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미가 잡담

잭 트러멜은 아우슈비츠 생존자입니다. 전쟁후 미국으로 가서 이런저런 일을 하며 돈을 모아 코모도어를 설립합니다.

8비트 시절 미국에서 1등 먹었던 컴퓨터는 코모도어64였습니다. 잭 트러멜의 수완이 만들어낸 물건이었죠. 회사를 만들어 키워내고 C64의 엄청난 성공까지 이끌어냈던 트러멜은 코모도어에서 쫓겨납니다. 족벌운영을 하려했던 트러멜과 이사회간의 갈등이 생기는 바람에. 트러멜이 가만히 당하고있을 사람은 아니라 나가면서 핵심 인력들도 다 데리고 가버렸습니다. 그리고는 당시 모종의 사건으로 망해가던 아타리를 인수합니다. 아타리는 게임기 회사였지만 트러멜은 컴퓨터 회사로 개조해서 거기서 신형 16비트 컴퓨터 아타리ST를 만들어냅니다. C64같은 대박은 아니었지만 그래도 한동안 일가를 이루었죠.

한편, 트러멜 나가고 개발능력이 저하된 된 코모도어는 아미가를 인수합니다. 아미가는 원래는 아타리에서 추진중이던 차세대 게임기 프로젝트였습니다. 아타리가 상태가 안좋아지면서 나가리될 뻔 하자 게임기에서 범용 컴퓨터로 방향을 틀었고, 코모도어에서 지원해준 덕에 완성시킬 수 있었습니다.

그니까 코모도어가 갈라지면서 둘 다 아타리의 기술을 접수해서 각각 신품을 내놓은 거죠. 그래서 아미가와 아타리 ST는 뭔가 라이벌같으면서도 친척같은 묘한 관계였습니다.

1985년에 선보인 아미가 1000은 당시로서는 정말 획기적인 컴퓨터였습니다. 기본 성능은 그시기에 나온 다른 16비트 컴퓨터들과 비슷했지만 그래픽과 사운드 처리능력이 남달랐죠. 처음부터 게임기로 만들려던 거였으니까요. 거의 10년 후에나 나오게되는 아이볨 멀티미디어 피씨의 개념을 미리 선보인 기종이었다고 할 수 있습니다. 당시로서는 멀티태스팅 기술에서도 가장 앞서있었다는 것 같고요.

거기에 나중에 써드 파티들이 내놓은 추가 하드웨어를 붙이면 완전 넘사벽이 되어서, 아미가는 방송국, 영화사등에 필수장비로 보급되었고, 지금까지도 사용되고 있는 CG 기술의 기초가 아미가에서 시작된 것이 많고, 그방면 베테랑들은 아미가로 입문한 사람들이 많습니다. 아미가로 만든 CG를 사용한 티비 프로그램이나 영화도 꽤 있었고요. 싼값에 적당한 품질의 CG를 만들어내는 기계로 명성이 높았습니다.

그렇게 업무용 기계로는 자기만의 분야를 확고하게 잡는데 성공했지만... 개인용 컴퓨터 시장에서는 크게 세를 불리지는 못했습니다. 트러멜이 나간 뒤의 코모도어는 내내 무능한 모습만 보여서, 이렇게 좋은 하드웨어를 뽑아놓고도 제대로 마케팅을 하지도 못했다고 합니다.

아미가가 PC 시장에 자리잡게 된 건 87년에 약간의 마이너 다운그레이드를 하고 가격을 반으로 떨어뜨린 아미가 500이 나오면서 부터였습니다. 그니까 성능이나 마케팅이 아니라 가격이 어필한 거죠. 특히 이게 유럽에서 아주 대박납니다. 그래서 유럽의 컴퓨터 게임 시장은 아미가가 꽉 잡게 됩니다. 유럽의 소프트웨어 하우스들의 개발 1순위 기종이 된 거죠.
미국에선 유럽만큼 성공하지는 못해서, 미국 개발사들은 1순위 기종을 아이볨으로 잡고 아미가는 이식대상기종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럽산 게임은 아미가에서 아이볨으로 열화이식, 미제 게임은 아이볨에서 아미가로 업그레이드 이식이라는 형태로 게임을 만들었고, 어찌되었던 아미가 버전이 우월한 형태로 나왔습니다.(시에라처럼 아무 생각없이 아이볨 버전을 그대로 아미가에 박아버린 곳도 있지만...)

아미가의 그래픽은 수천색 중에 32색을 골라 쓸 수 있었으니까 지금보면 별 거 아닙니다. 그렇지만 나왔던 당시로서는 세계최강급이었고요. 아이볨은 그래픽이 EGA 고정 16색이라(사실은 64색 중에 16색 선택이었지만 어느 누구도 그 기능을 쓰지 않았으니...) 거기 비하면 엄청 화려한 표현이 가능했습니다. 글구 더 중요한 건 잘 움직인다는 거. EGA로는 (존 카맥이 등장하기 전까지는) 빠른 스크롤 같은 건 꿈도 못꿨죠.

아이볨은 내장 사운드 기능이 없어서 사운드 카드에 의존했는데, 대표 사운드 카드인 애드립이 음악은 몰라도 효과음 쪽으로는 망이었죠. 아미가는 PCM을 사용하고 있어서 실제에 가까운 음향효과와 샘플된 악기소리 사람목소리등을 사용할 수 있어 음악과 효과음 쪽으로는 넘사벽이었습니다.

그렇게해서 아미가는 유럽에서는 제일 잘나가는 게임기였다고 볼 수도 있는데... 90년대가 되면서 사정이 달라집니다.
아이볨이 386과 VGA와 사블을 장비하게 되거든요. 느린 그래픽 속도는 시피유빨로 밀어버리고, VGA는 32색을 한참 뛰어넘는 256색을 사용할 수 있었고, 사블은 아이볨에서도 PCM을 사용할 수 있게 했습니다(아직 아미가 사운드에는 못미쳤지만 그래도 된다는 게 어딥니까) 그랬더니 최고의 게임머신이 되어버리네요. 글구 아이볨은 하드 기본 장착이라 용량과 속도면에서도 한참 유리했죠.

아미가는 뭐 하드 없나...? 없는 건 아닌데... 문제가... 90년대가 될때까지도 PC 시장에서 아미가의 주력은 500이었습니다. 85년에 발표된 아키텍쳐...에서 다운그레이드 시킨거요.... 하드는 달수는 있는데 달아서 쓰는 사람이 별로 없었답니다. 아이볨이 XT->AT->386으로 넘어가는 기간동안 같은 하드웨어로 계속 버틴 거니까 그것도 참 대단한 거긴 하지만 그래도 너무 오래 개기다 보니 성능으로 아이볨과는 상대가 안되게 되었죠.

그러니... 개발사들로서는 하드 없는 아미가 500에서 돌아가는 걸 전제로 게임을 계속 만들었고, 나날이 화려해지고 거대해져가는 아이볨 게임들에 대적할 수가 없었죠. 디스크 열몇장씩 되는 시에라 VGA 어드벤처 게임을 플로피 갈아끼워가면서 해야한다고 생각해보세요(더군다나 시에라가 대대로 코모도어 기종들에는 무시에 가까운 행태를 보여서 VGA에 근접하긴 고사하고 안구테러 수준으로 열화된 물건...)
(뭐 그시기에 일본 회사들도 하드디스크를 무시하고 열몇장씩 되는 게임을 플로피 갈아끼워가면서 하도록 강제하고 있었는데, 이쪽은 하드 보급 문제라기 보다는 하드에 인스톨하면 복제가 쉬워질까봐 하지 못하도록 강제한 케이스에 가까웠던듯...)

이렇게 된 이유는... 코모도어가 무능해서라고 해요. 아미가 2000, 3000 이렇게 업그레이드 기종들이 나왔지만 그게 업무용쪽에서 잘나가는데만 안주하고 PC 시장에 신기종을 보급시키는데는 실패한 거죠. 그결과... 90년대 중반이 되기 전에 코모도어는 망했습니다.

망하기 직전에 아미가에 키보드 떼고 시디롬 붙여서 게임기로 팔아먹어보려는 시도를 했지만 안먹혔고요...
컴터 게임의 주도권은 완전히 아이볨으로 넘어가게 됩니다.

코모도어가 안망하고 생존했으면 적어도 영화 CG쪽으로는 한동안 표준기종으로 존속할 수 있지 않았을까 싶기도 한데... 회사가 망해서 더이상 지원을 못받게 되면서 영화계쪽에서 일하던 아미가 컴퓨터는 다 퇴역하게됩니다.
그래도 이런 저런 분야에 박혀있다 보니 2000년대까지도 개기면서 쓴 곳들이 있었다나봐요. NASA라든가...


워낙에 인기있던 기종이라 지금도 에뮬 업데이트가 활발히 되고 있습니다.
플로피 기반으로 돌아가던 기종이다 보니 에뮬레이터에서는 플로피 전용 게임을 하드에 인스톨할 수 있는 편법이 소개되어있고 대부분 그걸 이용해서 돌리고 있는 모양인데요...
뭔가 웃기게도 멀쩡히 하드에 인스톨 가능한 게임들까지도 사람들이 번거롭게 그걸로 돌리고 있어요. 아마도 실물 돌리던 시절에 하드를 써본 적이 없어서 인스톨이 된다는 사실을 인식을 못하는듯...ㅎㅎ


나름 특이하다할 점은 미국과 유럽에서 실행속도가 다릅니다. PAL과 NTSC에 각각 맞추려고 그랬다는 것 같은데... 이게 소리에도 영향을 미쳐서 속도 설정 제대로 안되면 게임 배경음악이 늘어지거나 경박하게 빨라지게 됩니다. 유튜부 보면 그런 영상 많죠.

    • 그런 거 다 극복해가며 에뮬레이터 만들고 업데이트 하는 사람들 보면 참 실력도 실력이지만 그 열정이 대단하다 싶습니다. 아주 오래 전에 msx 에뮬레이터를 한 번 깔아본 적이 있는데 정말로 옛날이라 퀄이 개판에 되는 게임도 거의 없고 그나마 되는 것도 말씀대로 속도 문제가 있어서 금방 지우고 잊었거든요. 요즘 시국이면 이미 거의 완벽한 게 나온지 오래겠죠. 돌다리님 시리즈 글을 읽다 보면 그런 거 하나 찾아서 깔아 볼까... 하는 생각을 하게 돼요. ㅋㅋ 덕택에 늘 즐겁게 잘 읽고 있습니다.

      • msx 에뮬레이터는 이제 할 건 다 했다 싶은 정도로 개발이 되서 제일 유명한 에뮬레이터는 10년도 넘게 업데이트가 안되고 있을 정도ㅂ니다. 그게 아날로그 모니터 시절에 개발된 거라 현재의 디지탈 모니터의 초고상도에 대한 배려가 없다는 문제가 있는데 사람들이 그건 크게 신경 안쓰는 모양이더군요.

        • 요즘 모니터에 옛날 느낌 내려면 이것저것 기술적, 미술적으로 신경 많이 쓴 필터 같은 게 필요할 텐데 옛날 도트겜들 직접 손 봐서 계속 팔아 먹는 캡콤 컬렉션들 필터를 봐도 뭐 그렇게까지 훌륭한 건 잘 없죠. 손 대봐야 노력 대비 효율 안 나오니 걍 안 만드나 봅니다.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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