싱긋이


살면서 가끔 어떤 비슷한 경험을 연달아 하는 경우가 있잖아요

최근 으응? 하고 귀를 쫑긋 세우게 되는 아이들의 대화를 들었어요. 저만 싱긋하기 아까워서 올립니다.

 

# 붐비는 도심 쇼핑몰 화장실.

 

엄마 : 다 되셨습니까

여자아이 : 아직입니다아

엄마 : 이유는 뭘까요오

여자아이 : 돈까스 양이 많았습니다아

엄마 : 혼자서 끝낼 수 있나요

여자아이 : 물론입니다아

엄마 : (저벅저벅 걸어서 아이가 사용하는 화장실 문을 톡톡 두드린다)

여자아이 : 혹시 사기꾼입니까아?

엄마 : 아닙니다

여자아이 : 정말 아닙니까아?

엄마 : 네 저는 엄마입니다

 

이러고 둘이 재밌게도 놀더군요. 옆 칸에 있던 저도 저는 나무꾼입니다아하고 하마터면 동참할 뻔...

 

# 한가로운 일요일 오후의 파스타 가게

-대략 8살과 6살쯤으로 보이는 형제가 앉아있는 테이블.

 

: 그거 먹으면 많이 매워

동생 : 맵게 안 생겼어

형 : 맵게 생겼어 먹지 마

동생 : 이거 이름 혹시 알아?

: 할라피뇨 (올 정확한 발음)

동생 : 할리핑ㄴ? 이거 우리나라 꺼 아니지

: 응 이탈리아 꺼 (확신에 찬 목소리)

동생 : 아빤 좋아하시나?

: 아마 그럴걸?

-화장실을 다녀온 아버지가 자리에 앉는다

동생 : 아빠 이거 좋아해?

-손으로 할라피뇨를 집어 들어 보인다

아버지 :

: 아빠 매운 거 못 먹자나

아버지 : 아니? 나 좋아해

동생 : 그럼 나도 먹을래

: 야 너 매운 거 먹으면 설사하잖아

동생 : 궁금해

아버지 : 걍 먹어 맛만 봐 그 정돈 괜찮아

: 아빠!! (한심하단 듯이 한숨) 얘 설사한다니까.

아버지와 동생 : .....

 

결국 그들은 할라피뇨 접시는 저 멀리 밀어놓고 파스타를 맛있게 먹더군요. 저기 할라피뇨는 멕시코 고추야... 하고 싶긴 했는데 그냥 나왔습니다.

 

#조용한 평일의 어느 골목길을 지나 횡단보도

-공기는 맑고 햇빛은 풍만한 오후

 

남자아이 : 엄마 이쪽으로 오세요

-엄마는 횡단보도 신호등만 쳐다보고 있다

남자아이 : 엄마 여기가 그늘이에요 엄마 얼굴 따갑잖아요

-엄마는 말없이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다

 

신호등이 바뀌고 횡단보도를 건너면서 그들의 뒷모습을 바라봤는데, 남자아이가 엄마의 팔짱을 다정하게도 끼더군요. 어제 밤샘 작업의 여파로 일하다 졸려서 잠시 산책하러 나갔다가 순식간에 잠이 확 깨더라고요. 무방비 상태에서 갑자기 안겨버린 그런 기분.

 

 

 

 

    • 엄마미소 지으며 읽어내려가다가 마지막 대화 남자아이의 말에 왈칵 눈물이 났어요.. 근데 저렇게 예쁜 말을 하는데 머리만 쓰다듬던 어머니라니 평온한 성정을 가진 분이신가봐요. 저라면 횡단보도앞에서 뽀뽀세례를 퍼부었을텐데.. :)
      • 그러게요. 아들아이의 다정함이 굉장히 익숙한지 그 어머니는 그냥 무표정에 가깝던... ㅎ 아주 가끔 살가운 자녀+무덤덤 엄마 조합을 보는데 저 모자가 딱 그랬던 것 같아요. 엄마 여기가 그늘이에요 할 때부터 전 귀가 150배쯤 커지던데. ㅎㅎ

    • 코비드 이전 회귀물 같아요... 현실로 은밀한 생님 주위에 일어난 일이라니 귀엽고 훈훈하네요.


      근데 은밀한 생님 주위에 아이들이 이렇게 눈에 띄신다면 혹시... 부모가 될 때가 된거 아닌지....(후다다닥 도망감)

      • 영롱한 스노우볼 하나 거저 얻은 기분이 드는 이런 경험 자주 하고 싶어요 ㅋㅋ 부모요? 가당키나.... 제 주제에. 음 여기 안 적은 두가지 정도 에피가 더 있는데 여튼 최근 10월 한달동안 유난히 아이들 목소리가 제 언저리를 채우네요...

    • 안심되는 에피소드들의 연속이네요. 나누어주셔서 감사합니다. 

      • 안심된다고 하시니까 저도 왠지 안심돼요...

    • 어린 아이들에겐 특별한 어떤 온기가 있는 거 같아요.18년 전 처음 나이차 많이 나는 여동생을 보고 그 이후 함께한 추억들과 나눈 대화들이 아직 생생하고 그게 너무 소중해요
      • 생각해보니 저는 어린이와 직접적으로 관계를 맺은 역사가 없군요... 어쩌다 오며가며 마주치는 어린이들과 티키타카는 잘 하긴 하는데. ㅎ 동생분과의 추억 한번 언제 써주세요.

    • 포근한 글이네요


      마음이 땃땃해져요

      • 오랜만에 만난 정다운 이와 반가운 인사의 포옹도 못하는 이 시대가 아직도 어이없죠. 아주 잠시만이라도 싱긋하셨길...

    • 세상이 아직은 따뜻하게 느껴지는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아들만 둘을 키우는데.. 둘째는 제법 말을 예쁘게 해요. 그때 그때 기록해두지 못해서 좀 아쉬울때가 있는데.. 틈나는대로 남겨야겠어요. 

      • 조만간 올려주세요. 미소 한가득으로 읽을 준비가 충분합니다.

      • 참 귀엽죠? 문득 듀게분들 어린 시절 사진이 보고 싶은... 그런 생각이 드네요 ㅎ

    • 직장에서 스트레스 받고 집에서 아이에게 따스하게 대해주지 못한 착잡한 저녁입니다. 은밀한생의 님의 글이 너무 좋고, 또 왠지 슬프고 그렇습니다..  

      • 저는 잘 모르는 거지만, 부모 마음이란 게 항상 미안한 기분이 많은 것 같아요. 너무 좋고 왠지 슬프다고 하셔서 저는 자꾸 마음이 따끔해요. 자고 일어나면 어느새 디오티마님 본연의 결이 나타날 거예요....

    • 상처만 주는 가족말고 저렇게 도란도란 얘기할 수 있는 가족은 참 좋아요

      • 말이란 게 하면 할수록 알면 알수록 어려워서... 서로 잘 안다며 단정 짓는 가족 간의 대화가 실은 가장 차갑고 겉도는 대화일 때가 있죠.. 도란도란 대화가 가능한 형제만 있어도 마음 한 구석이 늘 든든할 것 같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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