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포) 유령을 만나는 사람들

최근 들어 <태어나길 잘했어>, <스펜서>, <앵커>를 봤습니다. 이 영화들은 각기 톤도 다르고 결말도 다르지만 주인공들이 전부 다 유령을 만납니다. 그들은 유령을 만나고 고통스러워합니다. 유령은 고통스러운 과거를 상기시키는 현상이면서 그 현상이 전혀 치유되지 않았음을 가리키는 현재의 증상이기도 할 것입니다. 누군가는 이 유령을 의학적으로 트라우마가 도져서 개인에게만 보이는 환영이라고 진단할 수 있겠지만, 입장을 바꿔서 생각해본다면 그 유령들은 한 개인의 세계를 완전히 잠식해들어가는 압도적인 의식적 점령이기도 할 것입니다. 내가 나여야 하는데 내가 나일 수 없을 때, 그 고통은 초자연적으로 승화해서 또 다른 자신을 만들어냅니다. 이런 경우 단순히 약이나 상담으로 증상을 호전시키긴 어려울 겁니다. 왜냐하면 과거와 현재가 해결되지 않았으니까요. 상처는 오랫동안 자신을 따라다닙니다. 그 풀리지 않는 울분과 원한은 과연 해소될 수 있는 것인지.


유령이 악령이라면 우리는 그것을 쫓아낼 수 있을 겁니다. 굿이나 구마의식을 통해서 그 외부적 존재를 자신의 영역 바깥으로 밀어내고 본연의 공간을 점유할 수 있겠죠. 그러나 저 세 영화 속의 유령은 전부 다 내면에서 빚어진 것들입니다. 이 경우 인간은 유령과 싸울 수 있을까요. <태어나길 잘했어>에서 주인공 춘희는 유령에게 독설을 퍼붓습니다. <스펜서>에서 다이애나는 계단에서 투신을 하며 정신적 자살을 꾀합니다. <앵커>에서는 전문의의 힘을 빌려 자신의 상처를 대면합니다. 어떤 식으로든 모질고 지독한 에너지를 발휘해서 그 유령으로부터의 탈출을 도모합니다. 유령이 또 하나의 자신이기 때문에 단순히 꺾어서 이겨내는 대상이 아니라 동시에 포용하면서 인정해야하는 대상입니다. 이 부분이 참 역설적이죠. 유령을 유령으로 인정할 때, 자신이 유령을 보고 있고 그와 함께 있다는 것을 인지할 때, 유령을 자신이라고 납득할 수 있을 때 비로서 앞날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이 세 영화 중 어느 영화도 극복과정은 만만치 않습니다. 여자들은 다 죽을뻔한 고비를 넘기구요.


어쩌면 유령을 맞닥트리는 그 상태야말로 전환점에 와있다는 신호이기도 할 것입니다. 시달려온 시간이 얼마나 오래되었든 눈앞에 괴이의 형태로 출현한다는 것은 이들이 사라질 수도 있다는 또 다른 희망이니까요. 그렇다면 역으로 현실적인 질문이 따라붙습니다. 유령을 보지 못하는 우리는 유령을 인지하지도 못하는 상태로 평생을 살아가는 것이 아닐지. 춘희, 다이애나, 세라 이 세 인물은 모두 행복하고자 원하면서 자신의 죄를 무의식적으로나마 인지하고 있는, 선량한 이들입니다. 선한 이들이 유령을 봅니다. 자기 자신에게 혹독한 사람들은 과연 유령을 볼까요. 혹은 죄의식이 없을만큼 얇고 평면적인 사람들이 과연 유령을 볼까요. 모든 유령 영화가 유령과 작별하거나 함께 하는 엔딩을 가지고 있다면 현실의 이야기는 훨씬 더 재미없고 섬뜩한 것일지도 모릅니다. 유령과 함께 살면서도 남의 유령을 걱정하는 관객들인 우리는 과연 안녕하기는 한 것인지.



    • “귀신은 뭐 하나, 저 놈 안잡아가고!”라는 말의 귀신도 실제로는 자기 죄의식이 만든 존재가 아닐까 싶네요. 그러니 진짜 나쁜 사람은 귀신도 안보이는거겠죠.
      • 오 그걸 죄책감으로 해석할수도 있겠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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