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중날입니다

백중날이란 무엇인가?

제가 지금 읽고 있는 이수현의 소설 『서울에 수호신이 있었을 때』에서 한 대목 옮겨 봅니다.


"어, 왔느냐."

서낭신들이 은지의 손에 들린 술병을 반갑게 맞이했다.

"그러고 보니 곧 망혼일亡魂日이로구나."
"망혼일은 뭐였죠?

강은지가 처음 듣는 것도 당연했다. 망혼일이란 백중百中날의 다른 이름이었으나, 이제는 백중이 무엇을 하는 날인지도 기억하는 사람이 별로 없었다.

망혼일은 조상의 혼을 위로하는 날이라 하여 머슴도 쉬게 했다고 한다. 모두가 새로 난 과일과 곡식을 차려 혼을 위로하거니와, 제사를 지내 줄 자손이 없는 망혼들을 위로하기 위해 불교 사원에서 따로 천도재를 지내거나 나라에서 챙겨 주기도 했다. 요컨대, 온갖 귀신이 다 모여드는 날이었다.

"와, 백중이요? 교과서에서 보긴 봤는데, 그런 날인 줄은 몰랐네요. 핼러윈 비슷하네."

핼러윈이라는 말에 서낭신들이 일제히 언짢은 표정을 지었다.

"그런 수입산 명절은 챙기면서 망혼일은 다 잊어버리고, 잘들 하는 짓이다."

백중 또는 망혼일은 음력 7월 15일이었고, 때문에 음력 칠월은 귀신의 달, 혼란 속에서 평범한 세상과 귀신들의 세상을 가르는 울타리가 더 낮아지는 시기이니, 평소보다 더 몸과 마음을 바로 하고 위험한 일을 삼가는 것이 좋다는 게 서낭신들의 말이었다.

"아가, 너도 허튼짓하지 말고 얌전히 지내거라."
"안 그래도 한여름이라 어디 돌아다닐 생각도 안 들어요."


실은 이번에 백중을 맞이하여 제가 작년에 가장 즐겁게 읽었던 이 소설을 다시 읽고 감상문도 올리고 싶었습니다만, 언제나 그렇듯 손은 느리고 머리는 게으른 탓에 감상문은커녕 책도 다 읽지 못했네요. 일단은 이렇게나마 기념하고 싶었어요.

(서낭신들이 백중은 잊고 핼러윈 챙긴다고 투덜거리는 걸 보고 오해하실 법도 합니다만, 신토불이만 부르짖으며 '요즘 젊은 것들은' 하는 꼰대 소설은 전혀 아닙니다.)

이미 잊히다시피 한 전통을 억지로 되살리려 한다고 해서 되살려지는 것도 아닐 테고, 그럴 필요가 있는지 어떤지도 모르겠습니다. 다만 할로윈이 한국에서 아무런 의미가 없었던 시절을 분명 기억하는 한편 이제는 할로윈 시즌이 되면 영미권의 호러 팬들과 어울려 닥치는 대로 호러 영화를 보면서 Shocktober라는 별명까지 붙은 10월을 축제처럼 보내는 한 사람의 호러 애호가로서, 백중 무렵이면 어쩔 수 없이 미안한 감정을(누구에게?) 느끼는 것도 사실입니다. 누군가의 노동력을 착취해 가며 제사상을 차리거나 가족들을 억지로 한 자리에 불러 모으자는 것도 아니고, 그저 방구석에서 혼자 '와, 오늘 백중이네!' 하면서 어울리는 호러 소설/영화 한 편쯤 보고 즐기는 건 하려면 충분히 할 수 있을 텐데 말이에요. 납량納涼 특집이라는 말도 있는 만큼 한국에서는 할로윈이 있는 가을보다는 여름이야말로 명실상부 호러의 계절이기도 하고요.

애석하지만 오늘 밤에도 미리 가족과 함께 보기로 약조한 영화가 있어서 그 소박한 결심조차 지키지 못하고 지나가게 되었습니다만, 누구보다도 저 자신을 위해 이렇게라도 짚어 두고 싶었어요.

저녁으로는 콩국수를 먹었어요. 집에서 해 먹은 건 올해 들어 처음인데, 그동안 왜 안 했지 싶을 정도로 맛있었네요. 식사 아직 안 하신 분들은 더위를 잊을 만큼 기분 좋은 식사 하시고, 이미 식사 하신 분들은 한낮의 열기에서 벗어나 서늘한 저녁 보내시길 바랍니다.
    • 오늘이 백중이라는 건 당연히 몰랐습니다만, 우연히도 귀신도 나오고 천도재도 나오는 영화를 봤네요. 이 글을 보니 영화 잘 골랐구나(?) 싶어서 괜히 기분이 좋습니다. ㅋㅋㅋ oldies님도 서늘하고 편안한 일요일 밤 보내시길 바랍니다!

    • 오늘이 백중...몰랐습니다. 무슨 무슨 날이라는 거는 없을수록 좋다 주의라서 아는 날이 없어요. 덕분에 백중의 뜻은 알게 되었어요. 그나저나 아주 모처럼 일상 글을 올리셨네요! 잘 읽었습니다.

    • 일본에서는 우리나라 추석처럼 지내는 것 같습니다. 고레에다 히로카즈의 걸어도 걸어도 인가? 에서 “이번에 (고향집에) 왔으니 백중 때는 안와도 되겠어.” 라는 대사가 마지막에 있었던듯한...
    • 호러애호가께서 백중에 공포소설/영화를 못 봐 아쉬우신 것 같아 약간 으스스한 얘기를 붙여봅니다.   




      <베트남에서 음력 7월에 금기시되는 것들>




      1. 늦게 외출하지 마라

      7월은 영혼이 어둠에 휘둘리기 가장 좋은 때. 늦게 바깥을 배회하면 영혼이 귀신에 팔려갈 수 있다.




      2. 밤에 친한 사람 이름을 부르지 마라

      음기가 강한 7월은 귀신들이 당신의 목소리를 듣기 쉬운 달. 귀신이 당신이 부르는 이름을 듣고 친한 사람을 따라갈 수 있다.

      3. 수영을 하지 마라

      물에 있는 물귀신이 당신의 발목을 잡고 놔주지 않을 수 있다. 가급적 물을 멀리하고 안전한 곳에 거해야 한다.

      4. 다른 사람을 놀라게 하지 마라

      깜짝 놀라게 되면 순간적으로 정신이 나갈 수 있다. 그러면 귀신이 그 틈을 타고 혼미해진 정신세계를 점령한다. 




      5. 돈을 줍지 마라

      길거리에 떨어진 돈은 귀신에게 바쳐진 돈. 그러니 이 돈을 가져가면 귀신의 돈을 훔친 게 되어 귀신의 복수가 이어진다.

      6. 신발이 침대를 향하게 하지 마라

      신발이 침대 쪽으로 향하게 되면 귀신이 침대에 따라 들어온다.

      7. 젓가락을 그릇에 넣지 마라


      젓가락을 그릇 안에 넣어놓지 말고 그릇 옆에 두라. 제사 지낼 때 숟가락이나 젓가락을 밥그릇에 꼽아놓는 것을 생각해 보라.

      8. 밤에는 사진을 찍지 마라

      사진에 찍힌 유령의 모습을 볼 수 있다.

      9. 행사 전에 제공된 음식을 먹지 마라

      행사 전에 준비된 음식을 먹으면 도둑질로 간주되어 귀신의 불행이 닥칠 수 있다.

      10. 밤에 빨래를 널지 마라

      귀신이 널어진 빨래를 보고 자기 옷이라고 착각할 수 있다. 귀신이 입었던 옷을 입으면 병에 걸릴 수 있다.

       


      출처: https://www.mk.co.kr/news/world/8937135 

    • 오... 이런 날이 있군요... 망혼의 정신이 갈 수록 억압받는 시대에 곱씹어볼만한 글이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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