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있음) 퍼펙트 데이즈 -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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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는 히라야마의 꿈으로 시작한다. 꿈에서 보여주는 책 페이지의 그림자 영影 글자가 눈에 띈다. 바깥에서 빗자루질을 하는 소리가 들리고 히라야마는 잠에서 깬다. 히라야마는 이를 닦고, 작업복으로 갈아입고, 집 앞 자판기에서 캔커피를 사서 마시고, 차에 타서 오래된 영어권 국가의 밴드 음악 카세트 테이프를 튼다. 영화가 첫번째로 보여주는 히라야마의 출근 시 모습은 그가 별다른 오차없이 반복하는 출근 시의 행동 양식이며 별일이 없으면 히라야마가 쭉 유지할 습관이기도 하다.


히라야마가 알람 시계가 아니라 이웃의 빗자루질 소리로 잠을 깬다는 설정이 의미심장하다. 알람시계는 자기 자신을 더 이상 잘 수 없게 만드는 강제적 각성 도구다. 자신이 일어날 시간을 정하더라도 시계의 알람에는 어쩔 수 없는 타의적 성격이 있다. 회사에 출근하려는 목적으로 나 자신의 잠을 포기하게 하는, 본능을 자본주의에 복속시키는 행위다. 그러나 히라야마는 타인의 노동으로 자신의 노동을 시작한다. 노동과 노동은 연쇄되고 그것이 곧 사회적 신호가 된다. 종종 '톱니바퀴'라는 묘사로 개인의 노동은 하나의 부품으로만 치부되곤 한다. 한편으로 개인의 노동들은 어떤 식으로 맞물리며 나와 이웃의 삶을 돌아가게 하는가. 좀 더 미시적인 시야로 개인의 노동들을 이웃의 단위로 들여다볼 때, 작은 개개인의 노동은 우리 모두에게 책임과 보람을 부여한다.


그 이웃은 본인의 집 앞을 깨끗이 하려고 마당을 쓸 것이다. 그러나 그 노동의 효과는 그 거리를 지나는 모두가 누린다. 그리고 히라야마는 화장실을 청소하러 간다. 당신은 마당을 쓰세요, 저는 화장실을 청소하겠습니다. 나의 노동이지만 모두가 그 덕을 누리는 이 노동은 개개인이 차례로, 각자 이어간다. 그것은 대단한 일은 아니다. 그저 이웃집에서 싹싹 마당을 쓰는 소리로 스쳐갈 뿐이다. 그러나 그 소리가 청소노동자 히라야마의 하루를 깨우는 소리가 될 때 하루하루, 일주일, 어쩌면 오랫동안 이어질 삶의 양식을 결정하는 운율을 느낀다. 쓱쓱 소리가 나면 누군가는 잠에서 일어나 또 다르게 세상을 깨끗이 하러 집을 나설 것이다. 그리고 그런 그의 출근 소리를 들으며, 혹은 출근길을 향하는 자동차를 보면서 또 누군가는 다른 일터로 향할 것이다. 개개인의 삶과 노동은 하나의 연이다. 그 연은 또 다른 개인의 하루를 열어젖히며 수많은 삶들을 하나의 시로 엮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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히라야마는 도쿄의 화장실들을 청소한다. 그 화장실들의 디자인은 어딘지 모르게 미래적이다. 그보다 더 비현실적인 부분은 히라야마가 청소하는 화장실의 깔끔함이다. 모든 공공화장실이 말도 못하게 더럽고 오물들이 넘쳐나지는 않을 것이나, 영화가 보여주는 화장실의 모습은 청소 전에도 이미 충분히 깔끔하다. 히라야마의 동료 타카시도 화장실에 토해놓은 오물을 치우는 게 고역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관객은 그런 모습을 단 한번도 목격하지 못한다. 영화 속 히라야마의 노동은 어느 정도 환상적으로 묘사되어있다.


그 환상성에서 관객은 단지 배신감을 느끼면 되는 것일까. 혹은 영화의 미적 양식을 위한 타협으로 간주하면 되는 것일까. 먼저 그 환상성의 정치성을 생각할 수 있겠다. 그것은 다분히 상업적이거나 미추의 개념을 협소하게 타협한 것일 수는 있겠다. 그러나 노동의 본질 중 하나인 반복성과 지속성을 보다 중점적으로 들여다보기 위해서라면, 이 노동현장의 "표백"은 양식적 표현을 위한 다른 부분의 소거로 받아들일 수는 있겠다. 이 영화는 애초에 리얼리즘 영화가 아니다. 때로는 인위적으로 구성된 양식이 어떤 본질에 접근하는 지름길이 되기도 한다.


내가 더 중요하게 생각하는 '표백된 노동현장의 환상성'은 하나의 이상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것이다. 어떤 노동은 말 그대로 더럽고 냄새나고 꺼려지는 무엇이다. 그럼에도 어떤 사람들은 그 노동을 감내한다. 그것은 단지 구조적 열위로 떨궈진 자들의 피난처인가. 남들은 안하는데 다른 직업을 선택할 능력이 없는 사람들이 돈을 벌기 위해 그마저도 감수하는, 그런 지옥일 뿐인가. 영화는 히라야마의 성실성이 위태로워지는 구간을 후반부에 넣는다. 타카시는 느닷없이 그만둔다고 하고 2인 1조로 화장실을 청소하던 히라야마는 모든 작업을 혼자 떠맡는다. 반복되던 그의 일상성은 갑자기 깨지고 공원에서 샌드위치를 먹거나 목욕을 가는 장면들은 나오지 않는다. 오후에 퇴근하던 히라야마는 밤 내내 청소를 하고 쓰레기를 버린다. 영화 내내 과묵하던 히라야마는 격분해서 회사에게 이런 식으로 하면 자신도 일을 할 수 없다고 소리친다. 이후 타카시의 후임이 찾아온다. 히라야마의 일상은 다시 회복된다. 노동자가 그 반복을 감내할 만큼의 지속성과 적당한 노동량이 주어진다면, 그것은 '퍼펙트 데이즈'의 가장 큰 조건이 될 수 있다. 즉 히라야마의 화장실 청소는 그냥 더럽고 귀찮은 일이 아니라 그 더러움은 딱히 히라야마가 의식할 필요도 없는 삶의 일부분이다. 최소한의 휴식시간, 노동자가 하루하루를 영위할 만큼의 임금, 이른바 '워라벨'을 지켜지는 노동 환경 등이 있다면 더 많은 노동자들에게 어떤 일상은 늘 근사한 것이 될 지도 모른다. 아니, 최악은 아닐지도 모른다. ("사축"이라는 용어가 유행할 정도로 일본 역시 블랙기업의 노동자 착취가 심각하다)


[퍼펙트 데이즈]는 노동과 일상의 분배가 조화롭게 이뤄진 한 노동자의 삶을 보고 있다. 물론 이 영화는 이런 삶을 위해 투쟁하자고 소리 높이지 않는다. 그러나 어떤 환상적 묘사를 통해 그려진 안정을 직접 볼 수 있다면, 최소한 그 안정의 조건을 꿈꿔볼 수는 있을 것이다. 노동자로서 히라야마의 삶이 환상적이라면, 현실 속 (청소)노동은 어떻기에 우리는 그렇게 반응하게 되는 것일까. 이 상상력은 현실에 대한 유의미한 질문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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