잡담. '사람은 일이 있어야 한다'?
1.인터넷에서 의견이 갈리는 주제 중 하나가 저거겠죠. '사람은 그래도 일이 있어야 한다.'와 '돈이 최고다'라는 vs토론이요. '사람은 일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은 사실 경험에 의거한 말이기 때문에 반대론자들을 납득시키기 쉽지 않아요. 공감하지 못하는 사람이나 경험을 통해서도 공감하지 않(못)는 사람들을 설득하기 어려우니까요. 경험을 통해 공감하는 사람들은 바쁘거나 나이가 너무 많아서 저런 토론을 안하겠죠.
그리고 '돈이 최고다'라는 의견은 주로 젊은 사람들이예요. 사실 '일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에는 여러 가지로 반박이 가능하거든요. 결국 일은 돈을 벌려고 하는 게 아니냐...라던가, 당신이 평생 일만 해서 놀 줄을 모르는 거다...백수생활 아무리 해도 재밌더라 등등. 이것 또한 경험에 의거한 반박을 얼마든지 할 수 있죠.
결국 저 말은 각자의 상황에 따라 공감하고 말고의 문제일까? 그저 개개인의 문제일까? 라고 넘어가기엔 한번쯤 생각해 볼 만한 문제죠.
2.그야 나도 돈이 최고라고 생각하곤 했지만, 글쎄요. 그 명제가 충족되려면 돈이 무한히 많아야 하니까 의미 없는 소리죠. 왜냐면 어렸을 땐 그랬거든요. 그냥 매일 오마카세 가고, 호텔 피트니스에서 수영하고, 회원제 승마클럽에서 말 타고, 백화점 vip 유지하고, 밤에는 비싼 술을 마실 수 있으면 바랄 게 없었어요.
한데 저 위에 쓴 것들이 일견 비싸 보이지만, 잘 따져보면 그렇지도 않아요. 낮에 먹고 밤에 마시는 거 아무리 해봤자 1년에 2억+@. 호텔 피트니스는 회원권 사고 연회비 350. 승마클럽 회원권 사고 연회비 500. 백화점 vip 유지하는데 1년 6천만원. 회원권 사는 일회성 비용들 빼면 1년에 3억원 정도로 끊을 수 있어요. 물론 사치스럽긴 한데 이게 현실의 영역이냐 환타지의 영역이냐고 하면, 이 정도 쓰는 놈들은 현실에 많아요. 그래서 고작 저 정도의 소비를 목표로 돈을 벌 수 있었고요. 어쨌든 목표로 삼을 수는 있는 금액이니까요.
그리고 저런 식으로 살면 매우 바빠요. 왜냐면 오마카세를 가고 밤에 술마시러 가는 거를 매일매일 다른 곳에 가야 하거든요. 소비를 하는데 하는 짓도 똑같고 장소도 똑같으면 흥이 안 나니까요. 어떻게든 억지로 텐션 올리려고, 하는 짓이 똑같아도 매일 장소를 바꿔가며 해야 하기 때문에 바쁜 걸로 따지면 직장인보다 바쁘죠.
3.한데 일이란 건 반대예요. 새로울 게 없어요. 어제 한 일을 오늘도 내일도 똑같이 하는 거죠. 애초에 일이라는 건, 내가 잘하는 일이 주어지지 내가 할 수 없거나 못하는 일이 주어지지는 않는 법이거든요. 그야 내가 어렸다면 잘 못하는 일, 할 수 없는 일이 주어질 수도 있겠죠. 그리고 그 일을 하는 게 귀찮고 짜증날 수도 있어요. 그건 어린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기회이자 특권이죠.
하지만 이제는 나이가 너무 먹었어요. 이제 내게 주어지는 일들은 내가 잘할 수 있는 일뿐이지 내가 못하는 일은 아예 언급조차 안 되니까요. 내가 잘 하지도 못하는 일이 내게 주어지는 특권은 바랄 수 없게 됐어요.
4.휴.
5.그래서 나이를 먹고서야 '사람은 일이 있어야 한다'라는 말에 공감되는 건 그런 뜻이 아닌가 싶어요. 내가 잘하는 일이 어쨌든 있긴 있고, 그것을 다른 누군가가 필요로 한다는 것...오늘도 다음 달도 내년에도 계속 날 찾아준다는 것에 의미가 있는 거니까요. 그리고 남들이 일을 맡겨주던 날들이 끝나는 순간, 엄청난 상실감을 느끼는 거고요.
사실 이 모든 건 권력과 에고에 관한 거겠죠. 어렸을 땐 돈이 권력인 줄 알았지만 나이가 드니 책임의 크기가 곧 권력인 거예요. 누군가가 내게 일을 맡긴다는 건 그만큼의 책임을 부과해도 좋다는 거...그만큼의 신뢰를 줘도 좋다는 증표니까요.
결국 사람은 자신이 잘하는 일에서 권력과 에고를 느끼며 살거든요. 그런데 소비로서 그에 걸맞는 에고를 느끼려면 클럽 가서 샴페인 한번 먹어도 몇천만원어치 샴페인은 까야 해요.
6.지난번 자칼 감상에서 썼듯 사람은 그렇거든요. '내가 누군지 보여주겠다!'라고 생각하며 평생 살아요. 그런데 소비로 그걸 보여주려면 힘들어요. 나이가 어렸을 때는 200만원 샴페인만 까도 뭔가 거물이 된 것 같고 뿌듯하죠. 한데 40살 먹고 클럽가서 200만원 샴페인 깐다? 그건 그냥 조용히 마시러 왔다는 뜻이거든요. 클럽에 가서 샴페인 까는 건 그날 왕이 되려고 가는 건데, 그럴 바엔 차라리 클럽에 안가고 말죠.
내가 전에 썼듯이 사람이 나이를 먹으면 아무것도 안 해도 자의식은 점점 커진단 말이예요. 그래서 그걸 소비로 보여주려면 돈이 끝없이 든단 말이죠.
7.그렇기 때문에 사람은 소비가 아닌, 자기가 잘하는 '일'로 에고를 표현할 수밖에 없어요. 어디 가서 몇천만원 샴페인 까는 거랑, 건당 50만원짜리 일러스트 알바하는 거. 어느쪽이 더 에고가 충족될까?
자기 돈으로 새벽집 가서 여자들에게 소고기 200만원어치 사는 거랑, 작품 한 편 끝내고 수고했다고 5만원어치 삼겹살을 회사에서 사주는 거...어느 쪽이 더 보람이 느껴질까? 라고 묻는다면 당연히 후자죠. 결국 일을하는 사람이 갑이 되는 거니까요.
내가 돈을 펑펑 써보진 않았지만, 그래도 경험해보니 돈을 쓰러 어딘가 찾아간다는 건 결국 을이거든요. 그것도 8천5백원짜리 제육덮밥이 아니라 몇백만원짜리 옷이나 술을 사러 간다? 그건 진짜 을이 되는 거예요.
8.전에 썼듯이 당분간은 또 백수가 될 것 같아요. 그리고 백수가 되어도 여전히 '내가 누군지 보여주겠다'라면서 사는 건 똑같을 거고요. 하지만 그걸 돈으로 보여주려고 하면 돈이 너무 많이 들거든요. 내가 누군지 보여주고 싶은 만큼 돈을 썼다간, 거덜나는 건 순식간이니까요.
사실 내가 바뀐 건 없어요. 나이만 많이 먹었을 뿐이죠. 하지만 그게 문제인 게, '내가 누군지 보여주고 싶다'라는 명제를 충족시키려면 돈이 너무 많이 드는 나이가 됐단 말이죠. 그래서 돈 쓰는 걸로는 뭔가 보여줄 수 있는 처지가 아니예요.
결국 다음 일감을 노리면서 계속 일을 하는 것만이, '내가 누군지 보여주겠다'에 부합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어버렸단 말이죠. 그래서 사람은 일을 하는 수밖에 없는 거예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