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 멋대로 써라

어제 퇴근무렵, 다른 부서라 친밀한 교류는 없는 동료가 제게 다가와 은밀한 음성으로 물었습니다. "데릭 젠슨을 알지?"
십 초 정도 뇌세포의 깜박임 후에 기억난 작가, 데릭 젠슨!  15년 전쯤에 읽었던 책이, 까맣게 잊고 있던 책이 난데없이 소환되는 경이로움이란.......
<네 멋대로 써라 Walking on Water >. 책에서 그토록 많은 대화를 얻을 수 있다는 사실이 놀라웠던 책이었어요. '책'이라는 매체가 아니라면, 먼 미국 땅의 강의실과 교도소에서 떠든 이런 생각을 내가 어떻게 접할 수 있겠는가 고맙기도 했었고요.

글쓰기 방법론을 담은 책은 적지 않게 나와 있습니다. 스티븐 킹의 <유혹하는 글쓰기>, 나탈리 골드버그의 <뼛속까지 내려가서 써라> 가 대표적인 스테디셀러겠죠. 데릭 젠슨은 그런 책들의 장점과 재미를 살리면서, 보다 근본적인 문제점을 지적하고 그 돌파구를 제시합니다.
언어란 살아 있는 것이죠. 죽은 자의 글이 산 자에게 읽히고 산 자의 글이 다른 산 자에게 읽힐 뿐, 글은 결코 죽은 자에게 읽히지 않습니다. 
그런데 세상에는 글의 주인인 산 자를 억압하는 죽은 언어들이 난무하는 경향이 있어요. 젠슨은 이런 현실에 분노와 야유를 보내며, 글의 본래 목적 - 소통과 이해, 치유와 반성을 회복시키기 위한 여러가지 해법을 적고 있습니다. 
 "살아있다면 오직 쓰고, 읽고, 말하고, 들으라. 글의 내용과 형식을 통제하는 어떤 권위도 인정하지 말라."  

이 책을 읽은 후의 첫소감은 '문학인의 아나키즘이로군'이었습니다. (홈페이지를 찾아가보니 과연 소개 문구가 "anarcho-primitivist writer Derrick Jensen"이라고 되어 있더군요. )
젠슨의 가르침을 한마디로 요약하면 "너의 <밖>에서 배우려고 하지 말라", "너를 너 자신이 되도록 존중하고 사랑하라"입니다.
하이데거의 <존재와 시간>을 저는 시론 poetologie으로서 읽은 적이 있는데, 이 책 또한 강력하게 그렇게 읽을 만한 것이었어요. 다만 이 책은 수업이라는 상황에 초점을 맞추고 있기 때문에, 독학자나 학생의 입장에서는 '입장의 이입'을 위한 약간의 상상력이 필요합니다.  천천히 읽어야 하는 책이죠. 

그런데 어제 동료는왜 난데없이 저 작가를 아냐고 제게 물었던 것일까요? 안다고 하자 다만 끄덕거리기만 하고 어떤 질문도 없었습니다.  
세상에는 이해할 수 없는 의식의 횡단들이 심심치 않게 일어나는 법이고, 모든 질문에 이유가 있어야 하는 건 아니겠으나 새삼 갸우뚱 갸우뚱~ -_-

(역시나 독서노트를 뒤적였더니 이 책의 몇 구절을 기록해놓은 게 있어서 반만 옮겨봅니다.)
 
- 많은 사람들에게 글이 가 닿는 가장 좋은 방법은, 당신이 전달하려는 것을 그들이 다시 한번 겪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 최선의 방법은 그들이 꽉 붙들고 매달릴 수 있는 이미지를 그려주는 것이다.

- 예의를 중시하는 사람, 인정받기를 원하는 사람, 등급 매기기를 원하는 사람, 모든 강한 의견과 강한 충동 앞에서 얼버무리는 사람. 그런 사람은 가치 있는 걸 쓰지 못한다.  우리 안에는 글을 쓸 수 있는 사람이 '백 명'이나  들어 앉아 있다. 물론 그 각자마다 자기 생각이 있다. 내면에서 솟아오르는 그들의 말을 받아적기만 해도 좋은 글이 되게 마련이다.

- 학교 교육은 미래의 삶을 위한 훈련이다. 읽기와 쓰기, 셈하기를 웬만큼 가르쳐주기 때문에 그런 게 아니다.  끔찍이도 실패를 두려워하는 마음과 성공을 부러워하는 마음, 말도 안 되는 어리석음을 서서히 불어넣어 주기 때문에 그렇다는 말이다.

-  나는 산업문명이 싫다. 그게 지구에 저지르는 짓 때문에, 그게 공동체에 저지르는 짓 때문에, 그게 사람이 아닌 것들 하나하나 - 길들었거나 길들지 않았거나 모두- 에게 저지르는 짓 때문에, 
그게 사람들 하나하나 - 길들었거나 길들지 않았거나 모두 -에게 저지르는 짓 때문에,

- 나는 임금경제가 싫다. 그것이 사람들이 제 삶을 팔아 사랑하지도 않는 일들을 하도록 만들기 때문에. 사람들이 서로를 해치고 자신들 보금자리를 망쳐버리라고 보상을 주기 때문에.

- 난 산업적인 학교 교육이 싫다. 그것이 유일하게 용서 못할 죄를 저지르기 때문에.
학교 교육은 사람들을 자신에게서 멀어지도록 이끌고, 노동자가 되도록 훈련시켜, 더욱 더 충성스런 노예가 되어,  더욱 더 열렬히 문명이라는 노예선을 지옥으로 저어가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이롭다는 확신을 불어넣으며, 마주치는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그들과 더불어 파멸시키도록 강요한다. 그리고 나는 이런 과정에 한 몫 거들고 있다.

- 나는 학생들이 지구를 갈수록 더 파괴하는 일에 제 몫을 다하도록 훈련받을 때, 학생들이 거대한 산업기계 속의 톱니바퀴 구실을 하느라, 더 나쁘게는 거대한 공장이자 노예 수용소의 감시인 구실을 하느라, 그들이 자유롭고 행복한 인간으로서의 타고난 권리를 팔아치우는 마지막 단계로 들어섰을 때, 학교가 조금 더 입맛에 맞도록, 조금 더 재미나도록 만드는 걸 돕는다. 그것은 본질적으로 나를 협력자로 만들지 않는가?  본.질.적.으.로. 라는 말은 빼자.

- 아우슈비츠 같은 집단 수용소에서 일한 의사들 중 많은 이들이 수용자의 목숨을 구하기 위해 힘닿는 한 모든 일을 했다고 한다. 단 하나 가장 중요한 것만 빼고 말이다. 
그건 바로 아우슈비츠라는 현실에, 그들이 그 아래에서 수술하는 잔혹 행위를 유발하는 상부구조물에, 의문을 던지는 일이었다.
    • 내게도 백명이 들어앉아 있다니 듬직하긴 한데 다섯만 빼고 다 나갔으면 좋겠어요 혼란의 나이가 오니 그가 말하는 혼란은 뭐 세상 발전의 틀이기도 하겠지 그런 생각 밖에 안남았어요
      • 남기고 싶으신 그 다섯 명의 면면이 궁금하네요. 그들의 이름이라도 나열하시오~ (해죽)

    • - 혼잣말


      포스팅할 때 머릿속을 간지럽힌 시가 있었는데, 가물아물하더니 자고 일어나니까 뙇 생각났다.


      보들레르의 <취하라>.


      제 멋대로 해본 자만이 갖는 경험이 있다는 걸 내게 가르쳐준 시다. 그게 꼭 바람직한 건 아니겠지만. - -




      - 취하라 Enivrez-Vous  / Charles Pierre Baudelaire




      항상 취해 있으라


      그것보다 우리에게 더 절실한 것은 없다


      시간의 끔찍한 중압이 당신 어깨를 짓누르면서


      당신을 이 지상으로 궤멸시키는 것을 느끼지 않으려거든


      끊임없이 취하라




      무엇으로 취할 것인가


      술로, 시로, 사랑으로, 구름으로, 미덕으로


      당신이 원하는 어떤 것으로든 좋다


      다만 끊임없이 취해 있으라




      그러다가 궁전의 계단에서나


      도랑의 푸른 물 위에서나


      당신만의 음침한 고독 속에서


      당신이 깨어나 이미 취기가 덜하거나 깨거든 물어보라


      바람에게, 물결에게, 별에게, 새에게, 시계에게,


      지나가는 모든 것에게, 굴러가는 모든 것에게,


      노래하는 모든 것에게, 구르는 모든 것에게 물어보라




      그러면 바람이, 물결이, 별이, 새가


      시계가 대답해 주겠지


      취하라. 시간의 노예가 되지 않으려면


      취하라, 항상 취해 있으라


      술이건, 시이건, 미덕이건 당신 마음가는대로

      • 젊음의 패기는 미덕이었으니 술잔에 날 그려볼걸 일어서 마음 가는데로 갔으나 가게 만든 길이 아니었는데 계속 가다 돌아오려니 어두워져 새벽에야 집에 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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