후배들에게 일장 연설한 후
어제, 은사님 부탁으로 까마득한 후배들과 이야기를 나누게 됐습니다. 그런 만남을 가질 때마다 드는 생각은 이게 대체 그들에게 무슨 도움이 될까 하는 것입니다. 제가 살아온 이력이 그들에게 별 도움이 안 되는 건 물론, 누구라도 한 인간의 삶이 다른 삶에게 어떤 의미를 가져다줄 수 있을까라는 의문을 저는 기본적으로 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미를 담아 대화를 시작했더니 한 후배가 대화 후 그러더군요. "선배의 삶에 동의하지는 못하더라도 깊이를 알 수 없는 심연은 돌아보게 만들었다"고요. 제가 씨익 웃으면서 되받았죠. '자기 심연에 바탕을 두지 않은 타인의 경험은 마약처럼 허망한 거에요'
뭐, 누군가의 경험담은 이 세상에서의 삶이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에 대한 정보를 얻게는 하겠죠. 타자가 확 그어댄 성냥불/라이터의 불빛을 보는 것 같을 테니까요.
어릴 때, 어머니는 저에게 아무일도 시키지 않으셨어요. 뭐만 하면 반드시 다치곤 했으니까요. 동생들이 뭘 부탁하면 "누나 다쳐~" 라며 과잉보호하셨죠. 그 지나친 보호는 정신적으로 제가 어린아이라는 느낌을 갖게 했습니다. 그래도 저는 동생들 팬티까지 다 다리미로 다려서 입히고 학교밥 안 먹게 도시락 싸줬습니다. 대단했죠. 잘 못해도 포기는 모르는 타입이거든요.
누가 누구에게 (더구나 선배 따위가) 구원의 대상일 수는 없다고 생각합니다. 그래도 어제 나눈 대화를 두고 후배 두 명이 메일을 보내왔네요. 어제 나눈 대화로 삶의 구조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었다고요. 덧없는 삶에서 가끔 이렇게 삶에 대한 사랑의 단서를 찾아내는 이들이 저는 부럽습니다. 인사치레 말이라고 할지라도요.
'다치기 일쑤'였는데 어디로갈까님 직접 다리미로 다려서 입혔다굽쇼?
'다치기 일쑤'가 아니라 '처음해본것'에서 다치기 일쑤였다는 거 아닌가요
한사람의 인생은 그냥 역사책이나 소설같은거죠.
누군가에게는 인생을 뒤바꿀 수 도 있는 스토리가 되기도 하지만
또 누군가에게는 여가시간보내기가 될 수도.
열심히는 하는데, 그런 일이 아직도 익숙하지는 않아요. 팔에 데인 자국, 손가락은 칼에 베인 상처, 계단에서 잘 굴러서 다리는 멍투성이... 그런 형편입니다만 동생들 대학가기 전까지는 많이 공들였어요. 그래야 어쩐지 바르게 성장할 같은 강박증이 있었죠. 오죽하면 어머니가 너 유난떠는 것 보면 나는 계모인가?라는 착각이 들 정도라고 한숨쉬셨을까요.ㅋ
그리 열심히 살아야 아주 사는거죠 시간을 적는 페이지에 쓸 때만 자신가 타인의 공간을 느끼니 또 페이지를 넘겨 다시 쓸 땐 앞페이지 다 잊어요 어디로님은 잘 타고나신편이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