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렇고 그런 시간을 지나며

1. 며칠 도로에 쌓여있던 눈이 이제 다 녹았네요. '눈은 녹는 것이다'는 어느 시인의 구절을 처음 접했을때 별 말 아닌데 이상하게 심쿵했던 기억이 있습니다. 그 표현이 아름다움을 희망하는 우리의 잔인한 무관심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인 것 같아요. 
아무튼 형체의 부분 부분이 증발돼 어떤 소음도 부산물도 없이 하늘로 사라져버린 존재론적인 실종의 광경이 곱디 곱습니다. 싸늘, 단단했던 얼음에서 부드러운 물로. 드디어는 증기로 힘이 빠져버리는 변화의 과정이 정말로 일어나고 있구나 낯설게 감탄 중이에요.
얼음이 고요하게 물로 바뀌어 사라져버린다는 것. 우리가 계속 주시하지 못하는 그 과정 속에 얼음이 내지르는 비명이 감춰져 있을 텐데, 뒤늦게 상상으로 이렇게 듣고 있습니다.

2. 오늘  동료 dpf가 단어 하나의 뜻을 물었어요. '도모지'가 뭐냐고. 구글링의 대가인 그가 그걸 검색 안 해봤을 리가 없죠.  
" 도모지 塗貌紙는 조선 시대에 행했던 사형 방식이고, 집안의 윤리를 어긴 사람들을 죽이기 위해 행했으며, 처형하려는 사람이 움직이지 못하도록 몸을 묶고 얼굴에 물을 묻힌 종이를 겹겹이 바르는 형식이다. 몇 겹씩 얼굴에 단단히 쌓아올린 종이가 코와 입에 달라붙기 때문에 죽임을 당하는 사람은 비명도 지르지 못하면서 질식사하는 것이며 천주교 박해에 쓰였다"고 시들, 건성 답하니 씨익~ 웃더군요.  
이 친구 요즘 보면 뒤늦게 사춘기 과정 중인가 싶어요. 한달 전쯤부터 제게 " 더 나이 들면 우리 지리산에 가서 흑염소나 키우고 살자~"라는 꼬시레기 말을 해대는데 이게 분명 어디서 배운 표현일 거거든요. 저는 TV가 없어서 모르는데 어느 방송이나 언론에서 회자되는 말인지 아는 분들 계시면... 

3. 내일부터 겨울 휴가입니다. 작년에는 랭보의 고향에 가서 고요하고 충만한 시간을 즐겼는데 올해는 갈 곳도 할 일도 없네요.  세상 신경 안 쓰고 제 마음이나 다듬으면 되겠지만 심심하기는 할 테죠.  매일 4km 정도 걸어볼 거고요, 중단했던 라틴어 공부를 계속할 작정입니다.
왜 이런 예감이 드는지 모르겠는데,  까마득한 시간을 살았구나 싶은게 어쩐지 제 삶의 시간이 얼마 안 남은 것 같아요.  날씨 탓일까요.  - -:
빈 들/. 청야淸野/ empty field 라는 단어가 뇌리에서 맴맴돕니다.  '절대적인 것은 텅 비어 있는 것이 아니라 유한성과 불완전성이 비어 있는 것이다.'라는 어느 현자의 말과 함께요.



    • 겨울의 파괴 속에서도 행선지를 무사히 찾으시길 :)


      텅 비어있음의 의미는 많이 고심해봐야겠네요.
      •  implosion이라는 용어가 있죠. 내파 혹은 융폭으로 번역되는.
        오스트리아의 어느 삼림감시원이 달밤에 굽은 수로를 따라 내려가는 물길을 지켜보다가 거기에 작용하는 기기묘묘한 결들의 나선운동을 발견하게된 유체역학적 개념이라더군요.
        왠지 이 단어가 텅 비어 있음 - 맛있는 맥주온도인 4도를 가르키는- 핵심어인 것 같아요. 제게는.

        그나저나, 갑자기 졸음이 쏟아져서 남들은 저녁식사도 안 했을 이 시간에 자러갑니다만,
        최근 맛있게 드신 음식 있으면 하나 추천해주세요. 
        뭐든 먹어야할 것 같은데 (목구멍에서 뭐라도 달라고 손가락이 올라오는 느낌. - -;) 아는 음식 다 떠올려봐도 이거구나 당기는 게 없어요. - -



         
        • 헉... 요새 패스트푸드로 살고 있어서 추천드릴 게 없네요 ㅋㅋ토스!! 다른 분 아무나 어디로갈까님에게 무엇을먹을까 추천부탁드립니다
          • 전 패스트푸드 식사습관은 그냥 때찌때찌함! 


            식탐은 없는데 채소탐이 있어서 싱싱한 것들 보이면 사다 쟁여놓곤 해요.


            당연히 버려지는 것들이 많아 죄책감이 들어서 누구든 가져가시라고 아파트 현관에다  내놓기 시작했는데 나눠드리고 싶네요.

    • 꼭 니체가 여인으로 환생해서 회사다니는 것 같아요. 마지막 부분을 읽으니 문득 고야하고 쓸쓸하네요.


      순전히 제 기준 추천 음식은 (이게 근데 음식인가;;) 요즘 밥과 반찬에 물리고 축축한 음식이 좀 못마땅해서, 버섯을 구워 에멘탈 치즈 약간만 발라먹고 있는데 흡족합니다. 꿀을 넣은 탄산수와 함께. 아 그리고 얼마전에 두부구이도 좋았어요. 향긋한 엔비 사과와 함께 먹었는데 맛있었어요!
      • 니체 선생에게 죄송하다고 제가 대신 사과의 마음을 표했습니다. ㅎ


        버섯+ 치즈 조합은 넘 고상해서 저처럼 입맛 잃은 사람에겐 자극이 안 되네요. 근데 두어 달 전에 선물 받은 꿀이 있어서 커피 대신 타 마시고 있는데 금방 에너지가 오르는 느낌이... 



    • 하..인간 자체가 자연의 섭리인데 매번 잊고 사는거 같아요. 물질 주의에서  빠져 나올 수 있을까요? 이번 생에 과연..

      • 자연의 섭리라는 문구를 대하면 저는 말러의 음악이 젤 먼저 떠올라요. <대지의 노래>.

        • https://youtu.be/BTo0kEwDAPg


          이미 보셨겠지만 켄 러셀의 <말러>입니다. 죽음에 대한 공포에 많이 지배되었던 것 같아요.
          • 댓글은 안 달았지만 올리신 글 반갑게 읽었어요. 근데 지금 클릭해보니 영화 정보 나누는 사이트에서 그 글 조회수가 낮은 게 의아하네요. 축구 마니아로 인식돼서 그런 걸까요. - -

            • 모바일로 늘 접속하는지라 조회수는 신경쓴 적 없고 옛날 영화라서 그런가 봐요. 핫한 넷플릭스 드라마나 신작이 아니잖아요
    • 2. 현대에만 엽기적 범죄가 일어나는건 아니었어요

      • 잔인함과 자비없음은 옛시절이 더했죠. 지금은 정보가 공유되는 시스템이라 그 시절보다는 덜한데... 라고 쓰려니  뜨끔한 감정이 심장을 강타합니.... 

    • 눈은 녹는것인데 그대로 있지 녹아 없어지면 지금도 싫어요 안큼니다 난, 다 금방 죽어요
      • 이 앙탈 어쩔~ ㅎㅎ

      • 짐작으론 저보다 오래 사셔야 할 나이대 같은데 이런 마음먹이 바람직하지 않습니다아~ ㅎ


        걷는 행위가 육체엔 가장 좋은 것 같아요. 비록 콘크리트 길이라 할지라도.


        산책하노라면 길 너머 또 하나의 레이어에 많은 사람들이 저를 (무심히) 건너다 보고 있고, 그런 순간에 우리가 서로를 자연히 의식을 되기도 하는 느낌이 좋아요. 

        • 다른 레이어엔 삶들이 사람들이 날 보고 있으니 좋은데 난 레이어 쓸줄 몰라요 포토샵 어려워 안해봅니다
    • 일조량이 적은 시기라서 그렇지 않을까 싶네요. 오늘은 햇빛이 좋은데 나가서 볕을 많이 쬐는 것도 좋을듯. 점심은 갖은 나물에 강된장 비벼서 드시는것 추천.
      • 나물비빔밥이 제 최애 식품에 속하는 걸 어케 아시고 권하시나요. 


        오전 걷기를 하고 돌아오면서 몇달만에 단골 채소가게에서 도라지를 사왔어요. 말린 고사리 있고 며칠 전 사둔 당근도 있고 예쁘게 채썰어서 장금이 손맛을 함 내볼까봅니다. 




        기부니가 내려앉는 게 일조량 탓은 아니고 주기적으로 몇 년에 한번 씩 이런 시기가 있습니다. 감정이 확대되거나 손상되거나 하는 변덕질이 일어나요. 어머니가 저를 조마조마하게 지켜보시는 이유.





        • 오늘 보니까 사는게 속은 알면서도 모르는체 사는거지만,멘탈이 강한건 허무하다 금방 회복이 되는거란다 라고,뭐 본능으로 다 그리하겠지만 좀 연마하면 선수가 될수있죠 선수신거 알지만,표고버섯을 두봉지 사서 진간장 우동간장을 붇고 물론 물도 붇고 설탕 두숫갈 조미료 조금 끓이니 장조림이 되었어요 좀 질기면 잘라서 밥에 비벼먹으니 먹을만
          • 허~  버섯장조림 만들 줄 알면 완전 프로 주부이신 거죠. 다음엔 거기에 꽈리고추 넣어서 조려보세요. 맛이 괜춘하게 더해집니다.



        • 그렇게 감정이 확대, 손상될 땐 어떻게 하시나요? 제 딸아이도 비슷한 경우가 있는데 제가 해줄 수 있는게 무얼지 늘 고민입니다.
          • 음. 따님의 나이를 모르지만 아부지가 이렇게 응결의 감정으로 지켜보고 있다는 걸 느낄 거예요. 그게 단단한 힘이 됩니다. 


            제가 감정의 회오리를 첨 느꼈던 게 여섯살 무렵 낭뜨 해변에서였어요. 왜 나는 세상에 나왔을까? 


            그때부터 부모님의 사랑 가득한 시선이 절 향하고 있다는 걸 확실하게 인지했고, 지나고 보니 그게 절 잡아줬다는 걸 알겠습니다.  어머니가 평생 친구로 악기를 권하셨는데, 피아노는 기본으로 익힌 상태에서 첼로를 접했습니다. 많은 도움이 됐어요.




            예민하다는 건 독특하고 고유하며 유일하다는 의미인 것이니까요. 따님을 조심히 지켜봐주시면 될 것 같아요. 아부지가 제가 별 짓 다해도 꿀이 뚝뚝 떨어지는 시선만 보내지 걱정/의아해 하지 않으시거든요. 그게 저의 탄탄한 토대인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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