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아 스바르보바 사진전 다녀왔습니다
스위밍 풀 시리즈로 유명한 사진작가죠. 전시회를 우연히 알게 되어 다녀왔습니다. 날이 춥고 전날 잠을 잘 못자 컨디션이 그리 좋지는 않았으나 곱씹어볼 것들이 많은 전시회였습니다. 저에게 사진은 실세계를 변용하는 느낌보다 인용한다는 느낌이 더 들어서 그림 전시회만큼 큰 관심이 끌리지는 않는데, 그런 저에게도 인식의 지평을 넓혀주는 좋은 전시회였습니다.
제가 첨부한 사진들에는 저의 미숙한 촬영과 원본을 그대로 옮길 수 없는 현실적 한계가 고스란히 있습니다. 만약 전시회를 보러 가실 거라면 제 사진보다는 몇배나 더 강렬하고 인상적인 작품들이 있을 거라고 생각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전시회는 시간 순으로 마리아 스바르보바의 작품들을 진열해놓았습니다. 그래서 이 작가의 작품이 어떤 식으로 출발해서 어떻게 변해갔는지를 찬찬히 살펴볼 수 있었습니다. 가장 유명한 수영장에서의 사진들도 그렇지만, 초기작들은 훨씬 더 초현실적인 느낌이 있었다는 게 흥미로웠습니다. 인물들의 피부는 무기질로 반들반들하게 표현되어있고 주황색 조명으로 인물들 위에 내리쬔 빛 때문에 인공적인 공간의 느낌이 훅 들어옵니다. 인간을 포함한 어떤 광경 자체가 전시용으로 구축된 느낌이 강하게 드는데, 그 때문에 이 작품들이 작가의 어릴 적 체코의 경험을 토대로 만들어진 것이라 해도 비현실적인 이질감이 지배적입니다.


특히 위의 작품은 제가 올려놓은 이미지에서는 제대로 전달되지 않지만, 사진이 아니라 그림같다는 인상이 굉장히 강합니다. 이상할 정도로 붓을 이용해 채색한 느낌이 강한데, 아마 현실에서는 보다 또렷한 색들의 경계가 이 사진에서는 의도적으로 뭉개졌기 때문에 생기는 효과가 아닐까 합니다. 사진으로 이 정도의 비현실적 감상을 전달할 수 있다는 것에 놀랐습니다. 사진촬영은 현실의 재료를 사용해서 얼마든지 비현실의 공간을 구현해낼 수 있다는 것을 말이 아닌 감각으로 배웠습니다.

위 작품도 원래는 주황색이 훨씬 더 진하게 깔려있는데 그게 제 사진에서는 잘 드러나지 않더군요.

이 정육점 시리즈는 병원을 소재로 한 사진보다 주황색이 훨씬 더 진하게 깔려있는 작품입니다. 사람의 얼굴이 붉은 오렌지 껍질처럼 보일 정도로 빛을 강하게 강조하고 있습니다. 무채색의 하얀 타일과 건조한 쇳덩어리들을 배경으로 아무렇지 않게 고기들이 걸려있는 데, 이 고기들은 차가우면서도 전혀 식재료처럼 보이지 않습니다. 씹으면 고무처럼 퍽퍽하기만 할 것 같다는 상상을 자극합니다. 한편으로는 고기와 인간의 색채가 명확하게 구분되지 않는다는 점에서 인간도 그냥 고기처럼 살아가는 세계를 추정하게 합니다.

이 사진은 인물들의 몸이 주황색으로 정말 강하게 도드라져있는 작품입니다. 군인이 서있는 공간에서 부부로 보이는 정육점 주인 부부의 육체는 고기와 분간이 안갈 정도로 주황빛입니다. 저울을 중심으로 안쪽과 바깥쪽의 경계가 있고 안쪽에는 고기와 정육점 주인 부부가, 바깥쪽에는 공권력 행사자가 있습니다. 그 이상한 긴장 속에서 다다음 사진들은 자연스럽게 하나의 스토리를 이어갑니다.

그 다음 컨셉의 사진들에서는 주황빛이 사라집니다. 그리고 회백색의 배경과 모노톤의 의상만이 남아있습니다. 어떤 면에서는 사이파이의 세계관처럼도 보이는데 이 사진들에서는 인물들의 행동이 모두 다 동일하게 병렬되어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그래서 완벽에 가까운 통제와 그를 따르는 젊은 남자들로 규칙적이고 몰개성한 세계를 그려보게 합니다.

그에 비해 소녀들을 찍은 사진들은 훨씬 더 색감이 쨍합니다. 다른 사진들에서도 은근히 드러나는 컨셉이 이 시리즈부터 보다 확연하게 두드러지는데, 그것은 바로 체코의 국기 색인 빨강, 파랑, 흰색이 사진 속에서 조화를 이룬다는 것입니다. 이 사진들을 보면서 저는 레드벨벳의 러시안 룰렛 앨범 이미지를 먼저 떠올렸는데, 그것은 소녀들의 통제된 표정과 자세가 만들어내는 아름다움 때문이었습니다. 아마 대한민국에서 '소녀'의 이미지가 가장 상업적으로, 혹은 상업적 미의 진열장에서 제일 치열하게 다뤄지는 현장이 케이팝 업계이기 때문일 것입니다. 해당 사진들은 소녀란 존재를 이쁘고 귀엽게만 표현한 것은 아니지만 보다 억압되더있던 성인들의 사진보다는 훨씬 편하긴 했습니다. 다만 탁 트인 하늘을 배경으로 하고 있으면서도 아이들은 회색의 벽이라는 프레임 안에 갇혀있거나 그 위에서 위태로워보입니다.




이 작품은 다른 시리즈인데요. 체육복을 입고 완전한 대칭구도로 마주하고 있는 것이 독특했습니다. 뭔가 뛰거나 움직일 것 같은 체육복 안의 활기가 사진 전체의 구도에서 서로 부딪히면서 고정된 평형상태를 만들어내는 것 같달까요. 이 사진은 스위밍 풀 시리즈의 예고처럼 느껴지기도 했습니다.

이 다음 섹션에서는 한 쌍의 여자와 남자를 모델로 훨씬 탁 트인 배경에서 연작이 이어졌습니다. 이제 인위적으로 서있거나 비현실적인 느낌을 주는 포즈들은 줄어들었고 더 광활한 공간에서 서로 응시하거나 함께 있는 구도가 많았습니다. 작품들의 이름은 그리스로마신화를 레퍼런스로 하고 있었습니다. 이번 사진전에서 흥미로운 건 어떤 구성이나 의상, 구도 같은 것들이 직관적으로 테크니컬하게 다뤄지는 과거에 비해 점점 더 자연스럽고 작가의 통제가 연해져간다는 느낌이었습니다.

이 컨셉에서 특이한 건, 계속해서 망원경이 활용된다는 것입니다. 해당 작품의 제목은 메두사입니다. 메두사는 눈을 마주치면 돌이 된다는 괴물인데, 이 사진 속 여자모델의 머리카락이 뱀처럼 뻗어있기만 하다고 메두사란 제목이지는 않을 것입니다. 메두사의 저주가 담긴 그 시선이, 망원경을 통해 그 시선의 목표점을 저처럼 노린다면 그 저주는 과연 피할 수 있는 것일까요. 망원경 렌즈 안에는 또 다른 피사체가 분명히 담겨있지만 한편으로는 프레임 바깥의 감상자들을 향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해서 흥미로웠습니다. '돌이 된다'는 것이, 작품 앞에서 감상자각 멈춰서서 계속 고민하게 한다는 예술적 감흥의 한 단계일 수도 있지 않은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우리는 예술적 충격을 받을 때 '몸이 굳었다'는 표현을 쓰기도 하지 않습니까? 그런 예술적 경직을 이 작품이 의도하는 것일지도 모르죠.

이제 주황색 빛은 완전히 사라졌습니다. 체코의 국기 색이라면 이 시리즈에서 보이는 건 오로지 파랑색과 흰색 뿐이고, 그 흰색도 이제 어슴푸레 보일 뿐입니다. 붉은 색도, 흰 색도 사라진 푸른 세계에서 다른 성별의 두 청년만이 어떤 구도들을 취하고 있습니다. 세계는 활짝 열려있고 이들은 어느 프레임 안에서 안전하게, 혹은 흙과 땅의 존재로서 머물러있습니다.

이 작품의 제목은 이카루스의 추락입니다. 사진 속에서 저 남자모델이 실제로 뛰어내리고 있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분명한 건 다른 사진들처럼 돌과 벽의 프레임 안에 있는 게 아니라 인물이 푸른 하늘의 경계선 안으로 신체 대부분이 들어가있다는 것입니다. 그가 하늘에 떠있는 존재여서 육지에는 그림자가 생겨있다면? 육지의 프레임을 벗어나 파란색 하늘의 프레임에 들어가있는 것만으로도 '추락'의 이미지를 뽑아내는 이 사진은 더욱 더 스위밍 풀 시리즈의 예고편 같기도 했습니다. 스위밍 풀 시리즈의 사진들은 물과 육지, 비춰보이는 것과 실제로 있는 것의 경계를 주된 테마로 삼고 있으니까요.

지옥으로 가는 계단의 에우리디케라는 제목 또한 이 사진의 프레임을 따져보게 합니다. 에우리디케는 물의 존재입니다. 그는 지금 파란색의 프레임을 벗어나 육지의 프레임으로 가고 있는데, 그의 머리는 이제 완전히 육지의 프레임에 가둬져있습니다. 하늘은 유난히 좁아보이고 그림자로 육지의 프레임은 시커매져갑니다. 빛과 어둠은 대조되면서 '저승'의 이미지가 만들어집니다.

이런 작품도 흥미롭습니다. 두 인물의 머리는 완벽하게 뒤쪽의 산의 프레임 경계 끝에 걸려있습니다. 이 사진의 제목은 헬레나와 파리스 입니다. 그 둘의 머리는 하늘의 프레임으로 침범하지 않았으나, 그 둘의 다리는 이미 파란색 타일안으로 들어가있습니다. 어떤 경계에 아슬아슬하게 걸쳐져있지만 사실 이미 어떤 경계에 "발을 담근" 모습입니다. 이것이 하반신의 죄 때문에 세계를 파멸로 이르게하는 신화적 이미지라면 어떡할 것인지. 그런 질문이 떠오릅니다.
이 다음부터는 제일 유명한 스위밍 풀 시리즈입니다.

다른 사진들이 더 앞서 걸려있었지만 제가 가장 충격받았던 사진입니다. 쇠라의 점묘법으로 그린 것처럼 사진을 찍어서 대단히 놀랐습니다. 제가 찍은 사진으로만 봐도 사진이 아니라 그림 같습니다. 수영장의 여러 이미지가 활용된 이 스위밍 풀 시리즈에서 '수영장은 작은 타일의 패턴들이 점점이 반복되는 공간'이라는 해석이 굉장히 신선했습니다. 저 인물들의 머리 뒤로 성륜을 그려놓으면 프레스코 벽화처럼 느껴질 것 같기도 하고요.

이 사진도 그런 느낌이 좀 있죠. 반복되는 타일 위에서 수영복 위로 반사되는 빛의 패턴도 점점이 군체처럼 모여있는 느낌입니다. 수영장이라고 떠올리기 어렵고 어떤 공상적 공간에서 부유하는 느낌이랄까요.

스위밍 풀의 시리즈 작품들은 기본적으로 정렬되어있고 반복되는 수영장 벽을 배경으로 합니다. 그렇지만 이 작품처럼 수영장의 물이 순식간에 그 공간의 조화를 흐트러트리는 작품들도 있습니다. 수영장은 정말 묘한 공간입니다. 질서정연하게 사각형들이 공간을 채우고 있지만 그 위로 채워진 물에 의해 반듯하고 엄격하게 세워진 사각형들의 세계는 이내 뭉그러집니다. 그러니까 이게 우리의 세계인 것처럼 보이기도 합니다. 우리가 아무리 이상적 질서를 세워놓아도 정작 그 위에서 살아가는 저희는 어그러트리면서 살아가는 것이 아닌지.




위의 사진들은 일부러 연작을 붙여놓은 것입니다. 순서대로 보면 참 묘한데, 물을 경계로 얼굴 반쪽을 담가놓으면 그 담겨진 얼굴은 물에 의해 일그러지고 원래의 형상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하지만 물에 담가놓지 않으면, 그 위의 명확한 형상과 반사되는 형상이 동시에 형태를 유지할 수는 있습니다. 여기서 작가는 시간이라는 제목으로 물 위의 얼굴과 물에 비친 나이든 얼굴을 서로 대조합니다. 이미 나이들어있는 저 모습이 미래라면, 우리의 현재는 혹시 진실이 아니라 아직 다가오지 않은 현재를 최대한 외면하는 거짓이 되는 것은 아닌지요. 이런 복잡한 생각도 해보았습니다. 비춰지는 것과 현존하는 것의 차이는 무엇인지.


다른 사진들은 이제 설명을 생략하겠습니다. 멋진 사진들과 여러 해석들을 자극하는 작품들이 많으니 직접 관람해보시길 추천드립니다. 더 깊은 이야기를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여기서 접는 게 뭔가 아쉽네요.
앗 브라이언 아담스라는 사진 작가는 다른 분이 올려주셨네요. 저는 다른 작가였습니다.
마리아 스바르보바 작가의 사진은 아예 futro retro라고 과거로부터의 미래라는 해설도 있더군요. 제가 안올린 사진 중에는 과거처럼 보이는 사진도 많았습니다.
죄송하실 필요야...!! 잘 읽어주셨으면 그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