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질을 못 이기고 횡설수설

난생 처음  큰 독서대를 구입했습니다. 아크릴 제품으로 사진으로 보니 제법 청순 단정함을 뽐내는 물건이더라고요. 요즘 배송 시스템에 맞지 않게 닷새나 걸려서 왔기에  반가운 마음에 퇴근하자마자 허겁지겁 조립에 들어갔습니다. 차분히 설명서를 따라했는데, 아니 이것이 자기 모양을 바로 갖추지 못하는군요. 

저는 기계치가 아닙니다. 기계를 좋아하고 역학적 사고도 순조로운 편이에요. 웬만한 기계는 설명서 안 보고도 뚝딱 조립해서 주위의 부러운 시선을 받기도 합니다. 근데 이 간단해 보이는 물건이 뭐라고 저를 십오분 째 시험하는 겁니까.
개인마다 최적화된 도구, 취약한 도구가 있기 마련이지만 이거 너무한 것 아닙니까.  이 물건이 '보수'인지 제 기계 감각이 고인물인지 잠들기 전에 결판을 내고야 말겠지만 하~ 순식간에 너무 열이 올라서 말입니다. 

문득 신뢰라는 단어가 떠올라서 사전으로 '뢰賴'를 찾아봤습니다. 힘입다, 의지하다, 얻다, 억지 부리다 등의 뜻이 있군요. 무뢰한에도 이 '뢰'를 쓰나 봅니다. 힘입어서, 혹은 힘입기 위해 믿는 것, 그것이 신뢰인 모양인데,  인간과 물건 사이에도 one way-  한쪽으로 기우는 건 바람직하지 않은 거죠.. 둘 사이에도 상호신뢰라는 게 작용해야 하는 거죠.
쌍방 간에 좋은 결과가 있기를 바라며 다시 독서대 조립에 들어갑니다. 후아후아~
    • 어디로님은 나랑 매우 다른듯 해요 난 뇌가 좀 성실하지 않아 아주 쉬운거 빼곤 한번에 제대로 하는거 없어요 쉬운것도 거의 빠짐없이 수정해야 함 나 이거 참, 살다보니 신뢰는 쌍방이 아니라 편도라고 생각하고 살아요
      • 조립 못한 채 시무룩한 중이에요. 볼트 하나와 비닐워셔 하나가 사라져버렸답니다. (에잇~ 하고 소파에 던졌더니 ㅜㅜ ) 


        가출신고는 무선청소기에게나 해야 하는데 이 시간에 소음을 낼 수는 없고요, "어서와 독서대는 처음이지?"를 제대로 맛보는 기분입니다.




        신뢰는 미래에 대한 감각 위에서 성립하는 마음의 컨트롤링인데 편도라면 너무 느와르적인 것 아닐까요.



    • 화딱지 얼마나 날지 잘 알죠 숨은거 못찾았으면 좋겠 농담이고 낼 찾아 완수하세요 반은 일부러 큰길을 벗어나 비포장 도롤 한참 걸었으니 그래 사랑도 편도가 좋아라고 하며 가겠습니다
    • - 혼잣말
      부글부글 끓다가 시무룩해지는 감정을 가라앉히느라, 신뢰를 찾아본 김에 신의도 사전에서 찾아봤다. 
      당연히 의義는 의리를 뜻한다. 믿음과 의리. 단출해서 좋다. 신뢰라는 단어가 풍기는 드라마틱하고 어딘지 소소하며 미묘한 뉘앙스와는 결이 다르다. 선이 굵다고 할까. 모호하게 어둡다고 할까.

      사물과의 만남에 신뢰/신의라는 말을 쓸 수 있을까. 사물은 인간화될 수 없다. 인간화라는 것은 비인간의 실제적인 길들임이 아니라 길들여졌다고 믿는 인간의 구부러진 의식화이다. 사물이 작동하지 못하는 것, 고장이란 것도 사실은 항상 조금씩은 고장나 있는 상태임을 인지 못하기 때문에 결정적인 고장으로 망가져 버렸을 때 "고장났다"고 인식하는 습관의 재현아닐까. 
      인간의 의식은 상당히 명확한 것을 좋아한다. 신뢰면 신뢰지 신의는 또 뭘까.

      사물은 숨겨진 차원이 아니다. 이 차원의 인지가 5차원과 그 이후 차원에 대한 폴딩 상태를 암시하는 효과가 있지만, 사물은 싱글채널이다. 달리 우리가 어떻게 할 수가 없다. 
    • 완전 싱글인 분리된 독서대를 너무 믿은건 깔보았기 때문입니다 화난거죠 낼 달래면 같이 오래 있겠죠
    • 원래 세계는 다양한 형태로 인간을 배신하는 법입니다! 어쩌면 인간은 속고 속아도 세계를 믿는 벌을 받은 것인지도요. 


      어디로 님의 이번 경우는 그 믿음이 보답받을 수 있을 것 같습니다 :)

      • 일어나서 두 시간 째 집안의 모든 불을 밝히고 사라진 부품들을 찾아봤으나 발견되지 않습니다.
        세계는 사람과 사람, 사람과 사물, 사물과 사물, 서로에게 상처와 구멍을 내는 기제를 따라 움직이는 것 같아요. 

        볼트야 비닐유닛아 오래 숨지 말아라 
        나는 너희를 버린 게 아니다
        본체에게도 다른 부품에게도 이 사실을 전해다오

        우린 서로 상처를 주고받았다
        볼트야 비닐유닛아
        내 사과가 너희의 피 속으로 흘러들기를 바란다
        까꿍 

        # 독립해나오고 일년 쯤 지났을 때 울 어무이가 아버지에게 속삭이시기를
        "혼자 살면 사람이 좀 코믹해지기 마련인가봐요~"
        인정!



        • 당연히 코미디언이 되죠 아니 원래 그런 사람이 더, 한참 찾으면 일부러 살짝 모습을 보일걸요
    • 첨단 독서대를 구입하셨나봅니다.


      제가 본것들은 조립하고말것도 없는 것들이었는데

      • 첨단 독서대랄 것도 아닌 제품이에요.


        http://bstand.co.kr/product/detail.html?product_no=36&cate_no=1&display_group=3


        출근 전, 가출한 부품 애들 찾아내서 조립하고, 읽고 싶은 책 척 올려놓고 나왔습니다. 40초 정도 걸렸을까요. 어제 십오분 악전고투한 게 신기할 정도로 어이없더라고요.  그렇게 정신머리가 나가는 순간이 있는 거죠. - -




        • 이걸 왜 샀는지 모르겠어요. 제가 쇼핑에 신중/소심한 편인데 지난 주에 이것저것 막 질렀더라고요. 와중에 이탈리아 산 오중 스탠 프라이팬은 두 개를 주문했더군요.(먼산) 언니가 얼마간의 돈 때문에 스트레스를 받는 기미가 보이길래 그정도 돈에 기죽지 말라며 얼마전 확 송금했거든요. 그러고나니 나 자신에게도 좀 쓰고 살자~  요런 충동이 이는 측면이 있네요. 까짓것 금액 비교도 안 하고 막 지르고 있습니다. 곧 제동이 걸릴 테죠. hehe

    • 한 글자에도 참 다양한 의미가 들어있군요. 아는게 다가 아니란 생각에 아직도 난 멀었구나 생각 ㅎㅎ
      • 의미란 자신이 발견해서 자신에게 주는 선물인 거죠. 라틴어로는 opfer인데 헌금이라는 뜻입니다. 자신에게 바치는 헌금, 예쁜 말이죠?
        저도 한시절 단어 하나하나 의미로 받아들이던 시절이 있었으나 지금은.... - -

    • 글 읽으면서 들었던 점. 고인물의 용법이 넷에서 갈수록 달라져 분간이 안 됩니다.


      보통 게임 계통에서 쓰이면, 하도 그 게임을 많이 해서 신기에 가까운 실력을 보인다는 식으로 쓰이는데, 원래는 흐르는 물이 아니라서 다 낡고 해져버린다는 거였었지 하고 환기했네요.

      • 순환되지 않고 잠겨 있는 물이라는 뜻이 게임계에선 그런 의미로 사용되고 있나보군요. 저는 게임을 전혀 안 해서 그렇구나...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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