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터로만 보던 그 시절 영화들을 극장에서 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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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대만 영화 기획전을 해서 [밀레니엄 맘보]를 봤습니다. "밀레니엄"이란 글자가 정말 너무 잘 어울리는 영화였습니다. 그 시절 유행했던 테크노 음악을 영화 속에서 듣는데, 그 당시의 멋모르는 흥분과 설렘이 제 안에서 고스란히 되살아나더군요. 그냥 그 시절 갖고 있던 퇴폐적 환상에 괜히 두근거렸습니다. 대만도 클럽음악에 대한 취향이 한국과 아주 다르진 않았던 것 같기도 합니다.


영화는 제 생각보다 훨씬 더 혼란스러웠습니다. 주인공 비키는 영화 속에서 테크노 음악을 들으며 쾌락을 누리는 듯 하지만 모든 게 헝클어진 일상이 훨씬 더 많이 나옵니다. 낮과 밤이 뒤바뀌어있는가 하면 나레이션과 영화 속 장면이 일치하지도 않습니다. 뭐가 뭔지 알 수 없는, 그러면서도 무언가에 끊임없이 취해있고 또 외로워하는 그런 감성이 딱 2000년대 초반의 낭만이라 괜히 반가웠습니다. 엔딩에 가서도 비키가 어떻게 행복해질지는 아무도 모릅니다. 오히려 비키가 그걸 원하는지조차도 알 수 없습니다. 그의 방황은 그가 행복을 정확히 쫓아나가기를 거부하며 자초하는 그런 느낌도 있습니다.


주관적이겠지만 현재 2020년대의 낭만은 훨씬 더 명확한 것 같습니다. 산더미같은 돈이 있어야 그게 낭만의 완결판이 됩니다. 2000년대 초반처럼 아련한 마음으로 헤매고 외로워하는 감성을 더 이상 낭만으로 추구하진 않는 것 같아요. 오히려 독기를 가득 채워서 누군가를 제끼고 생존해내는 그런 게 이 시대의 낭만처럼 느껴집니다. 절대 혼자 부숴지진 않습니다. 반드시 타인이나 세계를 부숴버리고서라도 살아남을 수 있어야 하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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멀지 않은 과거의 영화들이 다 향수를 일으키지는 않습니다. 96년도에 개봉했던 [비포 선라이즈]를 최근에 봤는데, 세월의 때가 좀 묻은 느낌이랄까요.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다른 영화들이 그렇듯 이 영화도 미국 20대 남성의 판타지 같은 게 묻어있습니다. 90년대 후반만 되어도 유럽을 포함한 다른 나라 여행은 조금 더 특별했죠. 유럽을 비롯한 타국 여행이 많이 일상적으로 되어버린 2020년대의 한국인 관객으로서는 어쩔 수 없이 조금 더 거리감을 두고 보았습니다. 저는 유럽여행이나 해당 국가들에 대한 이미지가 어느 정도는 1세계 백인들의 브랜딩에 기인한바가 크다고 여겨서... 사실 이런 의식이 거의 없던 어렸을 때도 유럽에 대한 환상은 없었던 것 같아요. 이건 아마 여행이라는 행위를 해당 지역에 대한 지식이나 보다 선명한 동경이 있어야 한다는 저만의 견해 때문일수 있습니다.


이 영화를 제 때 보았어도 저는 크게 공감을 못했을 것 같습니다. 그건 제가 개인적으로 영화 속의 에단 호크를 그렇게 매력적으로 보진 않아서인 것 같아요. 제 개인적인 청춘 로맨스 영화는 [사랑보다 아름다운 유혹]인데, 라이언 필립의 대놓고 껀들껀들한 그런 접근보다 약간 맹하면서 수다스러운 에단 호크의 접근은 음... 이런 건 또 아시안의 로컬한 시야일지도 모르겠습니다. 사실 이 영화의 매력은 두 배우의 외모에 기인하는 바가 아주 크다고 생각해요. 성적 매력이라는 게 어쩔 수 없이 그런 부분이 있지만요. 


또 개인적으로는, 약간 비슷한 경험이 있어서 그런 것 같기도 합니다. 예전에 교회 다닐 때 동갑내기 친구에게 호감이 있었는데, 그 친구가 토요일 밤에 전화해서 나 이제 춘천간다~ 하면서 자랑하더라구요. 그 날 죽을 끓이고 있었는데 뭐! 나도 데려가! 하면서 가스렌지 불만 끄고 바로 영등포 역에 가서 그 친구랑 무박 2일 여행을 갔었어요. 그 친구도 엄청 어이없어하면서도 흔쾌히 수락해서 그렇게 춘천을 갔는데 뭔가 몽글몽글한 느낌으로 남아있습니다. 그런 면에서 [비포 선라이즈]는 저에게 너무 예쁜 이야기같기도 합니다. 


개봉 당시로부터 몇십년이 흐른 후의 청춘영화는 꼭 같은 느낌으로 보는 사람의 젊은 시절을 상기시키지는 않는 것 같습니다. 어떤 작품들에서는 자신을 보거나 자신을 찾는데 실패하기도 하네요. 앞으로도 재개봉 기획은 계속 이어질테니 이런 경험들도 더 다층적으로 쌓이지 않을까요.

    • 저도 비포 시리즈 중에 선라이즈는 크게 모르겠고 선셋과 미드나잇은 좋았습니다. 뒤의 둘 중에서도 낭만성과 현실성에서 적절한 중간 위치라고 할 수 있는 선셋이 조금 더 좋았었나 그랬어요. 비포 선라이즈는 말씀에 동의하는 바가 많네요.ㅎ 

      • [비포 선셋]도 재개봉을 한다고 하니 그 때 또 어떻게 다가올지 기대해봐야겠네요ㅎㅎ 저는 하필이면 이 시리즈를 [비포 미드나잇]부터 봐버려서... 말씀하신 현실성이 어떻게 혼재되어있을지요.


    • 글 잘읽었어요. 감사합니다. 그때 쯤 [비포 선라이즈] 보았는데 그게 런던이었어요. 한글자막 없이요 :) 감독 회상으로는 아마 이 영화 12일만에 찍었을거여요. 


      시간이 그렇게 밖에 없었다나봐요.


      기억이 맞다면 나머지 두편은 배우들과 토론해서 시나리오를 썼데요. 당연히 크레딧에 올렸어요. 우리나라 감독들은 그렇게 안하더라고요.


      저는 남자든 여자든 '안전한' 사람과 장소에서만 만나요. [블레이드 러너]에서 해리슨 포드가 션 영에게 전화해서 나오라고하자 


      그런 동네는 싫다고 말하는 것처럼요ㅎ


      • ㅎㅎ [블레이드 러너]의 데커드 동네는 정말 누구라도 만나기 싫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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