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에라의 16색 게임들


시에라의 킹스 퀘스트는 아이볨 피씨주녀라는, 당시 시장에 나오지도 않았던 기기용으로 개발되었습니다. 시에라가 기술력이 있는것 같으면서도 참 기술이 모자란 회사라서요. 특히 처음 접해보는 기종을 다룰 때는 늘 맥을 못췄습니다. 그래서 개발과 프로그래밍은 아이볨 기술자들의 협력을 받았다고 합니다.
그렇게 만들어진 킹스 퀘스트 게임을 가지고 시에라는 AGI 게임 엔진을 만들었고, 이 엔진은 피씨주녀의 16색 그래픽 모드(EGA와 거의 동급)를 기반으로 작동하도록 되어있었습니다. 그전까지 애플만 다루던 시에라는 그렇게 아이볨 피씨쪽으로 발을 들였고 그뒤로는 아예 그쪽에 주력하게 됩니다.

AGI 엔진은 PCjr/EGA의 320x200 모드에서 작동하게 되어 있었지만 게임의 그래픽 데이터는 160x200에 맞춰서 만들어졌습니다. 그리고는 320x200으로 옆으로 잡아늘여 표시하는 거죠. 일종의 아나모픽이랄까...

160x200은 당대에 미국 피씨계를 꽉 잡고 있던 코모도어64의 주력해상도이긴 했습니다만, KQ는 16비트 PCjr 전용으로 개발했던 게임이고. 시에라가 루카스처럼 C64에 진심이었던 회사도 아니고, C64용으론 AGI 게임들을 아예 내지도 않았는데 말이죠(이상할 정도로 시에라는 내내 코모도어를 무시했던 것 같아요.)

시에라는 83,4년 경에 개발된 AGI 엔진을 89년까지 써먹었습니다. 컴퓨터 업계의 발전속도를 생각해보면 참 징하게 오래 우려먹은 거죠. 그러던 중에 자기네들 게임 그래픽이 구리다는 걸 스스로 각성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그래픽과 사운드를 대폭 업그레이드하기 위해서 게임 엔진을 새로 만듭니다. 시에라 크리에이팁 인터프리터-SCI
SCI로 처음 선보인 게임은 88년에 나온 킹스 퀘스트 4편입니다.

그당시의 아이볨 피씨라는 하드웨어가 게임 제작용으로는 진짜 저주받은 물건이었기 때문에 SCI는 드라이버를 이용해 갖가지 옵션을 쓸 수 있도록 만들었고 그렇게 해서 미디를 비롯한 각종 사운드카드를 지원하게 됩니다.

그래놓고는 그래픽은 EGA의 320x200 16색으로 고정시킵니다. AGI의 160x200에 비하면 엄청난 발전이긴 하지만, 뭔가 좀 석연치 않죠. 그때는 이미 256 총천연색을 지원하는 VGA가 나온 다음이란 말입니다. 그런데 VGA는 제끼고 EGA까지만 지원한 거예요.
VGA가 당시로선 비싼 장비라서 돈없는 사람들을 배려해서 그런 거라면 나름 이해가 갈 수도 있겠지만, 그렇게 따지면 사운드도 비싼 장비를 제끼고 보급형 장비들만 지원을 해야겠죠. 그런데 사운드 쪽은 당시 PC에 달 수 있는 것중 제일 비싼 옵션이던 미디를 기준으로 삼아 제작하고 하위 장비는 드라이버로 변환해서 지원했거든요. 그럼 그래픽도 최고옵션인 VGA 기준으로 만들어서 하위장비들에서도 지원되도록 할 수 있었을 텐데... 형평성이 안맞잖아요.

거기다 더 기괴한 건, SCI가 사실은16색을 이상을 지원하는 엔진이었다는 겁니다. 내부적으로 256색을 처리할수 있도록 되어있으면서 출력은 16색으로 밖에 안되도록 고정시킨 거였다나봐요. EGA 16색 범위를 넘어가는 중간색들은 패턴으로 표시하도록 되어있다고 합니다.(scummvm에 그런 패턴을 다시 원래의 중간색으로 바꿔주는 기능이 있습니다.) 그니까 VGA 지원도 고려는 하고 있었다는 거겠죠.( 그니까 걍 VGA를 다룰 기술이 없었는지도....)



g12opwvbmq611.png?width=640&crop=smart&a

패턴으로 표시된 중간색을 원래대로 되돌리면 대략 이런 비슷한 느낌이 됩니다(위 그림은 거기 더해서 팔레트 색상까지 살짝 조정한 경우)




320x200으로 해상도가 높아지면서 시에라 그래픽의 수준이 많이 상향되었지만, 그렇다고 엄청 좋아지진 않았어요. 걍 시에라는 미술감각이 구렸습니다. 아미가 같은 걸로 게임 만드는 다른 회사들에 비하면...

그러다 시에라는 SCI를 업그레이드합니다. 버전 0에서 1로. SCI의 맨처음 버전 넘버가 0이었던 걸 보면 자기들도 미완성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지...?
SCI1과 SCI0의 가장 눈에 띄는 차이는 VGA 256지원이 추가된 거였습니다.

SCI1으로 낸 첫 작품이 KQ5였죠. 보는 사람 눈 돌아가게 만드는 게임. '저게 컴퓨터 게임 그래픽으로 가능하다고?!!!'
과거의 그 구린 시에라 미술이 아니었습니다.(근데 16색 그래픽은 컴퓨터로 직접 작성하는 거고, 256 그래픽은 종이에 따로 그린 걸 스캔한 거니까 걍 컴터로 그림 그리는 기술이 딸렸던 건지도...)

시에라가 새가슴 회사라서요.
오리진은 안되면 니들 책임!이라는 자세로 걍 질러서는 게임하려는 사람들이 시스템을 강제 업그레이드하도록 만들었지만(요샌 모든 게임 회사들이 다 그러고 있죠, 그때는 그게 오리진만의 고유한 색깔이었는데...) 시에라는 혹시 이렇게 고사양으로 만들었다 안팔리면 어쩌나...라는 노파심이 항상 있었어요. SCI0으로 KQ4를 만들었을 때도 혹시 너무 고사양(AT) 전용이라 안팔리면 어쩌나 하고 AGI 버전 KQ4를 별도로 만들었더랬어요.

SCI1 때도 마찬가지라, 시에라는 VGA가 비싸서 달지 못하는 사람들을 위한 배려심을 발휘해... EGA 전용의 KQ5를 따로 만들었습니다.(드라이버 좀 손봐주면 CGA 및 허큘리스에서 돌리는 것도 가능합니다. 다만 애초에 EGA만 염두에 두고 만든 거라서 게임 플레이가 원활하리라는 보장은 못합니다) KQ5뿐만이 아니고, 거의 모든 SCI1 게임의 EGA 버전을 꼬박꼬박 따로 만들었어요(다이나믹스 게임도 포함)

시에라의 노파심과는 달리, EGA 버전은 저~언혀 팔리질 않았습니다. 사람들은 내 컴퓨터에서 돌아가는 EGA 버전 게임을 사는 것 보다는 VGA를 사서 내 컴퓨터에서 게임이 돌아가도록 만드는 쪽을 택했습니다. 그니까 오리진의 방식이 먹혔다는...(그래서 지금 모든 회사들이 그 방식을...) 팔리질 않은 건 고사하고, 아예 EGA 버전이란 게 있다는 사실 자체를 대부분 사람들이 몰랐어요. 몇십년이 지나 인터넷 시대가 되어서야 묻혀있던 EGA 버전이 세상에 알려지기 시작했을 정도ㅂ니다

글고요... SCI1의 EGA 버전들은 그래픽이 너무 초라했습니다. KQ5 이후 SCI 게임들이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던 건 그 화려한 그래픽 때문인데, EGA라 어쩔수 없다는 건 둘째치고, EGA 그래픽 치고도 어글리했습니다. SCI0 시절의 시에라 게임들보다 더 보기 흉했어요. 걍 성의가 없었던 거죠. 그러니 이미 잡지와 매장에서 VGA 버전을 보고 눈 높아진 사람들이 그런 거에 관심이나 줬겠어요.
그나마 16색 버전은 나았습니다. 아미가 버전은 32색인데도 불구하고 16색 EGA 버전보다 더 끔찍했습니다. 그야말로 안구 테러. 32색이라도 아미가는 그 32색 가지고 그래픽 좋다고 몇년동안 명성을 날렸거든요. 그걸 시에라가 단숨에 안구테러로 만들어버린 겁니다. 그니까 그냥 성의가 없었던 거예요.(시에라 말고 다른 회사에서 이식한 KQ6 아미가 버전은 VGA만큼은 못해도 나름 꽤 깔끔한 그림을 보여줍니다) 시에라는 그거 말고 다른 방면으로도 무성의함을 자주 보였던 곳이니까...

웃기게도 시에라는 이 어글리한 16색 버전을 일본에 팔려고 시도했습니다. KQ5나 SQ4같은 게임들을 PC-9801에 이식했는데, PC-9801은 16색밖에 못쓰지만, 그게 고정된 16색이 아니라 팔레트 변경으로 수천가지 색상 중 골라쓸 수 있어 EGA 16색 보다는 훨씬 유연한 환경입니다. 거기다 해상도가 640x400이라 고해상도와 패턴을 이용해 중간색을 표시한다면 VGA 256 컬러 그래픽만은 못해도 나름대로 볼만한 그림을 만들수 있습니다. 일본에서 만든 98 게임들은 그렇게 나왔잖아요.
근데 256도 아닌 그 어글리한 EGA 16색 버전을 완전 고대~로 640x400으로 뻥튀기만 해서 표시했습니다. 이게 일본에서 먹혔을 택이 있나요. 가뜩이나 이쁜 그림 따지는 곳인데. 시에라의 무성의함은 일본시장의 특성까지 무시하고 걍 만만하게 본 거죠.

SCI가 1.1로 업그레이드되면서부터(첫 작품은 폴리스 퀘스트 1 VGA 리메이크) 시에라는 EGA 버전을 따로 만드는 걸 중단합니다.
대신에 EGA 지원 드라이버를 추가했죠. EGA 640x200 16색 모드에서 패턴으로 중간색을 표시하는 방식으로 VGA 데이터를 그대로 EGA에 표시하게 된 겁니다. 나름 그럴듯 했어요. 다만 해상도가 높다보니 컴퓨팅 파워가 꽤 필요했습니다. 그런데, 그정도 컴퓨팅 파워가 있는 시스템에 EGA가 달려있을 가능성이 높지는 않을것 같은데...(뭐 루카스도 윈숭이섬 2나 아틀란티스 운명을 그런 방식으로 EGA 지원하긴 했습니다.)

32비트로 갈아타는 SCI2 부터 시에라는 16색을 완전히 버립니다.
    • EGA란 물건이 VGA의 빠른 등장 때문에 금방 사장됐던 운명... 이었던 걸로 기억합니다. 제가 몇 달 묵은 컴퓨터 잡지에서 읽은 알량한 지식 갖고 친구에게 'EGA를 사면 그래픽이 최고가 된다고!' 같은 소릴 하고 있는데 옆에서 듣고 있던 친구 형이 피식 웃으며 '최고라면 VGA 아니냐?'라고 한 마디 했던 일이 생각나요. 사실 전 그때 VGA의 존재를 모르고 한 소리였는데 민망해서 괜히 나도 아는데 그렇게 말한 척 하고 그랬죠. 알량한 자존심... ㅋㅋㅋㅋㅋ

      • EGA가 나온게 84년이고 VGA가 나온건 87년, 보편화된 건 90년대 들어서니까 EGA가 굴러간 기간은 짧지는 않지만 국내에는 EGA 대신 허큘리스가 군림하다 VGA로 바로 넘어갔으니 국내에선 존재감이 없었죠. 금방 사장되었다기 보다는 써본 사람이 거의 없지 않을까 싶네요.


        VGA도 그리 오래 군림한 것 같진 않은게 보급되기 시작했을 무렵 바로 SVGA로 넘어가서 순수 VGA를 써본 사람도 거의 없지 않을까 싶네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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