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시성에 관하여

# 사제인 친구와 오랜만에 통화했습니다.  전화를 끊고나니 이게 '동시성'인가 싶은 생각이 드네요.  
한동안 그와 이런 공감을 나눈 적이 없었는데, 전화받기 전 마침 저도 기억 속의 그를 떠올리고 있었거든요. 
우린 이렇게 계속 이어지고 있구나 싶어서 마음에 작은 진동이 일었습니다.
두어 달 동안 혹사증후군이랄까, 너무 많은 업무와 너무 많은 공적인 일과 덧없이 사라져버리는 시간 때문에 번아웃 상태였는데, 그와의 대화가 위로 역할을 해줬어요.

그> 어떻게 지내?
나> 일과 거기에 엮인 사람들에게 휘둘리며 지내. 
그> 항시 겪던 일상이잖아. 다른 고통은 없어?
나> -_-

그> 예전에 니가 백남준에 관해 쓴 글을 우연히 다시 읽었어. 인터넷에 떠돌더라.
나> 에? 프로젝트로 요즘 백남준을 다시 파고 있는 중인데.  오버하면 앙되는데 이 반가운 감정은 뭐지?
그> ㅋㅋ 내가 지금 너를 흔들고 있냐?  뿌듯하다. 
니> - -
그> 새해 복 많이 받아. 우리 언제나 한번 볼 수 있을까? 
물리학에서 말하는 여분 차원 extra dimension의 뉘앙스가 깃들어 있는 대화였어요. 시간의 흐름이 음미되고 무엇인가 여운이 남는데, 뭐라고 정의할 수 없는.  

# 일 때문에 물방울 시리즈로 유명한 김창열 작가의 작품들을 다시 들여다보고 있어요.
그 세대의 작가들을 떠올리면 문화적 정체성에 기대어 사상적 맹아 틔우면서 오늘 이 시기까지 예술활동 해온 방식에 대해 생각보게 됩니다.
뭐랄까 ‘사상가의 얼굴’을 한 예술가의 초상에 대해 말이죠. 
문화적 다양성의 시대라 "문화적 정체성은 거짓이다" 라고 극언하는 사람이 점점 늘고 있는 세태지만, 돌이켜 보면 서구의 어떤 1급 지성도 서구 중심과 그 주변에서 패돌리는 방식으로만 활동했죠. 
세계성 mondialite의 에토스를 갖고 있어야 하는 21세기인 지금도 그러하고요.  그래서 문화적 다양성이란 표제가 의심스러울 때가 많아요.
네, 뭐... 

    • 그렇다고 하면 왜 정체해야만 할까요 다양의 합은 하나 밖이라서 그런가
      • 정체는 '하는' 게 아니라 '되는' 거죠.
        제가 좋아하는 시인 파울 첼란의  <문턱에서 문턱으로>라는 시집이 있어요. 세상을 부정하는 이미지에 어떻게든 답하려 애쓰다가  '정체'는 그 무엇도 아닌 것에 불과하다는 생소한 주장을 펼쳐놓은 시들이에요. 가령 이런 싯구 " 아무도 아닌 것이 우리를 흙과 진흙으로 다시 빚는'게  '정체'라고,  그 개념을 제게 가르쳐줬는데...  가.영님은 어떠실지. - -

        • 난 나도 빌린거라 어찌 빚어져 살든 같구려 근데 그렇구려는 어떤 대화체인가요, 나도 친구말 써먹어야지 내가 널 흔든거야? 뿌듯하다 라고
          • 우리말은 존비어 체계가 확실히 나뉘는 언어죠. 
            ~그랬구려, ~그러하오 같은 어법은 상대를 높이되 자신을 낮추지는 않는 어법이고요. 자신보다 나이 어린 사람에게 쓰는 무람없는 존칭어. (그러니까 제가 가.영님보다 어리다는 걸 인지하고 계시다는 것. - -)
            에... 상대를 흔드는 걸 뿌듯하게 느끼는 건 바람직한 마음먹이가 아니에요~ 

            • 거의 정확한 설명이네요 근데 동년배 한테는 안쓰나?
      • 견자- visionary 인 사람들이 있죠. 뭐랄까, 예술이 위스키 한 잔  마시는 것처럼 자연스레 되는 사람들.  
        발렌타인 12년산 같이  너무 취하게 하지도 않고 너무 멀쩡하지도 않게 하는, 적당한, 죽음 따위는 잊은, 그러나 어디선가 불어오는 바람처럼 허무한 터치가 피부에 가해지는, 피부가 제3의 뇌가 되는, 그러면서도 기억은 신경세포 끝이 무뎌지면서 약간 얼떨떨한, 그런 도취경이 가능하고 보여주는 천재들. 
        제가 그 경지를 감히 넘보다가 제 수준을 자각하고 겸허해진 지가 어언 십몇 년.... ㅜ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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