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를 넷플릭스로 봤습니다

타란티노의 모든 작품을 다 본 건 아니지만, 그래도 영상자료원에서 기획전을 할 때 거의 모든 작품을 다 볼 기회가 있었습니다. 거기서 <장고>를 보면서 척추를 따라 퍼지는 흥분을 느꼈고 <바스터즈>의 극장이 불타는 장면에서는 영화와 현실과 그것이 교차하는 극장이라는 공간 모두가 제 머릿속에서 타오르는 듯한 감동을 느꼈죠. 제가 감동했던 전작들에 비하면 <원스 어폰 어 타임 인 헐리우드>는 어딘가 좀 약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껄렁거리면서 뭔가 시시한 걸 대단한 것처럼 장광설을 늘어놓는 그 아재감성, 타란티노 테이스트는 여전했지만요.


글쎄요. 이 작품의 여운이 저에게 왜 이리 큰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이 영화가 레퍼런스로 삼고 있는 60년대 할리우드와 서부극에 대해 거의 모릅니다. 아마 이 영화를 서부극 매니아와 다른 시네필들보다는 훨씬 불완전하게 즐겼겠지만, 그런데도 이 영화가 주는 어떤 충만감이 여전히 맴돕니다. 처음에는 그냥 따뜻한 허풍 같은 거라고 생각했습니다. 내가 그 때 그 맨슨 패거리 히피놈들을 만났다면 아주 얼굴을 피떡으로 만들어 줬을 텐데! 마시던 맥줏잔을 테이블에 쾅 내려놓고 트림 한번 발사하면서 그 때가 얼마나 좋았고 샤론 테이트는 얼마나 착하고 예쁜 배우였으며 그 때 영화판이 막 이렇게 돌아가고 있었는데 어쩌구 저쩌구... 타란티노가 마시는 "라떼" 맛을 알려면 제가 그 라떼의 원료를 알아야하는데 전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도 타란티노의 전작들보다 훨씬 그윽하게 깔린 노스탤지어 같은 것을 곱씹게 됩니다. 무지막지한 영화인데 예전보다는 훨씬 순하고 뭔가 좀 눈물이 그렁그렁해요.


<펄프 픽션>만 해도 청년의 혈기라고 해야하나 광기 같은 게 번뜩입니다. 무슨 꿈도 아니고 말도 안되는 뻥같은 이야기가 줄줄이 이어지니까요. 어이없음으로 어이없음을 잇는 영화인데 영화전체가 웃음을 한껏 참고 아주 진지하게 왕뻥을 치는 떠벌이의 스피릿이 있습니다. 내는 내키는대로 막갈란다~ 이렇게 드러누워버린 것 같은 배짱이 있어요. 그에 비하면 <원스 어폰...>은 훨씬 유순하고 이야기가 차곡차곡 흘러갑니다. 주인공 중 한명인 릭 달튼은 이제 인생 내리막길에 있는 사람인데 정말 퇴물이 될 뻔하다가 그래도 어떻게 마카로니 웨스턴 뽕을 타서 다시 한번 상승하는 그런 호사를 누립니다. 이야기 전체가 시간에 거역할 수 없으면서도 버둥거리는 인간의 이야기이고 "아무튼 이건 그런 이야기임!" 하면서 앞뒤 다 쪼개놓고 순서 바꿔놓은 <펄프 픽션>보다 그래도 나 안끝났다는 노장의 투혼 같은 게 있습니다.


이 영화의 이런 분위기를 잡아주는 건 전적으로 브래드 피트의 공이 크다고 생각합니다. 레오는 또 하던 대로 열이 잔뜩 뻗쳐서 캐릭터를 뽐내는 연기를 하고 있습니다. 릭 달튼이 그런 인간이니까 뭐 상관은 없지만... 아무튼 퍼포먼스로 뭘 해볼려는 건 여전합니다. 그와 반대로 브래드 피트는 뭘 안합니다. 나사가 반쯤 풀려있는데다가 시키면 시키는대로~ 없으면 없는 대로~ 그냥 그렇게 술이나 마시면서 삽니다. 영락없는 따까리인데 신기한 건 클리프 부스가 이런 대접에 전혀 불만이 없다는 겁니다. 딱히 집착도 없고, 어쩌다 간신히 잡은 스턴트맨 연기 기회는 이소룡이랑 싸우면서 본인이 걷어차버리고... 그 장면을 회상하면서도 본인이 그러죠. 짤릴 만 했다고. 옛날 같았으면 타란티노는 이 회상을 클리프 부스가 술을 마시면서 다른 누군가에게 마구 떠들어대는 그런 과거/현재 교차편집으로 짰을 것 같습니다. 아무튼 클리프 부스는 엄청 헐렁합니다. 뭔가 신천지스러운 히피들 소굴에도 가보고요. 달관자의 태도가 몸에 배어있습니다. 복수라든가 어떤 장렬한 목적 의식같은 건 전혀 없습니다.


그래서 클리프 부스가 맨슨 일당을 아주 반죽음으로 패놓을 때, 무시무시하면서도 이웃집 아저씨의 히어로 변신같은 감동이 있습니다. 그는 현실역사에 침입하는 영화 그 자체인 메타포 같은 존재인데 영화가 암울했던 현실에 맞서 싸워서 이겨버리는, 현실을 바꿔버리는 이야기를 만드니까요. 그 과정에서도 클리프 부스는 여전히 느슨한데 비장함은 1도 없고 그냥 우리집에 들어온 또라이들을 아주 박살내줘야겠다는 "지랄맞은" 응징만 있습니다. 사람 잘못 건드린거죠. 이 부분의 진가는 클리프가 사람들을 두들겨 팰 때가 아니라 퇴장할 때 드러납니다. 가장 위험했고 현실에서는 처참했던 순간을 딱 넘기자 클리프는 할 일 다 했다는 듯 퇴장합니다. 석양의 건맨 같은 그런 퇴장이죠.


영화는 당신의 가장 가까이에 있으면서 온갖 허드렛일(드러운 감정)을 다 해주는 좋은 친구다, 그리고 그 친구는 당신이 위태로울 때 당신의 정신을 번쩍 들게 해주고 그 더러운 현실과 맞서 싸울 힘을 줄지도 몰라. 눈이 반쯤 풀려있으면서 뭐... 나만 믿으라구... 내가 여차하면 다 혼내줄테니까... 하고 입터는, 넉넉하고도 괜히 믿어보고 싶은 그런 메시지가 아닐까. 저는 이 영화를 그렇게 봤습니다. 그리고 브래드 피트가 연기자로서 아주 좋아졌습니다. 영화와 현실이 어떻게 만나는지 그 초현실적인 지점을 좀 짚어보고 싶은데 지금은 머리가 좀 띵해서...

    • 정말 배우들 많이 나오죠 꼬마 줄리아 버터스도, 브래드 피트가 최고였어요
      • 정말 좋은 배우입니다. 스타로서의 자의식과 위치를 잘 버리고 털털하게 연기 잘 하는 것 같아요

    • 영화 속에서 클리프 부스에게 떠도는 소문 중, 아내를 죽였다는 소문이 아무래도 당연하지만 명쾌하게 해명되지 않아서 많이 찝찝했어요.


      그런 상태에서 면죄부가 주어진 상대에게 일방적으로 폭력을 쏟아붓는 장면에 통쾌하기만 하기는 어렵더라구요.

      • 네 그 장면이 조금 찜찜하기는 합니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마지막 씬은 저렇게까지 해야하나 싶은 장면이 되서 길티플레져도 아니고 그냥 길티가 되죠...

      • 작중 클리프의 아내의 죽음 관련 내용은 나탈리 우드의 의문사가 떠오르더군요. 타란티노가  OUATIH를 만들때 참고한 작품 중에는 폴 마저스키 감독의 1969년작 'Bob & Carol & Ted & Alice'(나탈리 우드,로버트 컬프, 엘리엇 굴드, 다이언 캐넌 출연)도 있다던데...

      • 로버트 와그너 생각이 나지요. 나탈리 우드와 같이 배타고 가서 혼자만 돌아온. 

        • 아, 레퍼런스가 있군요. 전 이런 건 잘 모릅니다. 찾아봐야겠네요.

    • 지루하지 않게 봤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의 감흥이 그렇게 크지는 않았는데 끝나고 나서 이상하게 마음이 쓰이는 영화였습니다.


      결말이 뭉클해서였을까요. 실제 세계에서는 끔찍한 사건의 피해자였던 사람들이 털끝 하나 다치지 않고 '무슨 일 있었어?' 정도의 해프닝으로, 악랄한 침입자들에게 방해받지 않은 그들의 행복한 시간을 이어나갈 수 있게 되는 결말이 슬프고 예쁘더라구요. 그랬다면 좋았을 결말이, 실제로는 없었던 시간이어서 더 안타깝고 서글프게 느껴졌던 것 같습니다.


      그 사건에 대해서는 로만 폴란스키 감독에게 이런 일이 있었다는 짧은 사연 수준으로만 들어서 알고 있었으니, 우리가 알고 있는 친숙한 사람과 배경으로 이런 컨셉의 영화가 나왔다면 sonny님이 말씀하신 것처럼 영화를 보면서 느끼는 감정이 훨씬 진하고 달랐겠죠.


      사건을 직접 겪은 폴란스키 감독은 이 영화를 보면서 어떤 생각이 들었을지 궁금하네요..


      영화를 보는 시간 동안 직접 느끼는 감흥이 바로 체감되기보다, 보고나서 마음이 쓰이고 어딘가 먹먹한 기분으로 생각하게 되는 영화가 있는데 미쓰 홍당무와 이 영화가 그랬습니다.
      • 정망 이상하게 아련한 영화입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04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38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48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5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0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1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26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48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4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29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3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6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6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2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5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