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연은 비켜 가지 않는다.]

줄리언 반스는 이번 책에서도 화자가 특정 대상을 탐구하는 동시에 자기 삶과 생각을 곁들여 사색하는 방식으로 내용을 전개 시킵니다. 그런 면에서 [플로베르의 앵무새] 생각이 나는 책이었어요.

3장으로 구성되어 있는 이 책은 탐구 대상이 둘이라 할 수 있는데, 하나는 화자의 선생인 엘리자베스 핀치이고 다른 하나는 이 선생이 소개한 '배교자 율리아누스'입니다. 


1장은 삼십 대인 화자가 성인들 대상 수업에서 만난 엘리자베스 핀치 교수에게 매혹되고 그와의 인연을 잇게 되는 내용입니다. 

너무 매료되고 있는 앞 부분에서 소설이 가볍게 느껴졌습니다. 핀치 교수가 구태의연함에서 벗어난 지성의 힘으로 압도하며 뭔가 목마름이 있어 수업을 찾은 나이든 학생들, 그 중 특히 화자에게 시의적절한 강타를 날리는 영향력을 행사하게 되는 지점들에 동의도 하고 이해도 되었지만 그래도 열광하는 사람을 옆에서 보는 겸연쩍음의 감정이 들었거든요. 핀치 선생이 비상한 인물로 표현되긴 합니다. 노트 없이, 메모를 보는 일 없이 강의하면서 말이 글의 문장구조와 같아 쉼표와 세미콜론이 보이는 듯하고 문장의 마무리는 예정된 질서를 따릅니다. 그러면서도 고리타분함에서 멀고 강렬하게 살아 있는 표현력을 갖고요. 골초인데도 목소리는 듣기 좋고 언제나 비슷한 복장과 단정한 머리 스타일을 하고 있습니다.  

이야기는 진행되어 수업으로 만난 인연은 20년간 이어집니다. 화자가 제안하고 핀치가 수정제안하여 일 년에 두세 번 점심을 함께하는 사이로 정착하는데 여기서부터 저는 이 소설에 안심하고 신뢰를 가지게 되었습니다. 일 년에 두세 번 75분의 식사 시간 동안 화자는 신중하게 주제를(그때 그때의 이야기거리) 선택해서 자신의 지성을 농축하여 대화를 나눕니다. '나는 그녀 앞에서는 더 똑똑해졌다.' 라고 말하는데 저도 상대에 따라 이런 상태를 경험한 적이 있었으므로 다만 느낌일 뿐이라기 보다 집중과 열의가 화자를 변화시킨 시간임을 알 것 같았습니다. 소크라테스식 문답형식의 (때로는 머리에 쥐나는)대화를 애정 플러스 존경의 대상과 나눈 경험, 우리 다들 몇 번은 갖고 계시지 않나요? 핀치 교수의 표현에 따르면 '엄격한 즐거움'의 일종입니다. 강의실이 아니라 식사 중의 대화여서 즐거움에 훨씬 치중하지만요.

 

2장은 핀치 교수가 쌓아놓은 자료들을 바탕으로 화자가 쓴 율리아누스 황제에 대한 에세이입니다. 

이 황제가 왜 2장을 통째로 차지하는지만 소개합니다.

로마가 기독교 탄압의 시대를 끝내고 선대 황제 콘스탄티누스부터 일신교인 기독교를 인정하여 바야흐로 기독교가 널리 퍼지려는 시기에 등장한 율리아누스는 이전의 다신교 로마 종교를 다시 부흥시키려 한 인물입니다. 그래서 '배교자 율리아누스'로 불린다네요. 기독교 세계가 된 이후의 역사에서 최후의 이교도 황제라고도 불리는 사람입니다. 뛰어난 군인이었으며 학자이기도 하여 철학을 공부하는 것을 좋아하였다고 합니다. 교수가 이 황제 이야기를 1장에서부터 하는데 이와 관련된 관심은 세계관으로, 가치관으로 꾸준히 수업에서 변주되며 제시되었던 것이었어요. 

다음 예로부터 시작이 됩니다. '모노(mono)-로 시작해서 좋은 게 없죠.' 라며 일신교, 일부일처제, 단조로움, 단종 재배, 단일 문화, 모노폴리 등등을 열거합니다. 교수는 일신교의 세계가 된 서구, 엉망진창의 현재에서 고대의 율리아누스 황제의 치세가 성공해서 그 질서가 계속 유지되고 다신교의 종교관이 당연한 세계가 되었다면 어땠을까? 상상과 탐문을 제안합니다. '율리아누스, 그는 기독교라는 재앙의 큰 물결을 막으려 했죠.' 라면서요. 

다음의 말도 합니다. '우리는 너무 쉽게 역사를 일종의 다윈주의로 본다, 라고 말하고 싶습니다. 적자생존, 물론 이 때 다윈이 가장 강한 자, 또는 심지어 가장 영리한 자를 적자라고 한 건 아니죠. 그저 변하는 환경에 적응할 준비를 가장 잘 갖춘 자일 뿐입니다. 하지만 실제 인간 역사에서는 그렇지가 않아요. 생존하거나 우월하거나 군림하는 자는 더 잘 조직되고 더 큰 총을 휘두르는 자들에 불과합니다. 죽이는 데 더 유능한 자들이죠. 평화를 사랑하는 나라가 승리하는 일은 거의 없습니다.' (이 부분은 얼마 전에 읽은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도 자세히 언급되어 있습니다.) 

그러면서 오늘에 이르게 된 결정적인 승부를 예를 들고 '그렇지 않았다면-'을 상상해 보기를 권하며 현재의 삶이 당연한 것이 아님을, 강자에 이입하지 않기를, 생각을 확장시키기를 요청합니다. 

이런 맥락에서 교수의 학문적 관심의 대상이 율리아누스 황제로 집약되는데 교수가 쓰지 않은 책을 화자가 에세이로 쓰게 된 것이 2장입니다. 2장의 본 내용은 소개를 생략합니다. 율 황제에 대한 여러 자료를 토대로 어떤 사람이었는지 역사적 정보에다가 추측과 상상을 더해 정리한 글입니다.


3장은 1장과 2장을 통과하면서 더 확인할 부분을 확인하기도 하고, 이해한 바를 정리하고 있었습니다. 

핀치 교수가 남긴 것들과 말을 다시 곱씹으며 구멍이 있는 부분을 매우려 애씁니다. 교수의 전모를 파악하려고 애쓰는 과정은 화자 자신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기도 합니다. 그리고 긴 시간 특별한 존재로 여기며 만남을 이어왔지만 교수를 '알고' '이해하는' 것은 율리아누스 황제를 '알고' '이해하는' 것보다 나을 것이 없다는 생각에 이릅니다. 우리의 기억도 상상력의 기능 가운데 하나이고 그런 면에서 핀치 선생도 역사 속의 인물과 본질적인 차이가 없다는 생각인 겁니다. 

오래 전 교수의 수업을 함께 들으며 어울린 무리 중에 잠시 사귄 안나 그리고 당시에 교수에게 반감이 심했던 제프 등과 교수에 대한 생각을 주고받기도 합니다. 

안나는 교수에 대한 화자의 사랑에 근사한 탐구가 독백에 그치지 않는지 조심하라고 하네요.(아마도 남들 눈에는 헛소리로 보이지 않을지나 객관성을 지녔는지에 대해 생각해 보라는 것이겠죠.) 화자는 일찌기 핀치 선생이 독백에 대해 한 말을 떠올립니다. 독백은 극적 장치로서 극단적 인위성을 지니며 그것이 독백의 뛰어난 점, 이라 했다네요. 제 생각에 자연스럽다기 보다는 매우 의식적인 공들인 표현방식이라는 뜻인 것 같고 매우 의식적이며 공들인 표현방식이라면 화자는 오히려 안도하지 않을까 합니다.  

제프는 선생이 자기 스타일은 있었으나 고대식의 느낌이며 수업방식은 방종에 가까웠고 선생 본인은 자기가 '독창적'이라고 생각하는 거 같으나 '아마추어'가 더 잘 어울리며 아마추어 학자의 시대는 사라졌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화자가 선생을 신화화하여 의지한다고 비꼬듯 말하네요. 제가 읽기에 선생에 대한 제프의 말이 틀린 것은 아닙니다. 거슬리는 점은 기존의 틀을 가지고 그 틀에 맞추어 평가하는 흔한 외부자의 시선이라서(힘 있는 편 우리 편! 대세를 따르는 게 대세!) 자신이 사용하는 표현이 선생을 내려다 보는 위치에서 가차없이 평가하고 있는 걸로 생각한다는 것입니다. 고대식은 안 좋으며 현대식이 좋은 건가, 연대기식, 이벤트식의 문명사 주입식 수업방식을 원하였던 것이니 제프? 독창적인 것과 아마추어적인 것은 동시에 발견되기도 하는 근접한 단어 아닌가, 아마추어적인 것은 열등한 것이라서 아마추어 학자가 도태되기라도 했다는 것인가 - 이러한 생각들을 하게 됩니다. 정말 안 독창적인 제프입니다.


마무리를 잘 하기 어렵네요. 할 말이 더 있는 것도 같은데 그만 쓰고 싶은 건 뭘까요. 

제가 위에 쓴 앞 부분의 진입 장벽(사춘기도 아닌데 선생에게 넘 반하네? 근데 선생은 왜 이렇게 금욕적인 외모에다 지적으로 넓고 깊은지 너무한 거 아니냐?)이랄 것도 없는 불만만 가볍게 넘기시고 완독하시면 아주 흡족한 독서가 되실 것 같습니다. 사실 옮긴이 정영목 님의 사족을 보면 모델(어니타 브루크너)이 있다고 하니 영국엔 이런 분이 '너무한 거' 아니었습니다. 모델이 있다고 하니 엘리자베스 핀치의 비상함에 순순히 설득이 되었어요. 

    


    • 소설의 형식으로 재미를 추가한 강연 내지는 작가의 사변(?) 기록 같은 것일까요. 끄덕끄덕하는 기분으로 잘 읽었습니다.


      ...사실은 '모노'로 시작하는 좋은 걸 생각해보려 애썼지만 모노폴리(보드게임) 밖엔 떠오르지 않는군요. ㅋㅋㅋ 분합니다!!!

      • 네, 이 작가가 잘 쓰는 방법입니다. 재미나는 대화도 꽤 들어가지만요. 김연수 소설가의 추천사에도 반스 소설 읽기를 수업 받는 것이라고 하면서 이번 소설 주인공인 엘리자베스 핀치를 그 수업에 가장 잘 어울리는 선생이라고 말하네요.


        ㅎㅎ 본문에 선생이 예를 들면서 '모노폴리-보드 게임을 말하는 게 아니에요'라고 합니다. 모노그램도 예를 드는데 이건 중립적인 것 같았는데 '허영의 표시죠'라고 합니다.ㅋ



    • 자세한 리뷰를 읽으니 기존 줄리안 반즈 스타일의 또 다른 변주인게 맞는 듯 합니다. 모델이 되었다는 실존인물이 누구인지 궁금해서 검색해 보았더니 이분은 교수로서도 무지하게 훌륭해 보이는데, 거기다가 부커상도 받은 소설가라고요. 찾아보니 이분 소설이 꽤 있는데 우리나라엔 북커상 받은 한권만 출판되었군요. 근데 이분이 인터뷰에 밝힌 결혼 안한 이유가 너무 재미있습니다. Brookner commented in one interview that she had received several proposals of marriage, but rejected all of them, concluding that men were "people with their own agenda, who think you might be fitted in if they lop off certain parts. You can see them coming a mile off". 

      • 네, 저도 이 작가의 부커상 수상작 [호텔 뒤락]을 찾아놨습니다. 이분은 여름방학의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첫 소설을 썼다고 되어 있어서 엄...뭡니까..했어요.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10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4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5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9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4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6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4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50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7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5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9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6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8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