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오우삼을 좋아하게 되기까지

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나왔습니다.
당시 제 관심권 밖의 영화였어요. 성룡도 안나오고 무술도 안하고 웃기는 영화도 아니랍니다.
그래서 집 근처 재개봉관으로 떨어졌을 때에 가서 봤습니다.
영화를 보고 대단한 인상을 받지도 못했어요.
뭔가 색감이나 때깔, 화질같은 게 구렸어요.(지금 매체로 나오는 영웅본색은 그때에 비해 많이 보정이 된 거 같습니다.)

영웅본색은 당시의 애들 사이에서 화제인 영화였습니다. 기본적인 이유는 총싸움 영화였기 때문이었을 겁니다. 그때는 대규모 총싸움 장면은 미국영화에서나 볼 수 있는 거라고 생각했는데 전혀 생각지도 못한 쭝국영화에 그게 나와버리니 신선하고 나름 쇼킹했죠. 10여년 후 쉬리가 비슷한 이유로 전설이 되었고요. '어 한국영화에 총싸움 장면이 다 나오네?!!'
뭐 단순히 총싸움때문에 전설이 된 건 아니지만, 그래도 그게 사람들 눈길을 끌고 화제가 된 1차적 요인이겠죠.
근데, 영웅본색은 영화가 나온 후에 1년쯤 지나 우리나라에 들어왔고, 그 사이에 이미 아류작들이 나왔던 모양이예요. 전 그런 아류작(그닥 뛰어난 영화는 아니었고 제목도 모릅니다)을 동네 유선방송에서 먼저 봤어요. 그래서 전 '어 쭝국영화에 총싸움도 나오네!!?'라는 임팩트를 영웅본색이 아니라 그 영화에서 미리 받았고, 총만 많이 쐈을뿐 그게 그리 대단한 영화도 아니었기에 그게 그렇게 임팩트가 크지도 않았어요. 아마 영웅본색을 먼저 봤었다면 영화에 대한 인상이 좀 바뀌었을지도...

아니, 영웅본색의 액션이 스타일리시했던 건 사실이지만.... 그보다는 내용에 공감이 안갔습니다.
제목이 영웅본색, 그냥 영웅도 아니고 '영웅의 참모습을 보여주겠다!'...는데, 영화를 보고나서 드는 생각은,

'그래서 대체 누가 영웅이라는 거야?'.

제 눈에 비친 영웅본색은 깡패들이 밥그릇싸움 하는 이야기였어요. 저기 도대체 어디 영웅이 있다는 건지...

깡패들만 나오는 영화라고 싫어한다는 건 아니지만, 제목이 영웅뵨색이잖아요. 그럼 영웅이 나와야죠.


주인공인 송자호는 한때 어두운 생활을 하다가 새 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사람입니다. 계속 노력했으면 영웅이 될 수 있었겠죠. 하지만, 끝내 과거의 유혹에 넘어가 신세망칩니다. 영웅이 될뻔 했지만 실패한 사람이죠.
동생인 송자걸은 경찰. 일반상식선에서 보기엔 이사람이 영웅이어야합니다. 하지만, 얘는 영화속에 나오는 사람들 중에 전업 악당들을 제외하면 제일 못된 넘이죠. 심지어 나중에는 경찰이 깡패한테 너 그렇게 살면 안돼 임마 하고 꾸중을 듣기까지 합니다.
그나마 제일 영웅에 가까운 인물이라면 택시회사 사장님인데... 이분은 분량이 거의 엑스트라...

더 이해가 안갔던 건 영화를 본 사람들이 다들 마크-주윤발 이야기만 하더라는 겁니다. 주인공도 아닌데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전부 그인물 이야기만 한다는 건 영화 본 사람들이 마크를 주인공으로 여긴다는 거고, 그렇다면 제목에서 말하는 '영웅본색'이 바로 주윤발을 이야기하는 거라는 건데...

제가 본 마크는 영웅이기는 커녕 송자호가 영웅이 되는 걸 방해하는 악의 유혹이였어요. 새삶을 살려고 노력하는 송자호를 꼬드겨서 다시 타락시키는 인물이죠. 이사람이 송자호를 타락시키는 이유도, 무슨 악의 무리 아성 패거리를 응징해서 정의를 구현하자 이런 것도 아니고, 그냥 '폼나게 살고싶어서'. 그러니까, 그냥 깡패예요. 그런데 어찌 이런 인물을 보고 영웅이라고 하는거지?

영웅이라면 모름지기 사람들을 구하고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 이라고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가 영웅본색에 나오는 사람들은 (택시회사 사장님 빼면) 거기 부합하는 인물이 없는 거예요.

영웅본색 2편에 대해서는 전 보는 내내 실컷 웃었던 기억밖에 없습니다. 사실 1편도 웃기는 구석은 꽤 있었지만 그래도 찡한 부분도 있었는데 2편은 그냥 전부 웃기기만...

2000년대에 영웅본색 1,2편이 재개봉했을 때 '오랜만에 추억에 젖어보려고 극장에 갔더니 영화 처음 보는 젊은 세대들이 쉴새없이 킥킥대더라'며 우째 이런일이...라고 한탄하는 글들을 여기저기서 봤더랬습니다만, 사실 냉정하게 생각해보면 디게 웃기는 영화들이예요. 말 안되는 장면들 투성이잖아요.

영웅본색 2는 전부다 과잉되어있는 영화였습니다. 영화 전체가 후까시 덩어리. 1편도 후까시가 꽤 있었지만 이정도는 아니었던. 제가 싸나이 의리 우정 이런 거에 그닥 몰입이 되는 편이 아니긴 합니다만... 대놓고 노골적으로 '어때 폼나지 찡하지 감동되지'하고 밀어부치는 장면들이 연속되는 걸 보고 그냥 웃음이 났어요. 심지어 저는 다들 눈물 펑펑 흘린다는 공중전화 장면도 웃겼습니다. 너무 작위적이어서.

뭐 그렇게 영웅본색이라는 영화는 1,2편 다 그렇게 큰 인상은 받지 못한채로 지나쳐갔고(3편은... 엉 영웅본색에 3편이 있었어요?....ㅎㅎㅎㅎ) 저한테 오우삼은 그냥 관심밖의 인물로 남았습니다.


그리고 몇년 있다가 수호전을 보게되었습니다. 무삭제 완역판으로.

어렸을 때 본 수호지는 108명의 영웅호걸들이 탐관오리를 무찌르고 백성들을 도와준다는 훈훈한 이야기로 기억하고 있었는데... 아동용으로 변형되지 않은 원본 수호전을 보니 (어렸을 때 봤던 거 보다 훨씬 더 재미있기는 했는데ㅎㅎ) 완전히 다른 이야기였어요. 중세 중국 조폭들의 온갖 악행을 기록한 르포였습니다.
백성들을 도와줘요? 그런 거 없습니다. 양산박의 도적들은 자기들 이익 챙기고 자기들이 폼나게 사는 거 말고는 관심없어요.
다만, 이들이 백성들에게 해주는건, 안건드리고 가만 놔둔다는 거였습니다. 그런데 그게 백성들한테는 세상에서 제일 큰 은혜를 베푸는 거였어요. 약탈 안한다는 거. 공권력은 끊임없이 백성들을 수탈하는데 양산박은 안합니다. 거기다 일대를 양산박이 장악하고 있어서 공권력도 백성들을 못건드립니다. 그렇기 때문에 이 108명의 도적들은 인근 백성들에게는 세상에서 제일 고마운 영웅들이 되는 거였습니다.

수호전에서 말하는 영웅이라는 의미 자체가 현대의 한국과는 달랐습니다. 지금의 한국은 서양, 기독교식 이분법의 영향을 받아서 절대악/절대선이 있다는 걸 전제로 해서 선악을 나누고 영웅의 의미도 그 안에서 절대선의 편에 서있는 사람이어야 하죠.

양산박 산적들은 현대의 기독교식 이분법으로 보면 사악한 범죄자들일 뿐입니다. 제눈에 영웅본색에서 영웅이 보이지 않았던 이유였습니다.


중국의 전통적 사고에서는 선악이 이분법으로 나눠지는 게 아니고 계속해서 뒤바뀔 수 있는거였습니다. 민중들에게는 산적보다 공권력이 더 악랄했으니 도적들이 선이 되는 거고, 절대선 절대악같은 게 없으니 중국인들이 전통적으로 중시하는 가치관을 실행하는 사람이 선이고 영웅입니다. 그중에서도 으리.
수호전에서 영웅이 되는 조건은 간단해서, 장의소재하면 된답니다. 의(리)를 지키고 재물을 가벼이 여기는 거.

그렇게 수호전을 보고 나니, 비로소 영웅본색이라는 영화가 이해가 되는 거였습니다.
아성 패거리는 재물을 좇아 의리를 져버린 놈들입니다. 악이죠. 마크와 송자호는 그런 악을 응징하고, 그 와중에서 마크는 역시 자기 이익을 위해 형제의 의를 저버린 송자걸에게 일갈하고, 의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까지 버립니다. 예, 진정한 영웅의 모습이었던 겁니다. 주윤발이 진짜 영웅이 맞았습니다. 제가 중국인들의 영웅 개념을 모르고 있었던 거죠.

그제서야 깨달았네요. 영웅본색이 무협지였다는 사실을.
배경만 현대였을 뿐 협객들의 이야기였던 겁니다.
협객이란, 공권력을 무시하고 사적인 무력을 행사하는 사람들. 현대의 법치국가 개념으로 보면 범죄자들이죠. 그리고 무협지에 나오는 수많은 문파 방파들은 현대의 개념으로 치환하면 폭력조직입니다. 실제로 현재 중국을 대표하는 폭력조직인 삼합회가 무림방파 비슷한 걸로 시작되기도 했죠.
그리고 영웅본색의 이야기도 그 골자는 알고보니 수호전에도 나오는 거였습니다. 협객에게 칼대신 총을 쥐어주고 수호전을 현대배경으로 각색한 이야기. 스킨은 현대지만 정서는 수백년전 거. 그러니 현대의 시각으로만 보면 말이 안되어 보이고 코미디로까지 보이게 되었던...

그때쯤에 첩혈속집을 보게되었던 것 같은데, 이야기는 그저그렇다 싶었지만 보면서 압도되었습니다. 총소리가 들리기 시작하면서 거의 모든 장면이 명장면. 원래 무협영화는 좋아했으니까, 이게 무협영화라는 사실을 알고 보게 되니 거의 세기의 걸작급이었습니다.
그러고 나서는 그전에는 그냥 피식거렸던 영웅본색의 그 후까시가 바로 영화의 본질인것 처럼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그 말도 안되는 개폼, 과장된 정서가 영화의 핵심이었어요. 거기 공감을 못했으니 영화가 별것 아닌것처럼 보였던 거죠. 한번 그렇게 생각이 들고나니 영화가 달리 보였습니다. 그리고 1편보다 못하다고 여겼던 영웅본색 2가 저한테는 전작보다 훨씬 뛰어난 영화로 여겨지게 되었습니다. 후까시만큼은 진짜 예술이거든요. 그리고 그 예술적인 후까시가 극대화된게 첩혈쌍웅이고 첩혈속집.

그렇게 해서 전 오우삼을 좋아하게 되었습니다.

    • 이번 글도 잘 읽었습니다. 이번에는 배스킨라빈스 아이스크림 먹으면서 봤어요.
    • 개봉후 10년쯤 지났을 때 두편을 재미있게 봤어요. 지금 기억나는 건 개봉 당시 정영일 평론가가 주윤발을 크게 칭찬했던겁니다. 정영일씨는 <고릴라>라는 영화를 보고 아놀드가 헐리우드에게 크게 될거라고 칭찬했는데, 선견지명보다는 뭐랄까 시선이 참 따뜻했던 평론가로 기억해요

    • 영웅본색의 무협지적 모습은 대만 보스 대사로도 나오죠: 강호에 의리가 땅에 떨어져서 운운...




      그러고보니 무협지로 영웅본색을 보면 총알이 계속 나가는 총도 이해가 갑니다 :-)

    • 서사고 뭐고 오우삼이 슬로우 걸고 비둘기 날려주면 그걸로 족합니다. XX같지만 멋있어..

    • 제가 영웅본색을 볼 당시 제 또래 남자애들 대세 필독서가 영웅문 시리즈였어요. 일생에 책 같은 거 안 키우던 애들도 서너번씩 반복해 읽던 그 책 덕분인지 제 또래 애들은 영웅본색의 그 독특한 영웅, 의리.개념을 그냥 자연스레 받아들였던 걸로 기억합니다. 다들 장국영 캐릭터를 욕했죠. 쟤 왜 저리 찌질거려? 의리 없게. ㅋㅋㅋ 2편으로 용서 받긴 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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