멀티버스라는 설정
어제 서울아트시네마에서 하는 유운성 평론가의 비평에 대한 강의를 듣고 왔습니다. 강의는 재미있었는데 제 육신이 노곤을 이기지 못하고 쓰러져버려서 잠이 깰 때는 겸연쩍더군요. 그래도 후반부에 영화평론가를 영화 작품이나 감독에게 종속된 직업군인 것처럼, 모더레이터로 활용하는 지금의 기조에 대해 비판조로 말씀하시는 게 꽤 와닿았습니다. 비평은 현재 여행지가 사라져버린 기행문처럼 영화가 없더라도 읽을 수 있는 종류의 글이 되어야하지 않나 하는 생각도 신선했습니다.
유운성 평론가의 강연 중 제일 흥미로웠던 것은 멀티버스에 대한 이야기였습니다. 스필버그의 [파벨만스]를 이야기하면서, 이 영화는 최근의 멀티버스 서사에 당황하는 것처럼 느껴졌다는군요. 스필버그는 본인이 제작에 참여했던 [백 투 더 퓨처]의 타임머신이나, 직접 감독했던 [캐치 미 이프 유 캔]의 위조 개념으로 정작 본인이 지금의 멀티버스 세계관의 창시자 같은 사람입니다. 어딜 가도 자신과 같은 자신이 있고 과거를 가든 미래를 가든 계속 '지금, 여기'라는 현재성을 느끼게 된다는 그 설정이 지금은 독립영화에든 상업영화에든 너무 당연하게 자리잡고 있어서 그걸 낯설어한다는 것입니다. 멀티버스 설정에서는 "돌이킬 수 없는"의 설정이 크게 먹히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다른 세계의 현재로 슉 가버리면 되니까요.
듣고보니 저도 저런 감각을 [어벤져스: 엔드게임]을 볼 때 느꼈던 것 같습니다. 살아남은 어벤져스들이 머리를 맞대고 내놓은 해결책이 멀티버스였죠. 그걸 보면서 좀 얍삽하다고 느꼈습니다. 죽음이란 사건의 가장 강력한 점은 절대로 되돌릴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영화의 러닝타임 안에서 일어난 일도 아니고, 심지어 전편에서 벌어진 죽음이란 사건을 어쩔 수 없이 납득한 관객들에게 '다른 세계로 가면 되지!'라고 하는 게 이 세계의 불변의 법칙을 함부로 건드리는 느낌이 들었습니다. 픽션이라는 것이 종종 비현실적인 초월적 법칙을 제공해서 쾌감을 제공하는 것이긴 합니다만 모든 불행과 슬픔조차도 간단하게 무위로 돌릴 수 있는 이 세계관에 대해서는 뭔가 좀 의구심을 품게 됩니다. 글쎄요, 그게 그렇게 뚝딱 이뤄지는 일일까요.
멀티버스 안에서는 뭐든지 가능합니다. 모두가 바라는 성공과 행복은 물론이고 꿈도 꾸기 싫은 실패와 비참까지도 겪을 수 있습니다. 그야말로 체험의 전능함을 부여하는 이 세계관 안에서 우리가 깨닫는 것은 과연 현재, 이 곳의 나 자신일까요. 혹은 벌어지지 않은 세계를 근거로 들면서 무한한 가능성에 홀로 취하는 것일까요. 수천만의 세계 중에서 하나뿐인 세계라는 이 관념이 우리에게 어떤 감각을 부여할지 좀 의심스럽습니다. 유운성 평론가는 이 멀티버스를 오가는 느낌이 포르노 서칭과 유사하다고 지적했는데(유운성 평론가 본인이 제시한 개념이 아니라 이미 서구 평론가 쪽에서 나왔던 지적이라고 합니다) 그런 식의 유물론적 감각이 우리의 픽션세계설정도 바꾸는 것 같습니다.
모티 앤 릭 나중에 한번 봐봐야겠군요 시간이 날 지 모르겠지만...
앗, 다시 찾아보니 [릭 앤 모티]였네요. 바꾸지 않고 놔두겠습니다. (창피)
과거는 변합니다 보는 방식이 달라진다는 게 아니라 그냥 달라집니다 만일 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그냥 그 개인이 과거에 얽매이기 때문입니다
마블 영화들은 관객을 너무 안전하게 위치하게 해요. 그건 그것대로 좋지만 너무 그것만 있어도 안되겠죠.
다 한 때가 아닌가 합니다.
그쵸. 그냥 외전 같은 이야기인데 본편에서 하나의 창구로만 이용해버리는 건 뭔가 소모적이면서 전혀 멀티버스스럽지가 않죠. 그래서 어제 유운성 평론가는 멀티버스가 멀티버스가 아니라 울트라버스가 아닌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더군요.
다중 우주라는 게 충분히 재밌게 써먹기 좋은 소재이긴 한데 요즘 마블의 멀티버스는 뭔가 고갈된 아이디어를 극복하기 위한 꼼수 같아서요. '노 웨이 홈' 같은 식으로 한 번 아주아주 알차게 써먹고 넘기면 좋은데요. 다음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도 또 멀티버스인 것 같고... 미리 질려 버리는 느낌입니다. ㅋㅋ
다음 스파이더맨 애니메이션은 마블과는 큰 관련이 없습니다 ㅎㅎ 어떻게 보면 그 작품이 멀티버스를 훨씬 더 진지하게 다루고 있다고도 느껴져요. 그림체까지 완전히 다른 캐릭터들이 나오는 게 정말 애니메이션에서만 구현가능한 멀티버스같더군요 전 그 스파이더맨은 기대 중입니다... (평론가님도 앞으로 스파이더맨은 이제 돌아오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말하더군요 ㅎㅎ)
편의에 따라서 자신이 살고 있는 세계만이 유일한 것이 아니라 자신이 존재하는 또 다른 세계로 넘어갈 수 있다는 개념으로 이해해주시면 되겠습니다. 유운성 평론가가 [백 투 더 퓨처]가 시간여행물인 걸 몰라서 그렇게 설명한 게 아닙니다. "돌이킬 수 없음"의 개념이 점점 무효화되어가는 영화적 세계관에 대해 설명하려는 의미입니다. 그 기준이 차원이 됐든 시간축이 됐든, 영화의 주인공들이 갑자기 다른 세계로 가버리면서 뭔가를 뒤바꾼다는 그 개념 자체가 영화 속에서 빈번하게 일어나고 있다는 걸 이야기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