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상의 방 한 칸

이태원에서 6년 째 월세 사는 동료 dpf가 집 구하기 전쟁에 내몰리는 상황이 발생했습니다. 사는 동안 세 한푼 올리지 않았던 보살형 노부부 주인이 세금 문제 때문에 사정 상 집을 팔 게 된 것이었어요.
남산 등반길을 몹시 사랑하는 dpf는 이태원을 떠나고 싶지 않아 했죠. 그런데 전세에서 월세로  전환되는 현 추세와 달리 그 동네에 나와 있는 집은 전세집 뿐이었습니다. 아파트가 아니라 다주택 건물들이어서 그런 듯싶었어요.

당장 몫돈을 써야하는 것도 부담이지만, 부동산 업자가 권하는 집이 융자가 많은 집이어서 세입자보증금 - 최우선변제권을 받을 수 없는 형편이라고 했습니다.  (제가 이런 분야 깜깜이라서 뜻을 잘 모름.) 
하지만 상대하는 부동산업자가 dpf가 신뢰하는 사람이어서 그쪽에서 권하는 집으로 많이 마음이 기운 상태였어요. 아무튼 집을 비워줘야 하는 날짜가 잡혀 있고, 나온 집 그마저도 누가 채가기 전에 오늘 레아나와 함께 셋이서 집을 보러 갔습니다. 남산 소월길에서 가까운 집 위치며 건물 상태도 나쁘지 않은 곳이었어요. 세입자가 깨끗하게 사용하고 있는 중이었고요. 

들어가서 매의 눈으로 여기저기 살펴보노라니, 거실 책상 위에 꽃잎이 세 개 둥둥 떠있는  유리 물잔이 놓여 있더군요. 무슨 꽃잎인가 가서 보니 개망초 꽃잎이었어요.  그 뒷 거실 창을 열었더니, 아아! 거기에 서너 평 가량의 텃밭이 펼쳐져 있는데 개망초들이 즐비했습니다.  바람도 불지 않는데 꽃잎들이 난분분 날리고 있었고요.
그걸 본 dpf는 저 꽃들이 불운을 제압해줄 것 같지 않냐며 덜컥 계약을 할 결심을 하고 말더군요. 그러나 그것도 잠시, 계약서를 쓰기 위해 집을 나서자 익숙한  좁은 콘크리트 길이  나 있었고,  떠들떠들 소음을 일으키며 수많은 사람들이 우리를 스쳐갔고, 자연히 그 집이 이태원의 그저그런 다주택 중의 한 집일 뿐이라는 실상을 절감했습니다.
집 구한 축하 파티로 생맥주 몇 잔을 마시고 헤어졌는데요,  삼겹살 파티에선 삼겹살을 굽고, 생선구이 파티에선 생선을 구워 먹었는데, 집 구한 파티에선 집을 구워 먹을 수 없는 일이더군요.

지상에 방 한 칸 없으면서 "내가 등을 대고 누으면 바로 거기가 내 집이지~"라는 식으로 선사처럼 말하는 이들이 가끔 있죠. 의도한 바 없이 인생을 통달했다는 자세를 취하는 건데, 그런 정답을 미리 준비하고 있는 경우에는 사는 게 아주 덧없다는  생각이 저런 거구나 라는 짐작을 하게 돼요.  바로 그런 덧없는 조건 속에서 열심히 생활하다가 그 마지막 조건을 빼앗길 때 문득 자살하고 마는 이들이 있는 거고, 그건 마냥 남의 일만은 아닐 텐데.... (심호흡)

나이와 상관없이 언제든 은퇴하게 되면, 저는 태양전지를 이고 있는 시골집에서 살 거예요.  한국이든,  마음에 점찍어둔 몇 나라 중 한 마을이든, 낮엔 다복한 햇볕을 받으며 밤에는 그 온기로 책을 읽을 수 있는 동네에서 살 겁니다. 맥주 한 잔에 골똘/착잡해 있던 dpf에게 암송해준 릴케의 이런 시나 뒤적이면서요. 

- 나를 축하하기 위하여 Mir zur Feier (중에서.) / 라이너 마리아 릴케

그대는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나니,
그러면 삶은 축제와 같아질 것이다.
마치 아이가 바람이 불 때마다
많은 꽃잎들을 선물 받듯이
하루하루가 그대에게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라. 

꽃잎들을 모으고 아끼는 따위를
아이는 염두에 두지 않는다.
아이는 꽃잎들이 기꺼이 사로잡힌
머리에서 살며시 털어서
사랑스러운 젊은 해年들에게
새로운 꽃잎들을 달라고 손을 뻗는다


    •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나니,난 무슨말일까 이해가 안오는데 몇번 중얼거려도 모르겠나니 본시 이해할 능력이 부족해서 일까 합니다
      • 설이 필요치 않은 자명한 시라 생각하는데 이해가 안 된다시니 어설프게 몇자 붙.... -_-


        이 시에서 '당신'은 이미 어린아이가 아닌 어른을 지칭해요.  "당신은 삶을 이해할 필요가 없다"는 건 아이를 모델로 삼아 자신의 삶을 새롭게 살아보고 싶어하는 바람을 의미합니다. 즉 '당신'은 일상의 노동과 목적 지향적인 행위에서 벗어나 삶의 여러 사건들을 순전히 기쁨 차원에서 받아들이길 소망하는 존재이죠. 상상 속의 삶을 꿈꾸노니 그 모델이 어린아이인 것이고요.



        원문을 아는 입장에서 강조하자면, 이 시의 핵심 단어는  'lassen (영어의 let) - 무엇이든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기- 입니다. <내버려두기 lasse> 는 릴케가  삶을 살아가는 자세였습니다.  그래서 이 시에 등장시킨 두 주체가 있으니,  '아이'와 '바람'이에요. 이 둘의 관계에서는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목적의 대상으로 삼지 않는 면에서 평등해요. 상대에게 간섭하려 들지 않으며, 상대를 자기의 목적에 종속시키려 들지 않는 자세.
        '내버려 두는' 행위는 지극히 능동적인 행위이기도 한 것입니다. 삶을 전복시키는 문학의 힘을 저는 이런 시에서 느껴요. 
        • 열심히 살려했어야 한번 두번 생의 구분이 가능한데 풀어줘도 어렵네요
      • 어느 나이쯤엔(늙어서가 아니라) 추억을 끌어들이지 않고, 미래를 꿈꾸지 않으며, 시간 속에 고향을 만들지 않는 생활을 꿈꾸는 점이 저와 같군요. 반갑소 동지!


        저는 재즈를 잘 모르고 관심도 옅지만, 바흐를 재즈로 연주하는 그룹 '루시에 트리오'는 즐겨 들어요. 


        분위기에 의존하지 않으면서 분위기를 만들어내는 선율의 흐름을 따르노라면 '조율' - 그 몰두와 장난- 의 마법에 스르륵 빠져들게 돼요.


        https://www.youtube.com/watch?feature=share&v=9zO_v3HP7Wc&app=desktop








    • 저도 잘은 모르는데 최우선 변제권이 안된다--> 보증금이 보호가 안된다 --> 전세금 떼일 수도 있다는 뜻이 아닌가요? 

      • 그런 뜻으로 이해했기에 망설임이 있었던 건데, 개망초꽃의 유혹작전에 걸려서 계약을 하고 말았 .... - -


        융자가 큰 부분을 찜찜해 하자 중개인이 집주인 부부가 의사라는 사실을 알려주더군요. 


        "그렇다면 전세금 떼일 위험도는 낮지 않을까?" 슬쩍 말 건넸더니 dpf가 씨익 웃으며 답하기를 "어느 나라든 사기꾼이 가장 많은 건 전문직업군이야~" (독일어로 속삭인 게 좀 웃펐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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