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말씀

카톨릭 신도가 아님에도 일 년에 한두 번 마음이 심산할 때 성당에 가 미사에 참례합니다. "미사가 끝났으니 이제 세상으로 나가 복음을 전합시다"는 신부님의 말이 마음에 얹힐 때 열리는 환한 세상이 좋아서요.  
집으로 돌아오는 길, 바람은 여일하게 조용히 불지만 그 속에는 돌이킬 수 없이 변해버린 무엇인가가 담겨 있기 마련이죠. 언제나 그것이면 족했습니다. '한 말씀만 하소서. 내 슬픔이 나으리이다.'

닷새 전, 고딩 때 저를 많이 예뻐해주셨던 은사님이 갑자기 돌아가셨습니다. 고통의 끝판이라는 췌장암이었다고 해요. 고 1때 담임선생님이었고 국어 담당이셨어요. 단아하고 고운 모습에다 수녀원에서 유기서원까지 받은 후 환속한 분이라는 게 알려지면서 신비로운 이미지가 더해져 교내에서 인기가 높았던 분이었습니다.
선생님의 수업을 듣던 첫 어버이 날, 우리에게 부모님에게 보내는 편지를 써오라는 과제를 내셨더랬어요. '아, 싫어라~'라는 기분으로 괴발개발 써서 제출했는데, 다음날 종례 때 저를 콕 찝어 교무실로 부르시더군요. 그날 교무실에서 벌 서는 자세로 선생님에게 들었던 놀라운 한 말씀. "부모님에 대한 이토록 아찔하고 멋있는 글을 난생 처음 읽어봤단다." (그 말씀에 에?  갸우뚱~ 했던 느낌을 지금도 기억해요. - -)
 
미사를 마치고 돌아오는 길,  누구나 선생님의 그 '한 말씀'과 같은 무엇을 기다리며 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한 말씀 말이란 우리가 이정표 삼아 걷다가 지나쳐온  모든 순간들을 의미해요. 더 이상 말이 아닌 무엇이 될 때에야 완성되는 것, 그것이 한 말씀입니다. 그 말 너머에서 비로소 꽃은 피고, 사람들은 걷기 시작하며,  마주보는 얼굴들은 서로를 이해하게 되는 거라는 생각이 들어요.

섬광이며 암흑인 한 말씀은 언젠가 제 안의 A가 닫고 나간 문이며 또 제 안의 B가 열고 들어왔던 문입니다. 되돌이킬 수 없이 삶을 변화시키는 계기들은 모두가 하나씩의 한 말씀인 것 아닐까요. 한 말씀 이후에도 여전히 '말'이 부족하다는 생각 또한 하나의 말씀일 것입니다.
많고도 다양한 한 말씀들을 모두 모아 하나의 얼굴로 보고자 할 때, 사람들은 불현듯 무릎을 꿇고 기쁨과 절망에 사로잡히게 됩니다. 한 말씀들로 가득찬 삶이란 결국 우리가 살아왔고 살아갈 시간들이지만, 그것은 애초에 얼마나 아름다운 긴장이며 또 얼마나 흔적없이 위대했던 것일까요.

덧: 선생님은 평생 비혼자로 사셨어요. 팔순 노모가 장례를 주관하셨는데, 아침에 이런 문자를 받았습니다. " 학창시절 네가 쓴 글들을 ##이가 다 보관해뒀으니 언제든 와서 가져가시게." 
여태 심장이 쿵쿵 내려앉고 있어요.

    • 왠지 영화 벌새의 한 시퀀스가 떠오르게 하는 이야기네요. 가르치고 있는 학생의 반짝거리는 순간을 포착하셨을 때, 선생님의 마음은 얼마나 두근거리셨을까요.

      은사분의 영면을 빕니다.

      • 선생님에게 저희 학년이 첫제자들이었던지라 보통이 아닌 정성을 들이셨던 것 같아요. 우리를 선생이나 부모의 마음이 아니라 애인의 마음으로 보듬으셨다는 걸 더 나이 들고나서야 뒤늦게 깨달았죠. 제게 원치 않는 큰 기대를 하셨는데, 누군가의 기대가 싫을 나이라 삼년 내내 선생님을 피해다녔더랬습니다. - -
        그래도 선생님의 사랑의 크기를 알기에 돌아가시기 전까지 소식 전하고 만나뵙기도 했어요. 빈소에 갔더니 밀라노 근무시절에 보내드린 묵주와 성모반지가 영정사진 앞에 놓여 있더군요. (이탈리아 산 성물들이 참 예뻐요.)
        빈소에선 안 울었는데, 그날 밤 잠자리에서 펑펑 눈물을 쏟았습니다.
    • 님은 너무 예쁜 제자였네요 그냥 쓴 마음을 정성껏 진실로 가다듬어 주고 가셨어요 명복을 빕니다
      • 예쁘지 않고 시건방진 제자였어요. 수업 중에 선생님이 질문으로 말 걸어 오시면 당황스런 재질문으로 되받아치곤 했죠. 그러면 환한 미소로 "얘들아, 이런 게 절제된 의문이라는 거란다."라며 감싸안아주곤 하셨어요.
        폰 시대에 전화가 아니라 꼬박꼬박 메일로 저와 소통하신 것 보면 제 말보다 글을 좋아하셨던 게 분명하죠. (먼산)

    • 박완서 작가님이 아드님을 잃고 쓰신 수필집, 한말씀만 하소서가 생각나는 글이네요. 선생님의 가는 길 평안하셨길 빕니다. 


      그리고 어디로 갈까님의 고등학교 때 글을 모은 책 출판을 응원합니다. 2부는 머저리와의 카톡. 내실 책이 두꺼울 것 같네요~!

      • 지금보다 집중력이 좋았던 시절이라 아마 화력이 센 글을 썼을 거예요.  모아두셨다는 옛글들을 가져오긴 하겠지만 읽어볼 자신은 없습니다.  이런저런 매체에서 고교생 글을 청탁받으면 수업 중에도 교무실로 불러내 원고를 쓰게 했고 온갖 전국 백일장에 다 내보내셨죠. (절레절레~)
        우리학교는 수업 시작 전에 몇분의 선생님들이 돌아가며 아침 훈화의 한말씀을 방송하곤 했는데, 선생님 차례에는 제게 원고를 쓰게 하셨지 뭐예요. 얼마나 같잖은 메시지들이었는지 그 내용들은 약간 궁금합니다. 맥주 몇 캔 딴 후 그 원고들만은 한번 슥 읽어보게 될런지도 모르겠.... -_-

    • 선생님의 명복과 영면을 빕니다. 스산한 계절 가을이네요. 

      • 요즘 날이 계속 맑아서 새벽하늘을 올려다 보노라면 바람, 별, 새들이 어우러져 어떤 신호를 보내와요. 
        시계와도 눈을 맞춘 후 선생님의 별 하나를 선정했답니다. 언제 제 눈에서 사라져버릴런지는 모르지만...

    • 글이 미끄러지듯 편안한게 부모님께 쓰신 편지도 선생님 말씀처럼 멋질거같은데요

      • 기억이 희미한데, 부모님에 대한 사랑과 감사의 글은 아니었고,  부모와 자식이라는 절대적 인연의 긴장감에 대해 주절주절 썼던 것 같아요. - -

        • 저는 글쓰는건 타고나는거라 생각하는사람이라... 아마 학창시절부터 잘쓰셨겠지요.....

    • 뒤돌아볼 때 삶은 참 몇몇 일화로 함축되더군요. 그것들만이 자신을 만들진 않았겠지만, 기억나는게 그것뿐인걸 어쩌겠어요.


      덧을 읽으며 제 심장도 함께 쿵 하고 떨어지는 느낌이 들었네요. 어머님께서 유류품의 내역을 알고 계셨다는 부분에서도요.


      가을 날씨가 차네요, 따뜻하게 지내세요.

      • 제 심장이 왜 덜컥 내려앉았는지 포착해내신 예리함에 마음과 얼굴이 발개졌어요. 듀게엔 글을 정독하시는 분들이 많구나~ 하는 새삼스런 깨달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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