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래된 친구와의 권태

며칠 전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가 깜짝 놀랐습니다. 전화를 건지 3분만에 바로 끊고 싶어졌거든요. 지금 뭐해, 라는 안부를 건넨 뒤 할 말이 전혀 떠오르지 않았습니다. 할 이야기가 없던 건 아닙니다. 오래간만에 중학교 동창 친구들을 만나서 유자 사케도 먹었고 제가 또 요 며칠 사이 연극도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할 수가 없었습니다. 응, 재미있었겠네~ 라는 대답으로 그 소재의 대화가 뚝 끊길 걸 알았기 때문입니다. 


제 친구는 좀 특이한 편입니다. 취향적으로 추구하는 게 아무 것도 없습니다. 이 부분에서 그는 저와 완전히 정반대의 타입입니다. 저는 영화 보는 것도 좋아하고 전시회 가는 것도 좋아하고 또 뭐가 됐든 감상에 대한 이야기를 하는 것도 좋아하는데 이 친구는 그런 게 아예 없습니다. 그래서 십몇년째 그의 여가를 늘 물어보곤 했습니다. 일 끝나면 뭐해? 일 안할 땐 뭐해? 그럼 그는 웃으면서 그냥 쉰다고 하거나 유튜브를 본다거나 티비 프로그램 같은 걸 본다고 합니다. 제가 확신하는 그의 유일한 시간소비는 일요일에 교회를 가는 것입니다. 이렇게 써놓고 보니 그는 증기기관이 발명되기도 전의 유럽에 사는 사람인 것 같은데, 그는 진짜로 그렇게 삽니다. 심심하다는 것을 큰 불만거리로 여기지 않고 하루하루를 보내는 타입의 사람입니다.


그의 이런 성격은 인간관계에도 비슷하게 적용됩니다. 남이 뭘 하거나, 남과 뭘 하는 것에 큰 관심이 없습니다. 저도 맛집을 찾아다니는 유형은 아닌데, 그래도 이 친구를 만날 때만큼은 꼭 맛집을 찾아서 가곤 합니다. 안그러면 정말 아무데나 가거든요. 한달 혹은 두달 텀으로 만났는데 아무 체인점에나 가기 싫은 제 마음을 그는 잘 이해하지 못합니다. 어딜 가도 다 적당히 맛있고 또 잘 먹습니다. 이렇다보니 이 친구를 만나서 뭘 하려는 제가 좀 바보같을 때가 있습니다. 별 감흥을 느끼지 못할 게 뻔한 사람과 왜 도전거리를 찾아야하는 것인지 의문이 듭니다. '아무거나', 혹은 '그냥 적당히'로 다 끝나버리는 그의 무던함에 좀 지쳤다고 할까요. 전에 슬램덩크를 같이 보고 나서 그의 감상을 물었더니 '재밌네'였습니다. 


그동안 우리는 무슨 이야기를 했나 돌이켜보니 각자 인생에 닥친 불행을 제일 많이 이야기하고 있었습니다. 그가 겪은 괴상한 상사, 부모 혹은 가족과의 트러블, 아팠던 몸, 교통사고... 그래도 저는 최근 일신상의 변화가 몇개 생겨서 그에게 즐거운 이야기를 할 수 있었습니다만 그는 저에게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준 게 없습니다. 물론 제가 시기적으로 더 좋은 때라면 그에게 이것저것 더 제시를 하면서 함께 즐거운 시간을 인도할 수 있겠지만, 좋을 때나 안좋을 때나 그 인도를 늘 제가 해왔습니다. 제가 아무런 제안도 하지 않으면 만나서 그냥 밥을 먹고 차를 마신 뒤 빠이빠이입니다. 하는 이야기도 늘 똑같습니다. 몸은 점점 안좋아지고 새롭게 축적된 것도 없습니다. 만날 때마다 뭔가 관습적으로 반복되는 걸 막기 위해 저 혼자 이렇게 열심히 고민하고 새로운 즐거움을 찾으려 애를 써야한다는 게 이제 좀 지쳤습니다. 만나든 안만나든, 사는 건 결국 똑같이 흘러갈텐데요. 


권태라는 감각을 처음으로 경험하게 되어서 놀라고 있습니다. 좀 웃기게도, 오래된 부부 중 어느 한 쪽이 이래서 이혼을 결심하는건가 하는 생각도 들었습니다. 모든 대화가 그저 일신의 생존과 평안에만 안착해있고 이야기의 하이라이트는 불행에 집중됩니다. 그러니까 불행이 없으면, 대화거리가 없어져버리는 사이입니다. 분명 어떤 분은 시간이 지나면 또 괜찮아질거다, 이야깃거리가 생길거다 라고 위로를 해주시겠지요. 저도 어느 정도는 그렇게 믿습니다. 그럼에도 이 글을 쓰는 건 저와 그 친구 누구도 잘못하지 않았는데, 이 관계가 그저 시간에 마모되어서 더 이상 갱신이 불가능하겠다는 어떤 각오를 하게 되기 때문입니다. 누구를 탓할 것도 아니고 그저 축적되어온 삶의 나이테가 이제 다른 방향과 모양으로 완전히 갈라져버린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 다른 사람들과 만날 때는, 뭐라도 재미있는 "액션"을 공유할 수 있어야겠다는 생각만 합니다. 

    • 친구와 가까워지고 싶기도 이제 그만 노력하고 싶기도 한 마음이 잘 이해가 되고 있습니다. 저도 친구와의 경험이 떠올랐습니다. 참 좋아했던 친구거든요. 지금은 연락도 안 하고 살지만요... 많은 기억들이 있어서 마음 구석엔 자리하고 있습니다. 그 친구도 한 시절을 보낸 기억 때문에 저와 비슷하지 않을까 믿고 있어요. 


      일방이 노력한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습니다. 친구가 소중하면 소중한대로 어떻게든 잘 풀리지 않을까 싶어요.



      • 오래된 연인이 이래서 헤어지는건가 했습니다. 이게 좀 슬프더군요. 앞으로 이 관계에서는 어떤 자극도 얻을 수 없겠구나 하는 걸 직감했달까요. 가끔은 그 친구가 답답하기도 한데 그게 그 친구가 인생을 사는 방식이니 제가 바꿀 수는 없죠. 저를 만날 때마다 오히려 무리하고 있는지도 모르고.


        다만 모든 게 고갈되어버린 듯한 이 느낌을 다른 어떤 사람에게서도 느끼고 싶진 않아졌습니다. 만약 부부나 연인 사이에서 이런 밑바닥을 맞닥트린다면 정말 당혹스러울 것 같아요. 앞으로 그 친구와는 연락의 텀을 조금 늘리려고 생각 중입니다. 어차피 전화도 제가 더 자주했고 하니... 다음에 오랜만에 만나더라도 잘 살아? 건강해? 일이나 인간관계는 문제없고? 하는 일상체크로 끝나겠죠 이게 뭔가 너무 힘이 듭니다. 그 친구가 나쁜 건 아닙니다. 그냥 세상사에 흥미와 관심이 없는 그 본인만의 기준을 저한테도 투영하는게 좀 견디기 힘들어졌어요. thoma님 말씀대로 다 잘 풀렸으면 좋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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