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 루이 바로와 빈대떡 궁합

어머니가 오랜만에 점심에 빈대떡을 부쳐주셨습니다. 녹두 불려 갈아서 집에서 담근 배추김치 잘게 썰어넣고 간 돼지고기 넣어 부치는 우리집 빈대떡은 이웃들이 접시들고 동냥하러 올 정도로 맛있어요. 간만에 뭘 좀 먹으면서, 아주 오랜만에 장 루이 바로의 [천국의 아이들 Les Enfants du Paradis]를 봤습니다. 마르셀 카르네의 작품이죠.

난데없이 아버지가 그 영상을 띄웠어요. 우리나라에는 [인생유전]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됐는데, 삼류 극단의 애환을 그린 이 대작에서 바로는 작품 초반의 판토마임 역을 예술적으로 연기해서 전설이 되었습니다. 바로를 세상에 알린 작품으로 지금도 영화평론가들이 세계 10대 명화를 꼽을 때 언급하더군요. (우리 아버지도.)
유튜브에서 찾은 [천국의 아이들] 4분짜리 영상. https://www.youtube.com/watch?v=jsL8V6k79lg&t=1s

오래 전, 연극배우로 출발해서 끝까지 연극배우로 살다 간 그의 인터뷰를 본 적이 있습니다.  왜 연극을 시작했는가? 라는 질문에 "인간을 사랑하기 때문이다. 사람들의 파트너가 돠고 싶었다. 연극은 곡마단처럼 유랑하는 것이다" 고 답한 게 기억나는군요. 
그가 좋아하는 작가는 이오네스코, 사뮈엘 베케트, 장 주네, 마르그리트 뒤라스, 물론 세익스피어도.  (다 제 취향이라 기억함.)
로렌스 올리비에와는 형제처럼 지냈고 존경한다고 했습니다.

3시간 넘도록 그의 연기를 보는 동안 빈대떡을 두 장이나 먹었더군요. 끝나자 아버지가 평하셨습니다. 
"저런 배우가 시인이지. 너는 시가 뭐라고 생각하냐?"
- 재능을 자신의 작업에 바친 사람만이 시인은 아니죠.  그리고 어느 한쪽이 막히면 둘 다 끝날 위험이 커요.
제 답에 삐죽이는 아버지에게 읊어드린 시 한 편.

-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 김종삼

누군가 나에게 물었다. 시가 뭐냐고
나는 시인이 못 됨으로 잘 모른다고 대답하였다.
무교동과 종로와 명동과 남산과
서울역 앞을 걸었다.
저녁녘 남대문시장 안에서
빈대떡을 먹을 때 생각나고 있었다.
그런 사람들이
엄청난 고생되어도
순하고 명랑하고 맘 좋고 인정이
있으므로 슬기롭게 사는 사람들이
그런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알파이고
고귀한 인류이고
영원한 광명이고
다름 아닌 시인이라고.
    • 헉 넘사벽 가족이군요.


      빈대떡 잘 부치시는 어머님, 시와영화를 주고받는 부자/부녀라니

      • 음식이란 게  만드는 사람 (대개 여성) 에겐 필요악이지만 그래도 누구나 자신 있는 요리가 있잖아요. 
        우리 부녀의 대화는 이상적으로 마무리되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가정의 위계질서를 안 지키고 주로 제가 트집을 잡기 때문이죠. ㅋ 그래도 영화와 문학 얘기는 줄기차게 나누며 지내요. 논쟁하는 재미가 있... 

    • 처음에 스웨덴에 왔을 때 머물렀던 학교에 영화를 너무나 사랑하시던 한 선생님이 고전이랑 고전은 다 비디오로 녹화해 학교에다 기증하셨던게 있었어요. 학생들없던 겨울방학에 와장창 빌려서 학교 건물(원래는 대저택이었어요) 다락방에서 보았던 기억이 나는 군요. 


      작년에 우연히 만난 그 학교 영화 클럽 선생님이 그때 이야기를 하면서 저처럼 고전 영화를 숙제하듯이 보던 학생은 또 없었던 거 같았다고 했던 말도 기억합니다.  정말 멋있는 영화였어요



      • 선생님 복이 있으셨네요. 책이든 필름이든, 음악이든 '고전'은 집에 비치만 해두지 안 보는 거라고 꼬집는 사람들이 있는데 고전을 즐길 수 있는 환경을 제공하셨어요. 흑백영화는 추상적이지 않으면서 설득력과 호소력이 있죠. 

    • 지금은 몇번 먹고 말지만 전엔 항상 빈대떡이 적었어요 적을 때가 좋은게 인생이라니,


      저도 시인하고 생각이 같아요. 어디님이 그렇게 말하니 나도 시인

      • 그렇다니까요. 가영님은 시집 안 내고 해탈해버린 시인? ㅎ
        세상에는 생활하는 자세로 시를 제압해버리는 분들이 많습니다. 
    •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다른 영화들이 있어서 헛갈리더라고요. 물론 이쪽이 오리지널이고, 여기서 paradis는 입장료가 싼 극장 꼭대기층 좌석을 의미하기도 해서 중의적인 제목이라고 들었습니다. 영화 초반에 극단주가 이 천장 좌석에 빼꼭이 들어선 하층민 관객을 가리키면서 이들이 진짜 공연을 이해하는 관객이라는 대사가 있었던 것 같아요. 

      • 평론가 중에는 이 영화를  '천장꼭대기의 사람들'이라는 제목으로 칭하는 분들이 있죠. 
        <천국의 아이들>이라는 제목의 영화가 어떤 게 있나 검색해봤어요. 99년에 나온 이란 영화가 있네요. 아카데미 외국어 영화상 후보에도 오르고 다른 영화제에서 상도 많이 받았군요.  한국영화도 있고요. 박흥식 감독 작품.
        그저께 이 작품을 다시 본 후, 아버지가 제게 한 자랑이, 바로가 만든 극장  테아토르 도르세에서 그가 연출한 폴 클로델의 5시간짜리 공연 <사틴의 신발>을 봤다는 거였어요.  관객이 극장 통로와 계단까지 넘쳐날 정도로 인기 많았던 작품이었다고. -_-

    • 빈대떡이 은근 만들기 어려운 음식이죠. 빈대떡과 천국의 아이들이라니.

      20대때 라탈랑트보고 순대국에 밤새서 막걸리 마셨던 밤이 생각나요.

      • 물의 영화를 보면서 뽀얀 술을 드셨구먼요. - -  장 비고와 다른 세대라 다행히 우리는 L'Atalant를 오리지널에 가까운 복원판으로 보게 되었죠. 물, 눈, 안개, 밤하늘이 내던 분위기를 아직도 기억합니다. 
        이상한 감정이지만 저는 비고처럼 서른 전에 요절해버린 이들에 대한 질투가 있어요. 그의 재능과 열정에 대한 것보다 더 커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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