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사는 침묵했다' 읽고 잡담.

하인리히 뵐(1917-1985)의 200페이지 정도 길이의 소설입니다. 

이 작가의 소설은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1953)'와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1975)'가 더 많이 알려져 있는 것 같습니다. '천사는 침묵했다'를 읽고 나니 앞의 두 책도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듭니다. 중고생 때 서점에서 책 제목을 보면서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가 무슨 내용의 책일까 궁금해 했던 기억이 납니다. 제목이 근사하니까요. 그 후에 이분 책은 안 읽고 전혜린의 같은 제목 수필을 읽었네요. 전혜린이 1955년에 독일 유학을 갔다고 하니 독일에서 뵐의 책을 만나지 않았을까 싶네요. 전혜린의 책 제목은 본인이 붙인 것은 아니지만요.


'천사는 침묵했다'의 주인공 한스는 작가 하인리히 뵐의 2차대전 징집과 전쟁 경험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인물입니다. 뵐 작가가 무의미한 전쟁에서 벗어나기 위해 실제로 부상을 당하기도 했지만 꾀병도 부려서 입원하고 탈영 시도를 여러 번 했다고 합니다. 소설 속의 한스 역시 탈영으로 잡혀 총살 직전 어떤 이의 도움으로 도망을 치는데 곧이어 독일이 항복하게 됩니다. 폐허가 된 고향에서 굶주림에 시달리며 돌아다니는 한스가 만나게 되는 몇 명의 인물들로 패전 직후의 독일 상황을 눈에 보이듯 그리고 있습니다. 그 독일 상황이라 함은 실제로 보이는 무너진 건물과 쓰레기로 뒤덮인 장소라는 뜻도 있지만 어느 나라에든 있는 그때그때 권력과 재력에 의지해 쥐새끼 같이 살아남아 자신을 세탁해 나가는 인물까지 포함한 한 사회의 전형적 인물 구성의 상황이라 할 수 있습니다. 이 인물들의 전형성이 은근하게 적절하게 잘 표현되어 있었습니다. 전시를 틈타 부를 더욱 축적하는 인간이나 이런 인물을 비호하는 종교 권력, 죽어가는 사람들 곁을 지키는 의사나 사제도 있으나 죽어가는 사람을 의학연구의 재료로만 보는 의사도 있고요, 목숨을 걸고 부패한 기득층에 저항한 이도 있고 안과 밖이 다 피폐하였음에도 서로 의지하게 되는 남녀도 그려지고 있습니다. 


비참함의 직접적인 전시로 과잉스러운 작품은 아닙니다. 소설 전반에 걸쳐 피로와 슬픔으로 인해 낮은 톤을 유지한다고 할 수 있으며 수시로 서정적이라는 생각이 들곤 했습니다. 과거 회상에서 동원되었던 나무와 안개 사이의 가스등 불빛의 번짐 같은 묘사는 헤르만 헤세, 루이제 린저 같은 어릴 때 접했던 독일 문학 이미지를 떠올리게도 했고요. 

작가 사후 출간되어 재검토가 완전하기 어려웠는지 읽다 보면 앞뒤 내용이 충돌하는 부분이나 덜 다듬은 듯한 느낌이 들 때도 있었지만 소설은 아름다웠고 또 한 명의 작가를 알게 되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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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는 아주 옛날 의식 있는 대학 선배들이 신입생 '스터디' 시킬 때 교재였어요.


      당연히 저도 읽었던 기억이 나요. 에리히 프롬의 <소유냐 존재냐>가 금서였던 시절이죠.




      글 잘읽고있어요. 항상 감사합니다.


      • '소유나 존재냐'도 금지된 적이 있었군요. 


        다른 얘긴데 하인리히 뵐이 김지하가 수감됐을 때 구명 활동을 했다고 합니다.


        제가 감사합니다.ㅎㅎ

    • '카타리나 블룸의 잃어버린 명예'는 작년에 제가 볼까 말까 재생 버튼 누를까 말까 50회 정도 고민하다가 결국 아직 안 본 영화이기도 합니다. ㅋㅋ 영화도 잘 만들었는지 평은 아주 좋았어요.

      • 검색해 보니 폴커 슐렌돌프 감독의 75년작이 있는데 지금은 볼 수 있는 곳이 없는 것 같은데요...

        • 그게 그 망해 없어진 서비스 '시즌'에 있었습니다. ㅋㅋㅋ 그래서 서비스 종료 직전에 제가 시즌에 있는 이상한(?) 영화들 골라서 막 달렸거든요. 그때 후보만 넣어두고 결국 못 봤어요. 하하; 근데 시즌에 있었으니 올레티비에는 있을 것 같기도 한데... 애들 잠들면 한 번 확인해봐야겠네요.

    • 우크라이나와 러시아의 전쟁 때문에 요즘 읽으면 더 와닿을 것 같은 책이군요. 전쟁이란 현상 속에서 언어의 무력함을 겪은 사람이 쓰는 글은 어떨지 궁금합니다
      • 개인이든 국가든 전쟁을 통해 이익을 취하려는 걸 보면 인류가 발전하는 것 같지가 않습니다.


        독일에선 2차대전 직후의 이런 작품들을 '폐허 문학'이라고 부르는 것 같은데 그래도 의지할 것은 글쓰기뿐이었던 사람들이 많았지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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