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콩 영화의 언어
대체로 한 나라의 수도 지역에서 사용하는 언어가 그 나라의 대표 언어가 되고, 중국도 북경 지역 언어를 표준어로 삼고 있습니다. 글고 공산당의 강력한 실행력으로 대륙의 언어를 하나로 통일시켰죠. 뭐 그 이전 국민당 정부 역시 북경어를 표준어로 강제하는 정책을 폈었습니다. 대륙에서 쫓겨난 뒤로는 대만에 가서 북경어를 표준어로 만들었죠.
그렇게 해서 북경어는 사람들이 일반적으로 중국어 하면 바로 떠오르는 언어가 되었습니다.
홍콩은 지리적으로는 대륙의 일부이지만 정치적으론 이미 청나라 말에 중국에서 떨어져나갔기 때문에 그 이후로 북경어의 영향력이 약해졌고 현지 언어인 광동어가 거의 표준어처럼 정착하게 됩니다.(옛날에 티비 뉴스같은데 보니까 국회같은 데서도 광동어를 쓰더군요)
그래서 독자적인 광동어 영화시장이 생겨났습니다. 표준어 강제 정책 때문에 대륙에선 북경어를 제외한 다른 언어 영화는 다 죽어버렸지만 홍콩이 있었던 덕에 광동어 영화는 살아남을 수 있었습니다. 홍콩이라는 도시의 규모만으로는 영화산업이 유지되기가 어렵지만, 광동성이라는 시장이 받쳐주고 있었기 때문에 홍콩의 영화계는 비정상적일 정도로 거대하게 성장할 수 있었습니다.
정작 그 광동성 사람들은 표준어 강제 정책 때문에 뭔소린지 알아먹지도 못하는 영화를 봐야만 하는 처지였는데 고맙게도 홍콩에서 광동어로 된 영화를 만들어서 공급해준 거죠.
그런 공생관계도 1949년 공산당이 이기고 국민당이 대만으로 쫓겨가면서 쫑나게됩니다. 홍콩은 자본주의 진영이기 때문에 공산중국과는 단절되어버렸죠.
설상가상으로 그때까지 중국 영화계의 중심지이던 상해 스튜디오가 무너지면서 영화인들이 공산당을 피해 대거 홍콩으로 내려오게됩니다.
상해에서 북경어로 영화 찍던 사람들이 '홍콩에 왔으니 우리 이제부터는 홍콩말로 영화를 찍어봅시다' 이러지는 않았죠.
아무래도 홍콩은 상해에 비하면 상대적으로 촌구석이었고, 대륙에서 온 영화인들이 만든 영화는 홍콩 현지영화 보다 좀 더 세련되었었다는 모양입니다. 최소한 당시 홍콩 젊은이들은 그렇게 느꼈다나 봐요.
홍콩의 로컬 영화인들은 위기에 봉착하게 되지만 어찌어찌 생존하게 됩니다. 그렇게해서 홍콩에서 광동어 영화와 북경어 영화가 공존하게 되었습니다.
대략 북경어 영화는 문예영화 계열... 좀 폼잡고 고상떠는 쪽, 광동어 영화는 무협영화로 대표되는 심심풀이 땅콩 오락영화쪽으로 대충 영역을 나눠먹으면서 점유율 싸움을 하게 되었다고 합니다.
60년대에 쇼부라다스가 홍콩 영화계를 장악하면서 판세가 심하게 기울어지게 됩니다.
쇼부라다스는 상해에서 부터 일하던 사람들이 홍콩에 와서 세운 회사였고, 처음부터 동남아 일대 화교시장을 타겟으로 하는 북경어 영화 전문 생산공장이었습니다. 그런 쇼부라다스에서 광동어 영화쪽에서 강세이던 장르인 무협영화를 대대적으로 만들겠다고 선언합니다.
호금전과 장철이라는 걸출한 능력자들이 돈많은 쇼부라다스의 인프라를 등에업고 만들어낸 무협영화는 기존의 광동어 무협물과는 다른 때깔을 보이며 보이며 폭발적인 인기를 끕니다.
그리고 북경어 영화 제작 러시가 일어나, 정확한 연도는 기억 안나지만, 70년대 초에는 홍콩 영화가 시작된 이래 처음으로 광동어 영화가 단 한편도 안만들어진 해도 있었다고 합니다.
이소룡은 어렸을 때는 광동어 영화의 아역 스타로 이름을 날렸지만 성인이 되어 복귀했을 시기에는 광동어 영화가 만들어지질 않던 때여서 북경어로만 영화를 찍어야 했습니다(북경어 할줄 몰랐다는데...)
그랬는데, 73년 홍콩 박스오피스에서 이소룡 영화 [용쟁호투]를 제끼고 1위를 한 영화가 초원 감독의 [72가방객]이었습니다.
이 영화는 쇼부라다스 제작 영화이지만 광동어 코미디였습니다.
원래 쇼부라다스와 자매관계인 TV-B에서 제작한 코미디물의 극장판이었다고 합니다. 아무래도 티비는 지역언어로 방송될 수 밖에 없고, 그래서 영화도 광동어로 제작된 거라고 합니다.
[72가방객]의 제작에 관여했던 TV-B 코미디언 허관문은 (홍콩) 관객들이 원하고 있으니 광동어 영화를 활발히 만들어야된다고 주장했지만, 쇼부라다스의 높으신 분들은 무시합니다.
빡친 허관문은 골든하베스트로 날랐고, 거기서 광동어 코미디영화들(일본에서 미스터 부 시리즈라는 이름으로 묶어버린)을 만들어서 이소룡 사후 박스오피스의 지배자가 됩니다.
그렇게해서 죽을뻔 했던 광동어 영화는 다시 살아났고...
그무렵 허관문의 동생인 가수 허관걸은 광동어로 된 노래들을 연달아 히트시켰습니다.
그때까지 홍콩 사람들은 광동어는 촌스런 언어라서 노래같은 거에 안어울린다고 생각하고 있었다나 봐요. 그치만 허관걸이 연속으로 광동어 노래를 히트시키면서 사람들의 광동어에 대한 인식도 바뀌었답니다.
글구 이때쯤이 홍콩 영화계의 세대교체기이기도 했습니다.
대륙출신 노땅들이 차츰 물러나고 제작 현장이 홍콩 출신 토박이들로 채워지게 된 거죠.
그렇게 해서 70년대 말에는 광동어 영화의 제작이 활발하게 진행됩니다.
이전과는 양상이 달라졌어요.
70년대 이전까지는 광동어 영화와 북경어 영화가 뚜렷하게 나뉘어져 있었습니다.
익숙하지 않은 언어쪽 영화에 출연하는 배우는 뭔뜻인지 몰라도 일단 대사를 외워서 입모양 정도는 맞춰줘야했죠.
70년대 말부터는 영화쟁이들이 좀 더 약아지게 됩니다.
촬영현장에서는 배우가 편한 말로 연기하도록 시키고 후반작업 때 녹음실에서 성우 연기로 북경어, 광동어 버전을 각각 제작하게된 겁니다. 어차피 60년대 부터도 홍콩 영화계는 촬영현장에 아예 마이크가 없는게 다반사였고 대사는 전부 성우 후시 녹음이었습니다. 배우가 본인 목소리를 직접 녹음하는 경우도 별로 없었다고 해요.(그시기에 한국도 그랬죠)
그랬으니... 입모양을 칼같이 맞춰야한다는 고집만 버리면 자유가 생기는 거죠ㅎㅎ
홍콩영화는 처음부터 두가지 언어 버전을 만든다는 걸 기본으로 하게됩니다. 그 전까지는 필요한 경우에만 상대언어 더빙판이 가끔씩 만들어지는 형태였다면, 영화제작단계에서부터 아예 두가지 언어판이 나온다는 걸 전제로 만들어집니다.
광동어 영화 시장(홍콩은 물론이고 미국 등 세계각지에 퍼진 화교들)도 이전과는 비교가 안되게 커졌고 북경어 시장은 늘 광동어 시장보다 더 컸으니 둘중 하나도 놓치고 싶지 않아진 거죠. 70년대 초에 제작된 영화들 중에도 히트작은 광동어 더빙판이 만들어집니다.(이소룡 영화라든가)
80년대가 되면 광동어 영화의 천하가 됩니다. 제작 현장에서 한가지 언어를 고집할 필요가 없어지니 그냥 다들 편한 광동어로 만들게 된거죠.
이때에도 촬영현장에서 북경어를 고집한 건 쇼부라다스 정도? 그 쇼부라다스도 광동어 영화를 꽤 만들었고요.
이렇게 두가지 언어가 기본이 되었다는 게 중국어를 모르는 관객들한테는 썩 좋은 일은 아니죠.
대체 어떤 언어로 봐야하는지 헷갈리잖아요.
팬 입장에서는 되도록이면 '원어'로 듣고싶은데, 대체 어떤게 원어인지 모르겠단 말입니다. 어떤 언어든 간에 어차피 출연 배우의 목소리는 아닌거니까요.
일반적으로 홍콩영화니까 당연히 광동어겠지...라는 생각을 하기 쉽지만 그게 간단하지 않습니다.
70년대 중반 이전이라면 광동어가 원어일 확률이 낮아지고요.
80년대 영화도 광동어와 배우들의 입모양이 맞아떨어질 확률은 그렇게 높지는 않습니다.
어차피 영화 대사는 녹음실에서 만들어지는 거니까... 배우와 성우가 같은 말을 하더라도 미묘하게 싱크는 어긋나는게 거의 일반적이고, 배우들이 현장에서 말한 대사와 성우가 녹음한 대사가 일치한다는 보장도 없던 시절이거든요.
대만이나 대륙 출신의 광동어 못하는 배우들, 아예 중국어 자체를 못하는 한국 미국 일본 배우들도 마구마구 나왔는데 이사람들이 다 현장에서 자기 편한대로 대사를 하고 성우녹음으로 처리했으니까요.
무성영화처럼 카메라 앞에서 적당히 입 벙긋거리는 그림만 따고 대사란걸 아예 안한 경우도 있고, 촬영대본과 성우 녹음 대본이 아예 다른 경우도 있고, 참 복잡합니다. 그래서, 포기하면 편합니다ㅎㅎ
공급하는 업자 입장에서는 '홍콩 영화는 두가지 언어가 기본이다'라는 생각을 하고, 두 언어를 다 제공해서 선택은 보는 사람한테 맡기는 게 기본자세여야 합니다.
그런데 또 그게 그렇게 안되죠. 아무래도 두가지 언어를 다 넣으려면 돈 더들어갈 테니까... 하나만 선택하는 일이 꽤 자주 있는데 그게 홍콩영화니까... 하고 무조건 광동어일 확률이 높아지죠.
처음부터 광동어로 만들어지지 않은 영화, 심지어 대만영화까지도 광동어 더빙으로만 서비스되는 경우가 상당히 많습니다. 물론 반대로 광동어 영화인데 북경어로만 나오는 경우도 적지는 않습니다.
한가지 언어만 쓸 수 있다면, 영화를 직접 보고, 어떤 언어에 더 맞춰져 있는지 직접 확인해 보고 그 언어로 서비스를 해준다면 좋을텐데, 그러지 않는다는 겁니다.
90년대 중반쯤까지는 국내에 소개된 홍콩 영화의 99.9999%는 북경어 더빙판이었기 때문에 국내에서는 오히려 북경어를 원어처럼 여기는 팬층이 많은데 그걸 간과하고 광동어로만 출시/서비스 되는 경우도 자주 있죠.
90년대부터는 홍콩에서도 동시녹음 작품들이 늘어나고 배우들이 자기 목소리를 직접 넣는 일이 많아지게 되어 마음편하게 광동어를 메인으로 생각해도 되지않나 싶습니다. 그치만 다국적/다언어 캐스팅은 여전하니까 어떤 언어를 택하느냐에 따라 특정배우의 목소리만 성우로 교체될 수도 있습니다.
지금은..... 홍콩 연예인이 광동어만 알아서는 밥벌어먹고 살기 애로가 있지않나 싶고요. 홍콩영화도 북경어로 제작하는 케이스가 늘게된 것 같습니다. 뭐 순수 홍콩 영화라고 할 수 있는 영화 자체가 많지 않게 된 것 갈기도 하고요.
홍콩 영화를 많이 보던 어렸을 때부터 이게 쭉 참으로 이상하고 궁금했더랬습니다. 이렇게 설명해 주시니 대략 어떤 사연인지는 알겠네요. ㅋㅋ 홍콩과 홍콩 영화의 역사는 참 희한, 드라마틱한 부분이 많은 것 같아요. 덕택에 누가 이렇게 설명해주면 재밌긴 하지만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