지만 원작 소설을 부분 부분 인용해 가면서 차분하게 말하는 건 좋네요.
Senso의 남주인공으로 말론 브랜도가 고려되었죠. 그 때가 욕망이란 이름의 전차가 개봉된 지 얼마 안 되고 스탠리 코왈스키와도 좀 통하는 게 있죠
들롱은 태양은 가득히 이전에 비스콘티를 만났고 스타가 된 후 그의 영화에 출연
이런거라면 요강인 걸 눈치챘겠죠.;;;; 요강 40개가 두단 짜리 탁자에 놓여 있는데, 더 잘 보이는 윗쪽 단에는 입구가 사각인 목이 긴 병들이 있었다니까요. 제가 꽃병 창고라고 오해할 만 했어요. 근데 왜 주인공이 저렇게 기가 막히다는 듯이 꽃병을 쳐다보나 궁금하긴 했었죠;;;;
소설도 재미있게 보셨는지요.ㅎ 아무래도 소설은 내면 서술이 많이 차지하므로 사변적인 편이죠. 그래서인지 구세대가 저문다는 것, 이들이 새로운 세대와 손잡은 신흥 세력으로 교체된다는 것이 영화에서 좀더 두드러졌다면 소설은 인간의 죽음 자체를 더 생각하게 되더라고요. 저는 그렇게 느꼈습니다.
역사적인 부분은 공작의 말로 주로 표현되었죠? 이로 짐작해 보면 시칠리아가 여러 나라의 지배를 당한 역사로인해 이탈리아 본토에도 별 소속감이 없는 지역이었구나 생각했죠. 피해의식도 있고요. 지배 세력이 달라지는 것 뿐이라 생각하여 이탈리아 통일 운동에 대해서도 시큰둥한 모양이다 정도만 이해하고 넘어갔어요. 공작은 가리발디에게 은근히 경쟁의식을 갖는 듯한 표현도 나오더군요. 소설에 나오는 역사 부분은 거의 대부분은 찾아 보거나 하지 않고 대략 그런가보다 넘어갑니다. 특별한 경우 외에는요. 안 그래도 느린 편인 독서 속도가 더 느려질까봐 턱을 없애는 의미에서요.
다른 배우들도 적절했지만 버트 랭카스터는 정말 적역이고 좋았어요. 주워 읽었지만 비스콘티 감독의 소품에서부터 완벽주의는 유명하더군요.
비스콘티의 이 영화를 좋아하시면 혹시 '루드비히' 안 보셨으면 추천드립니다. '레오파드' 와 비슷한 분위기이며 아름다운데 더 독특한 영화였습니다. '레오파드'와 달리 이 영화는 매우 춥게 느껴지고 눈 내린 풍경이 특히 아름다워요. 독일 쪽 배경이라요. 어쩌다가 기회가 되어 극장에서 보게 되었는데 소중한 영화 경험으로 남아 있습니다. 길이가 좀 길기도 해서 '레오파드'보다 안 트는 거 같습니다만(탑스타 배우도 안 나오니깐) 혹 안 보셨다면 ally 님께서도 확실히 좋아하실 거 같아 추천드려요.
비스콘티 영화를 좋아하고 독일 삼부작 중에서 <베니스에서 죽음>과 <저주받은 자들>은 크라이테리온 블루레이로 소장까지 하고 있는데 <루드비히>는 볼 기회가 없었습니다. 아마 크라이테리온에서 이것도 출시하지 않을까 기다리고만 있습니다^^
책이나 영화나 버트 랭카스터가 연기하는 살리나 공작은 관찰자이기는 한데, 인물들의 행동을 보여주는 영화에 비해 주인공의 생각이 중심인 책이 더 심도있게 주제를 논하고 있습니다. 영화를 먼저 보고 책을 읽으시는 것을 추천합니다.
'빅나이트'의 팀파노 기억 납니다. 근데 영화를 보면서 '대체 얼마나 대단한 요리길래!!!' 라고 기대를 해서 그런가. 막판에 보여지는 그 실체를 보고는 살짝 실망했던 기억이 있어요. 왜냐면 저는 당연히 맛은 보지 못하고 생김새만 보았으니, 뭔가 그냥 오만가지를 때려 박아서 '니가 뭘 맘에 들어할지 몰라서 뭐든 다 준비해 본 잔치용 요리' 이런 느낌이었거든요. ㅋㅋㅋ 결국 그 영화에서 가장 맛있어 보였던 건 마지막 날 아침에 형제가 해먹던 오믈렛이었던 것 같지만, 그래도 그 팀파노라는 음식은 한 번 접해 보고 싶습니다. 하지만 아무 이탈리아 식당에서나 파는 음식도 아니고 하니...;
그쵸, '빅 나이트'에서는 삶은 계란, 햄, 닭고기를 넣고 마카로니로 틀을 채우는 제작 과정을 주로 본 터이라 이게 뭐가 맛있을까 의문스러웠거든요. 근데 책에 등장할 때는 음식에서 우러나는 설탕과 계피향이나 파이 껍질의 바삭한 질감, 진귀한 요리에 대한 사람들의 기대감과 식욕을 아주 실감나게 묘사해서 입맛을 돋군단 말이에요. 영화에서는 안젤리카의 미모에 정신이 팔린 탄크레디를 노려보는 콘체타의 비참한 심경을 잡아내느라 음식이 중요하게 비춰지진 않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