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때

봄바람 수준은 이미 한참 벗어난 어제오늘의 돌풍으로 덜컹거리는 문소리를 듣고 있자니 점점 심장이 두근거리고 배가 아프네요.

며칠 전 한 사람이 “그걸 어디다 말할 곳도 없고... 말해봐야 무슨 소용이 있겠나” 하면서 웃는 걸 봤어요. 그의 유년 시절 일화를 좀 들은 적이 있기에 아 그렇게 외롭고 거칠었던 얘기 말고 더 깊은 상처가 있는 거구나 싶었어요. 외도로 사라진 아버지는 소식이 없고 한밤중에 삼촌이란 사람이 칼을 들고 찾아와 그와 그의 어머니를 죽이려고 했었단 이야기를 듣고 어떻게 대답할지 몰라서 허둥댔던 기억이 있는데. 그보다 더 깊은 상처라니 그게 뭘까 궁금해 하기도 어렵더라고요.

최근 그의 어머니가 수술을 받게 돼서 병원을 다니게 되자 유년의 그 순간이 더 떠오른다고 해요. 그리고 자식을 낳아 보니 도무지 이해가 안 되는 자기 부모의 행태가 이 나이를 먹도록 점점 더 치가 떨린다고. 짐짓 위로인지 공감인지 모를 대답이 잘 떠오르질 않아서 “사람이 울어야할 때 못 울고 지나가면 어떤 식으로든 반드시 튀어나온대요. 말해 뭐하나 하시지 말고 어디에라도 털어놔 보시죠....” 라고 말하니까 그가 쓸쓸하게 웃더군요. “시간이 너무 지난 것 같아요. 기억은 또렷한데 뭘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네요.”

사실 그 얘긴 저 스스로에게 하는 말이기도 했어요. 덜컹거리는 문이나 차가운 시멘트 바닥을 보면 떠오르는 거친 편린들이 다 거기서 비롯됐구나... 내가 그때 제대로 못 울었고 어디다 털어놓질 못했구나. 그래서 정처 없기가 이를 데 없구나. 그러다가도 아 뭐 이제 와서 다 무슨 소용이야 그냥 살아 있으니 사는 거지 이제 와 털어놓는다고 뭐가 달라지나 하죠. 왜 그랬냐고 따질 사람과 미안하다고 들을 사람이 같지만, 알면서도 왜 모른 척 했냐며 따지고 싶은 사람도 있고 분명 난 아니라며 우길 거라 예상되기도 하지만. 세월이 흘러 잡아뗀다고 있었던 사실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까.... 꽤 자주 ‘나 상담을 한번 받아볼까’ 하는 것 같아요.

외형적으로는 사건 사고 없이 밝게 자라서 쿨하고 당당한 컨셉인데. 뭐 그렇다고 그 컨셉 들킬까 노심초사하며 장황하게 센척하는 식은 아니고. 그냥 어릴 때부터 굳이 내 상처 보여줘 봐야 좋을 거 하나도 없다는 생각 같은 걸 하기 시작한 것 같아요. 제 어린 시절 유일한 위로였던 카뮈의 영향도 큰 것 같고. 피 철철 흐르는 팔뚝 보여주면서 같이 울어줘 하는 거만큼 끔찍한 게 어딨겠어요. 그리고 사람들은 남의 불행으로 위안 삼는 것을 참 쉽게 생각하더라고요. 딱히 악의로 가득한 사람도 아니고 그냥 평범한 사람들이 그러죠. 그래서 돈을 지불한 심리상담사에게 털어놓으면 좀 나은 걸까요? 심리상담사는 내 불행으로 위안 삼는 사람이 아니니까? 음.

정말 모르겠어요.
아무런 계기도 개연성도 없이 그냥 지 혼자 휙 나타나서 흔들어놓고 가버리는 ‘그때’를 어떻게 해야 할지. 나의 양지바른 언덕에게도 말하지 못한 얘기를. 적지 않은 세월 동안 애인에게도 말하지 않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걸 보면, 그때를 말하는 것이 오히려 나란 인간에겐 독이 되는 건가도 싶고... 그냥 묻고 잊고 외면하는 게 맞는 건지. 며칠 전 그 사람 말대로. 시간이 너무 흘렀네요. 왜 그랬냐고 소리쳐도 아무 소용 없을 그런 날이 온 것 같아요.

그냥 그때가 나타나면 아 왔니 오늘은 얼마나 흔들고 갈 거니 하면서 살아가야 하나 봐요.
    • 그분 말대로 시간이 너무 지난 그때 쯤에서도 기억은 있는데 애들 머리 흔들어주듯 하기도 하고 가끔은 속상하기도 하고 그렇죠
      • 섬 하나가 통째로 사라지는 걸 본 사람은 자갈밭에 굴러도 아픈 줄 모르는 것 같아요. 네 흔들흔들. 매일 울부짖을 것도 없이 -
    • 상담사라는 직업은 바로 그래서 있는거라고 생각해요. 아무리 가까운사람이라도 자기내부의 지옥도를 보게하는건 민폐란 생각만 들어요. 나라도 다른사람의 너무깊은 사연을 구구절절 듣는거....그 힘겨움은 놔두고 일단 그와의 관계에도 변화가 오니까. 차라리 일정의 돈을주고 하고싶은 말 다 하고 덤으로 치료도 가능하다면 더 좋고.

      설면서 나 하고싶은얘기를 내 맘에 차도록 들어주는 사람은 거의 없었어요. 다들 다가와서 실컷 자기하소연하는 사람은 넘쳐났지만. 그러던 제가 정작 제 얘기를 시작했더니 슬금슬금 사람들이 사라지는 경험끝에 내린 결론입니다. 상담은 전문가에게 하자. 사람들은 밝은 사람을 선호한다 ...

      맞는 상담사를 찿으시길 권하고 싶어요 ..그것도 쉽지는 않더라구요.
      • 슬금슬금 사람들이 사라지는.... 대목에서 마음이 아프네요.


        언제까지 쿨한 척을 하면서 속에선 피눈물이 나도 생글거려야 할까요. 청승 진상짓 안 하려고 너무 긴 세월을 낭비했나도 싶고 ㅋㅋ 뒷모습 신경쓰면 인생 고달프다던 우리 큰언니 말씀이 자꾸 생각나요. 자기연민을 경멸했던 지난날도 이젠 뭔가 시건방이 아니었나도 싶고 좀 헷갈려요. 내가 나 좀 가여워 해주는 게 뭐 그리 나쁘다고..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 동생이 어릴때는 울고, 성인이 되서는 자기의 마음을 치유하는 많은 노력을 하더군요. 하나 해서 진도 나가고 막히면 또 다른것을 시도해 보고.


          그런 모습을 보면서 내심 동생이 약하다고 경멸의 마음까지도 가졌던거 같습니다. 전 잘 놀고 과거는 돌아보지 않고 무심하게 세월을 보냈거든요.


          20년이 지난 지금은 동생은 단단해졌고 전 속이 삭은 물건이 된거 같아요.


          단단해져서 부드러울수 있는 동생이 절 많이 도와줍니다. 늦게나마 과거를 떠나보낼 수 있도록요.

          • 한겨울에 언채로 땅에 떨어져 죽는 새도 자기자신을 동정하지 않는다고 하죠. 오직 인간만이 자기연민의 늪속에서 허우적대다 타인을 할퀴고 괴롭게 하는 비극을 나는 좀 비켜가자 다짐한 건데, 그역시 순리를 따르지 않은 부작용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참 어이 없죠. 그동안 나는 자기연민 같은 거 없이 단단하고 산뜻하게 모두 잊고 하하하 잘 살았다고 '착각'한 것만 같은 섬뜩함이 불현듯 찾아오다니. 자주 경멸했던 넘치는 자기애와 자기연민에 대한 시선을 고쳐먹어야하나 요즘 그런 생각이 좀 듭니다. 근데 너무 뒷북 아닌가 싶어요. 대략 30년을 연기했으면 혹시 그게 편한 거 아닌가? ㄴㄴ 상담을 받아보자 ㄱㄱ 이러는 듯...


            동생분이 순리대로 자신을 흘러가게 놔둔 것 같네요.... 적어주신 내용 계속 보면서 생각 많이 했습니다. 뭐라고 답해야할지 자꾸 망설이는 중이에요. 댓글 감사하다고 적으려니 이것도 왜이리 민망한지 ...
    • 저도 그런 감정이 있는 것 같아요. 저는 이제 "저 어렸을때.." 로 시작하는 얘기하기가 지긋지긋해서 안가고있습니다.

      • 역시 ... 그렇죠? 입 다물까봐요. 이제 와서 무슨 소용일까요 ㅎ
    • 힘든 세월이어서 그랬는가, 다 잊으려고 노력을 해서 기억이 거의 없네요.


      문제는 그때의 기분인 분노와 증오만 남아 있고 그 감정이 왜 생겼는지 기억이 없고 다 까맣습니다. 


      이제는 과거를 털어버리고 싶은데 거슬러 올라갈 길이 끊긴거 같아요.

      • 아득하죠... 어쩔 수 없는 것 같아요..
    • 지금보다 더 젊었던 한 때는, 내가 어떤 삶을 살아왔는지 오늘은 꼭 말할 거야, 라고 날마다 다짐을 하고 누군가를 만났던 기억도 있었지만 단 한 번도 그래본 적은 없었습니다. 안 했다기보다 끝내 못했다는 게 맞을 거에요. 심지어 피를 나눈 친자매조차 n십년 만에 저에게서 처음 듣고, 처음 아는 얘기들에 놀랄 정도로. 그때마다 느낀 것은 부모자식 포함한 평범하고 선량한 가족이라도 결국 자기 보고싶은 것만 보고 듣고 싶은 것만 원한다, 라는 결론이었어요. 한 때는 살아온 모든 삶을, 불치의 아픈 지점을 여과없이 맥락없이 다 털어놓고 싶은 때가 많았죠. 그게 사랑하는 연인이든, 친구든, 가족이든, 아니면 번호만 알고 일면식 없는 아무 누군가에게 공중전화를 걸어서라도. 하지만 그럴 수 없었고 그러지 못했고, 결국 그러지 않은게 다행이라는 걸 이제와서 느껴요. 가장 사랑하는 사람에게도 말하지 못하는 외로움까지 견디고 나니 더 이상의 고독도 세상 두려울 것도 없고, 그래서 사람이 나 아닌 타인에게 사랑받고 이해받아야 한다는 기대를 다 버리고 나서 오히려 홀가분하고 가뿐해졌어요. 놀랍도록 평화가 찾아온 순간이었죠. 돈을 들여 전문상담을 받는 방법도 있겠지만, 영원히 다친 내 생장점과 치명에 대해 너무 어렵게 꺼내 놓으면서 지불까지 해야하는 그 비싼 비용을 다른데 아낌없이 써버리는 것이 저에겐 오히려 더 좋았던 결과라고 생각해요. 물론 나도 나약한 사람이니까 아직도 완성형은 아닐 것이고 어떤 순간 악! 소리 나지만... 죽는 거 아니면 다 별 거 아닌 것 같아요...

      • 경험 나눠주셔서 감사해요. 아마 쿠델카님이 아는 것보다 훨씬 더 고상한 천성이라 어딘가에 발가벗고 울부짖지 못했을 것 같아요. 이제껏 해오신 것처럼 명민하고 기품 있게 잘 살아가시길 바랄게요.


        까지 쓰긴 썼는데. 어쩔 수 없나봐요 ;; 쿠델카님이 어떻게든 똑바로 서서 어깨 쫙 펴고 걷는 것 같아 좀 뭉클합니다. 자신의 방식대로 멀쩡히 잘 사는 사람을 내맘대로 가여워하는 감정은 아니고요. 그냥.... 늘 고통과 부지런히 정면승부를 하시는 것 같아서 안타까운데, 다행인 기분이 들어요. 이게 뭔 소릴까요... 쿠델카님, 내내 건강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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