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메로의 좀비
아이티의 부두교 전승이던 좀비가 세상에 알려진 건 대략 1920년대 말쯤이라고 합니다. 30년대부터는 부두교 주술을 기반으로 하는 좀비 영화가 나오기 시작했습니다. 이런 저런 좀비 관련 영화들이 나오게 되면서는 정체불명의 괴물을 등장시키고는 좀비라고 우기는 영화들도 종종 있었습니다.
1968년, 좀비라는 개념이 완전히 바뀌게 됩니다. 조지 로메로와 존 루소가 공동으로 각본을 쓴 영화 [산송장의 밤]이 나오면서부터입니다.
이 영화는 사람을 뜯어먹고 다니는 충격적인 괴물들을 선보였는데 그 후로 좀비라는 말은 이 영화에 나왔던 식인괴물을 지칭하는 것으로 의미가 완전히 바뀌어버린 것입니다. 이 괴물들은 부두교 좀비와는 거의 전혀 무관하다할 존재들이었는데...
로메로와 루소, 그러니까 이 괴물을 발명했다고 할 수 있는 사람들은, 처음부터 굴(사람 잡아먹는 걸로 유명한 괴물)이 우굴거리는 세상에 대한 이야기를 만들어보자는 아이디어에서 시작했던 거라고 해요. 자기들은 굴이라고 생각하고 만들었는데 영화를 본 사람들이 자꾸만 그 괴물을 좀비라고 불렀다는 겁니다.
사실 이 식인괴물들은 굴 하고도 거리가 멉니다. 그냥 영어에서 굴이 (식인)괴물의 대명사정도로 흔히 쓰는 말이었기에 깊이 생각은 안하고 쓴 것 같아요.
영화 만드는 과정에서 두사람은 리처드 매서슨의 '나는 전설이다'와 그걸 영화로 만든 [지상 최후의 인간]을 많이 참고했다고 합니다. '나는 전설이다'는 흡혈귀 전설을 과학적으로 조명해보고자 시도한 작품이라 하고, 현실에서는 불가능한 미신적 요소는 되도록 배제하고 흡혈을 전염병으로 해석한 작품입니다. [산송장의 밤]이 '전설'을 참고하다 보니 여기 나오는 식인괴물들도 은연중에 매서슨이 묘사한 괴물들의 영향을 받게 됩니다. 영화판인 [지상 최후의 인간]은 (포스트 아포칼립스 세상의) 황량한 도시에서 (괴물이 된)사람들이 떼거지로 어슬렁거리며 다닌다는, 좀비 영화를 대표하는 비주얼을 미리 선보이기도 했습니다.
[산송장의 밤]을 본 관객들은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영화속 식인괴물들을 보고 흡혈귀나 굴 보다는 좀비를 먼저 떠올렸나봅니다. 어쨌거나 이후 좀비는 로메로의 식인괴물을 뜻하는 의미로 쓰이게 되었고, [산송장의 밤]을 모방한 작품들도 잔뜩 나오면서 거기 나오는 애들도 다 좀비라고 부르게 되죠.
[산송장] 이후 로메로와 루소는 헤어져서 각자의 길을 갔고 로메로는 속편인 [송장의 새벽]을 만듭니다.
그동안에 사람들이 하도 좀비좀비 하니까 일일이 아니라고 해명하기도 지겨웠나봐요. 이 속편에서 로메로는 '그래 걔들 좀비 맞아' 하고 인증합니다. 그래도 자존심을 지키느라 그랬는지 영화속에 좀비라는 단어는 한번도 안나오고, 끝나고 나서 대부분의 사람들이 안보고 그냥 나가는 크레딧에 배역명으로만 나오죠. 크레딧이야 영화 다 만들고 난 다음에 집어넣는 거니까 어쩌면 영화 만드는 동안에도 속으로는 '얘들 좀비 아닌데...'라고 생각하고 만드셨을지도...ㅎㅎ
그치만 독자편집해서 미국 이외 지역에 영화를 배급했던 공동제작자 다리오 아르젠토는 아예 제목을 [좀비]라고 붙여버립니다. 글구 이태리판에서는 아예 영화속 주인공들 입으로 좀비라고 하고요. 그래서 이 식인괴물의 이름은 세계적으로, 빼도박도 못하게, 좀비라고 확실하게 굳어버렸죠. 창조자 본인의 작품에서 인증을 한 셈이니까 뭐... 그리고는 부두교 좀비는 사람들 기억속에서 사라집니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간과하고 넘어간 거지만, 이 [송장의 새벽]에서 로메로는 그동안 사람들이 모르고있던 좀비의 아주 중요한 기본 속성 하나를 슬그머니 알려줍니다.
시작부분, TV에 나오는 사람들이 '최근에 죽은 사람들이 살아나고 있다'는 말을 합니다. '괴물에게 물려죽은 사람'이 아니라 '최근에 죽은'입니다. 그러니까 로메로 좀비 월드에서는 [산송장의 밤] 사건 이후 시점에서는 어떤 이유로든 간에 죽은 사람은 다 좀비가 된다는겁니다.
그때까지 사람들은 로메로의 괴물-좀비를 전염병의 일종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좀비 이빨에 물리면 좀비가 옮는다는. 하지만 로메로는 그렇지 않다고 정의한 것입니다.
그럼 좀비한테 물리면 어떤 일이 생기느냐... 백푸로 사망입니다. 좀비 이빨은 그냥 독성이 강한 거였습니다. 독 때문에 죽게되면 그냥 죽었으니까 좀비가 되는 거지, 좀비한테 전염성이 있는건 아니었다는 거.
근데... 이미 [산송장의 밤]을 본 사람들에게는 '좀비=흡혈귀와 마찬가지로 이빨로 전염되는 존재'라고 인상이 확 박혀버린 뒤죠. 보는 사람 눈에는 그냥 좀비한테 물려서 좀비 된 걸로 보이고, 그럼 전염된 거라고 생각할 수 밖에 없잖아요. 전염 안된다는 걸 알리고 싶었으면 화면 배경에 지나가는 사람들 말고 주인공들 입을 통해서 확실하게 알려주든가, 좀비한테 물리는 것 말고 다른 경로로 사망하는 사람이 좀비가 되는 걸 좀 티나게 보여주든가요.
로메로는 나~중에 가서야, 좀비한테 물리지 않고도 좀비가 되는 사람들을 등장시키긴 합니다만(아마 [산송장의 밤] 칼라판 리메이크에서 부터였던 것 같아요) 이미 늦었어요. 그럼에도 사람들은 여전히 그 사실을 인식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그게 옥에티라고 지적하는 사람까지 있었죠.)
영화 만드는 사람들도 못알아채긴 마찬가지였는지, [송장의 새벽]이 세계적으로 히트한 후 무수한 좀비 영화가 쏟아져 나왔지만 적어도 20세기에 나온 영화들 중에서는, 다른건 다 로메로 좀비 설정을 따라하더하도, '사망하면 무조건 좀비'라는 설정을 채용한 건 로메로 본인의 좀비 월드에 속하는 영화 말고는 없었던 걸로 알고있습니다(21세기에는 몇편 나왔어요)
점점 좀비 영화에서 초자연적인 요소들이 빠지고 SF 쪽으로 기울면서 좀비는 바이러스 때문에 생기는 전염병이라는 게 거의 상식처럼 되었고 좀비라는 존재 자체가 전염병의 메타포나 다름없죠.
근데요... 정작 영감님 본인도 '사망하면 무조건 좀비'라는 설정을 만들긴 했어도 거기 대해 깊게 생각해보지는 않은 것 같아요.
21세기에 만든 [송장의 땅]은 좀비 사태가 벌어진 후 한동안 지나서 살아남은 사람들이 어느정도 규모의 사회를 재건하고 있는 곳을 배경으로 하는 이야기입니다. 당연히 그동안 좀비와 부대껴본 경험에서 나온 대비책이 있겠죠. 그런데 여기서 보이는 좀비 대책은 기껏해야, 철벽치고 그안에 틀어박혀 있기.
좀비가 전염병이라면 그게 모범답안이겠죠. 코로나 때도 그게 제1 권장사항이었잖아요. 하지만 전염병이 아니라면 이야기가 완전히 달라요. 외부 좀비의 유입을 막는 것 말고도 내부에서 자연발생하는 좀비도 막아야죠. 사람이 자연사/돌연사하는 것에 대한 대비가 있어야하지 않겠습니까.
예를 들어 군대 내무반에서 자고있던 병사 하나가 밤중에 심장마비로 죽었다고 해봐요. 다음날이면 부대전체가 식당이 되어있겠죠.
언제 어떻게 사람이 죽을지 모르니 감시 체제를 만들어야만 할거고, 죽을 가능성이 높은 노인/병자/부상자등은 특별관리 대상이 되야할 거고 어딜 가든 여러명이 같이 다니게 해서 옆사람이 돌연사하는지 모니터하고 죽는 사람이 생기면 즉각 보고하는 통신 체제같은 것도 갖추어야겠죠.
사람이 죽는 걸 컨트롤할 수는 없지만 그래도 죽을 가능성은 최대한 배제해야하잖아요. 살상 가능한 도구는 휴대 금지시키고 죽을 수도 있는 위험한 일은 못하게 하고 중독, 병, 발작을 일으킬 수 있는 것들도 통제하고 당연히 웃찻사도 방송금지해야 할테고.
죽은 사람은 무조건 좀비가 되는 세상에서 산 사람들이 대규모 사회를 유지하려면 고려해야할 것들이 아주 많습니다. 지금의 형태와는 다른 새로운 사회를 구상해야겠죠. 하지만 [송장의 땅]을 보면 '응 나 그런거 생각 안해봤어'라는 티가...ㅎㅎ
어쩌면 원래는 로메로 본인도 전염되는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던 건 아닐까요?
'나는 전설이다'에서 영향을 받은 거라면 [산송장] 만들었던 당시엔 로메로도 전염병이라고 생각하고 있었다고 봐도 이상하지 않겠죠. 나중에 가서 메서슨의 흡혈귀와 거리를 두고싶어져서 전염은 안된다는 설정을 만들게된 것일지도...?
뭐 어차피 대부분 사람들은 그런 설정이 있었다는 사실도 몰랐으니 별 상관 없을지도요ㅎㅎ
근데... 좀비 영화들을 보면 좀비는 그냥 공기속에서 자연발생하는 것 같지 않나요?...ㅎㅎ
순대국밥... ㅋㅋㅋㅋㅋ 절묘하네요!
헐리웃이 액션 영화 만들면서도 도덕적인 거, 관객들 심리적 부담 같은 걸 신경 쓰게 되면서 좀비가 더 흥했다는 분석을 오래 전에 읽은 기억이 있습니다. 그러니까 아무리 악당이어도 주인공이 인간을 도륙하고 터뜨리고 죽여대면서 그게 수십, 수백이 되면 관객들이 부담을 느끼게 되는데, 그걸 사람이 아닌 좀비로 바꿔 버리면 생긴 건 사람이지만 어쨌든 인간은 아니니까 막 죽여도 그냥 씐나고 주인공도 싸이코패스가 되지 않음. 뭐 이런 이야기였어요.
옛날 옛적에 듀나님께서도 몇 번 그 '부두교 좀비 vs 로메로 좀비' 얘길 하신 적이 있던 걸로 기억합니다. 불쌍한 부두교. 헐리웃 때문에 이미지 시궁창이 된 걸로도 모자라서 특산물까지 빼앗긴... ㅠㅜ
'암튼 죽으면 그냥 좀비'는 저도 오래 전에 어디서 읽고 화들짝 놀란 기억이 있는데요. 이후로 까맣게 잊고 살다가 이 글 읽으면서 다시 떠올렸습니다. 사람의 기억력이란 게 참... ㅋㅋ 그러고보니 저는 초기 3부작만 보고 이후 로메로 좀비들을 하나도 안 봤네요. 언젠가 보긴 해야할 텐데 말이죠.
근데 그래서(?) 그런지 로메로 좀비 영화들 보면 좀비에게 죽는 거 말곤 다른 이유로 사람 죽는 게 거의 안 나오긴 하죠. 악당들에게 총을 맞더라도 이후에 좀비에 물려 죽는다거나 뭐 그런 식이었던 것 같습니다. 나름 본인의 공식을 신경 쓰며 만들긴 했던 것 같기도... 한데 덕택에 사람들이 그 공식을 전혀 모르게 만들어 버렸네요. 하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