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의 광화문, 일요일의 남태령



900_1735344411641.jpg


화를 내고 잊을만하면 황당한 입장문으로 윤씨가 제 화를 돋구었습니다. 저에게는 그것이 마치 도발을 가장한 약속처럼도 들렸습니다. 내가 이런 말까지 하는데 광장에 안나올 수가 있겠냐 하는 식의 약속. 그렇다면 지켜줘야죠. 시청 근처에서 점심을 먹고 광화문으로 향했습니다. 시청역쪽에서는 탄핵반대집회가 열리고 있었고 거기에는 또 그로울링이 잔뜩 들어간 락커처럼 구호를 외치는 개신교 진행자가 있었습니다. 저희가 마침 지나가는 때에 이들은 국기에 대한 경례를 했습니다. 그 준엄하고 뻣뻣한 모습에 기가 찼습니다. 당신들의 국가는 대체 무엇인가... 어떤 권력자의 지위와 태극기라는 상징으로 홀로 감상주의에 빠지는 그 모습이 정말 기괴했씁니다. 참 황당하게도 어떤 스님이 올라와서 전광훈 목사님이 어쩌고, 부활이 어쩌고, 전두환 대통령님이 어쩌고 하면서 핵심 구호를 외쳐댔습니다. 문재인 개작두! 이재명 개작두! 조국 개작두! 종북좌파 놈들을 쓸어버려야한다는 그 말에 저는 속으로 묻고 있었습니다. 북한과 전쟁을 일으키려고 했던 게 본인들이 그렇게 외쳐대던 윤석열인건 알고 있는지.


900_20241221_174748.jpg


12월 21일 토요일 광화문은 생각보다는 추웠습니다. 그 차가운 아스팔트 바닥에 계속 앉아있는 시민들을 보니 괜히 제가 짠한 기분이 들더라고요. 저도 선 채로 집회에 참여했다가 발이 시려워서 종종 발도 꼼지락거리고 그랬습니다. 저는 항상 집회보다는 행진을 선호하는데, 그래도 그게 뭔가 더 '한다는' 기분이 들기 때문입니다. 이동을 한다는 것 자체가 모두 함께 이 너머의 시대로 움직인다는 기분도 들게 합니다. 모두가 응원봉을 흔들면서 행진을 하는 그 빛의 물결 속에 있는 것도 중간중간 미학적 감상에 빠지게도 합니다. 이 날도 열심히 로제의 아파트와 에스파의 위플래시를 불렀고 다들 '빠이팅' 넘치는 모습으로 행진을 했습니다. 중간에 전장연 분들이 보여서 전장연 파이팅 외치고 종각역 쪽에서 저는 빠져나왔습니다. 슬슬 몸에 한기도 돌더라고요. 러브홀릭스의 버터플라이가 나오는데, 다들 추위를 잊고 씩씩하게 행진하는 모습에 괜히 눈이 시큰거렸습니다. '이 세상이 거칠게 널 막아서도 빛나는 사람아 난 너를 사랑해' 이 가사가 그대로 구현된것처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 날 집에 돌아와서 쉬고 있는데 전봉준 투쟁단이 서울 집입하는데 길이 막혀있는 남태령으로 시민들이 밤에 또 결집했다는 소리를 들었습니다.


저는 이 현상이 굉장히 의외였습니다. '농민'이란 정체성을 가진 시민들에게 다른 시민들이 이렇게 적극적으로 연대할 거라고는 상상하지 못했기 때문입니다. 박근혜 퇴진 집회 때도 농민 분들은 경찰의 폭력적 진압에 피를 흘려야 했죠. 유감스럽게도 '시민'이라는 단어는 '농민'이라는 단어와 구별되어버리고 마는 것처럼 느껴질 때가 있고 실제로도 그런 거리감이 사회에 좀 조성되어있는 것 같습니다. 그러니까 '농민'이라는 분들은 왜 굳이 트랙터를 타고 힘들게 멀리서부터 와야되는가, 서울이란 도시를 진입하는 그 투쟁을 왜 해야하는가, 이런 질문을 떠올리게 되는데 그 부분에서 저도 모르게 농민이란 시민분들을 일종의 외부인으로 보고 있었던 것 같습니다. 그래서 아, 이 분들은 이렇게 막히는구나... 이분들의 투쟁은 여기까지겠구나 하고 좀 서둘러서 안타까워해버리기도 했고요. 


이 사람들의 패배와 무력감을 저 혼자 너무 익숙하게 받아들일 때 어떤 사람들은 바로 남태령 현장에 그냥 몰려가더라고요. 그걸 보면서 제가 제 안의 벽이 무너지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그 누구라도, 우리가 같은 시민이자 동지로 인식을 한다면 한밤중에 바루 뛰쳐나가는 사람들이 있구나... 농민이라는 거리감을 단번에 좁혀버리고 이 사람들을 이 길바닥에 외롭게 놔둘 수 없다고 바로 움직이는 그런 사람들이 있구나. 이건 계엄 당시 국회로 뛰어나가거나 광화문의 집회에 참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었습니다. 그것은 제가 볼 때 시민의 범위를 단번에 확장하고 우리 모두의 실천의 가능성을 바로 끌어올린 그런 사건처럼 보였기 때문입니다.


제가 종종 집회에 나가는 건 준비된 광장에 나가는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동류의 시민으로 인식하는 여러 사람들을 이미 만날 마음의 준비를 하고 나가는 것입니다. 물론 다양한 사람들의 고충을 듣고 함께 고민하기 위한 것이지만 그 모든 참여 과정은 굉장히 손쉽고 남이 깔아주는 판에 그냥 입장만 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남태령 집회는 저에게 엄청난 충격을 줬습니다. 이 곳에 마련된 집회가 없었거든요. 그리고 그곳에서 핍박받는 사람들은 서울 시민이 그렇게까지 큰 동질감을 느끼는 사람들도 아닙니다. 그런데 사람들이 그냥 뛰쳐나간거죠. 저는 광장에 들어갔다 나오던 사람으로서, 광장을 세우는 사람들을 처음으로 봤습니다. 이 날 남태령은 저에게, 허허벌판에 광장을 구축하는 그런 사건이었습니다.


광장이란 무엇인가. 제가 새로 던질 수 밖에 없는 질문이었습니다. 그것은 여러 사람이 모일 수 있는 공간인가. 혹은 여러 의견이 오고 갈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인가. 어떤 형식이나 공간적 조건이 생략되어있더라도, 사람들이 모여서 무언가를 논의하고 주장할 수 있다면 그 곳이 그 자체로 광장이 되는 것이 아닌가... 저는 남태령이란 곳을 이 날 처음 알았습니다. 그리고 남태령을 '광장'에 대한 충격적 현상으로 기억합니다. 광장이 세워지고 지켜지던 곳에서, 그 곳에 모인 사람들이 바로 '시민'이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시민은 그냥 citizen으로서 도시에 거주하는 사람이 아니라, 광장을 필요로 하고 기꺼이 광장을 구성하는 그런 사람들이 아닌가 하는...


농민분들은 그곳에 모여 밤을 지키는 시민들에게 차마 떠나라고도 하지 못하고, 같이 지키자고도 말을 못꺼냈다고 하더군요. 그리고 그곳에 모인 시민들은 이 곳에 저 분들을 혼자 놔둬서야 되겠냐며 자발적으로 날을 새며 남태령을 지키자고 했다고 합니다. 저는 발만 구르다가 다음날 트위터를 켜서 그 곳에 모여 날을 샌 그 몇백명의 시민들의 소식을 보았습니다. 그 추운 날에, 몸을 데우고 추위로부터 피할 곳도 없는 그 쌩도로에, 그렇게 날을 새면서 자리를 지켰다는 이야기를 듣고 정말 광기라는 생각마저 들었습니다. 이렇게까지 하는 사람들이 있구나. 이 정도의 각오를 밀어붙이는 사람들도 있구나... 아침에 첫차가 움직이자마자 그 시민들과 합류하기 위해서, 또 교대하기 위해서 분주하게 움직이는 다른 사람들이 있더라고요. 충격의 연속이었습니다.



900_20241222_165005.jpg


저는 미적미적거리다가 그 날 오후 세시쯤에 남태령 집회에 갔습니다. 알지도 못하던 역인데 사람들이 한꺼번에 내려서 지하철 역을 채우고 출구로 나가는 모습에 좀 이상한 기분을 느꼈습니다. 아무리 '누칼협'과 적자생존의 차가운 세상이어도 이렇게 가만히 있을 수 없다고 움직이는 사람들이 너무나 많구나. 거기에 핫팩과 생수와 여러 먹거리와 물품을 보내주는 사람들도 정말 많았습니다. 저도 핫팩과 생수 한병을 받았습니다. 사방에서 김밥과 커피를 나눠주고 있었는데 정말 오병이어의 기적이란 게 이런 거구나 혼자 상상도 했습니다. '차빼라'는 구호를 연신 외쳤고 여러 사람들의 다양한 이야기도 들었습니다. 그러다가 마침내 경찰측이 버스차벽을 치웠고 트랙터가 움직였습니다. 광장이 없는 곳에 광장을 세우고, 길이 없는 것처럼 느껴지는 곳에 길을 뚫어내는 이 현장을 체험하면서 큰 충격을 받았습니다. 이것이야말로 루쉰이 말하던 길과 희망의 개념 그 자체가 아닐지...



900_20241222_182756.jpg


한꺼번에 지하철로 이동해서 한강진 역앞에서 마무리 집회를 했습니다. 여러 사람들과 함께 환호하면서 시민들이 모여 이렇게까지 할 수 있다는, 성취감을 느꼈습니다. 트랙터가 들어오는데 정말 기뻤고 수많은 여성시민들의 목소리 속에서 노래도 함께 불렀습니다. 집회에 여러번 참여하고 좌절과 실망을 겪어왔던 만큼, 이 날 남태령 집회는 저에게 아주 큰 교훈을 남긴 것 같습니다. 어떤 사람들은 반드시 움직인다, 그들은 더 빠르게 참지 않고 더 빠르게 치고 나간다, 감상주의에 빠져있기 전에 뭘 할 수 있을지를 생각하고 움직여라, 그러면 시민의 광장이 세워진다... 이런 마음으로 다들 모일 수만 있다면 더 많은 민주주의의 상처들을 낫게 할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저는 이 글만 후딱 쓰고 다시 집회 나갑니다. 오늘 집회 참여하시는 분들 모두 건강하게, 안전 조심하시길!! 

    • 감사합니다. 감기 조심하시고요.

      • 어제 좀 추웠는지 콧물을 많이 흘렸네요 thoma님께서도 감기 조심하세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13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9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5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9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4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6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6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53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9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3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7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41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72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8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90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