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수선한 세상, 심란한 마음

1. 대학시절, 과 전체가 공동책임져야 할 불미스런 사건이 발생했을 때 은사님이 꾸중 대신 하셨던 말씀이 의식의 수면 위에 떠올라 있습니다. 
"게으른 학생이 좋아하는 선생은 안도감을 주는 선생이다. 자신이 이미 알고 있는 걸 다시 멋있게 말해주는 선생.
그러나 너희가 요구해야 하는 건 너희가 아직 보지 못한 것을 제시하는 선생이다. 지식의 넓이와 깊이 문제가 아니라, 너희에게 낯선 세계를 낯설게 보여주므로써 지금까지 너희가 살아온 방식을 불편하게 하는 선생을 말하는 것이다."

'선생' 자리에다 작가/철학자/예술가/ 정치인을 대입해도 통할 지적이라고 생각했었는데,  요즘 한국 정치계의 흐름을 보노라면 대중이 듣고 싶은 말을 해줘서 안도감을 주는 정치인이 역시 인기 갑인 것 같습니다. 낯선 주장과 언설로 걱정/불안하게 만드는 정치인은 분열분자로 낙인찍혀 제쳐지는데, 그런 인물이 없는 정치란 상상만으로도 오싹한 나라 아닌가요? 
살이 부딪고 피가 튄 역사와 이 시대의 안이한 욕망이 충돌하는 현장을, 그것이 앞으로 야기할 비극을, 먼눈으로 지켜보고 있습니다. 세종이 진저리쳤 듯 '여뀌잎처럼 작은 나라에서 간장종지 같은 마음으로 당쟁정치 하는 인간들'이 왜 그리 많은 건지. - -

2. 한때 밈[meme]이란 개념 - 계속 변화하고 진화하면서 사람과 사람 사이에 전파되는 정보나 아이디어- 가 주목받았죠. 그러나 이젠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난 듯싶어요. 밈을 파생시킨 유전자가 결정론적 개념이라서 그런 걸까요. 
아무튼 covid-19가 어찌저찌 일단 마무리되더라도, 이 바이러스는 인간과 어떤 식으로든 공생 관계를 맺고 서로 던지고 담으며 앞으로 쭉 같이 가게 될 것 같은 예감이 듭니다. 그런 관계에서 인간은  진화된 행위 양식을 발견하게 되기 마련인데,  결과 중심이 아닌 과정 중심으로 흘러가기 마련이라 밈과는 궤를 달리하게 되는 것 아닐까 싶어요.

3. 어제 단골 카페에 갔더니 손님이 확 줄었다며 주인이 시무룩해 하더군요. 그러면서 한마디 던지기를  " 앞으론 인간을 포함해서 이런저런 재앙들끼리 경쟁하는 세상이 도래하겠죠?"
자기만 해도 지구의 기후변화를 걱정해서 코로나 사태 이전엔 자주 대중교통을 이용했으나, 몇 주째 '사회적 거리두기'를 위해 대형 SUV 자차만을 사용하는  걸로 '자기만의 공간'을 확보하고 있다는 토로였어요. 여전히 지구 온난화라는 재앙의 바운더리에 있지만, '일단 살아남아야하는' 초근접 재앙 앞에서는 내 목숨이 먼저여서 지구 안전에는 과감하게 눈감게 되더라고. - -

그의 말을 듣노라니 제임스 러브록이 주장한 '가이아 이론'이 떠오르더군요. 러브록의 견해로는 우리가 살고 있는 지구는 살아있는 거대한 유기체이고, 지구의 생물권은 환경에 적응하기만 하는 소극적인 존재가 아니라 지구의 물리화학적 환경을 변화시키는 능동적인 존재라죠.
그렇다면 covid 19 바이러스는 인간에 대한 비인간으로서  행위자actant 연결망을 촉발하는 소동을 일으키고 있는 것인데요. 그래서 한때 주목받았던 밈이 사람들의 관심에서 밀려난 것인지도...

4. 우리보다 뒤늦게 서유럽이 초토화되고 있는 중이라 업무에 여러 차질이 생기고 있습니다.  동료들의 출장이 취소되어서 온라인으로만 소통하노라니 진행도 더디고 의외의 문제들이 불거져나오네요. 만약 이 바이러스 사태가 장기적 국면으로 돌입하여 이런 식의 업무 모드가 계속되면,  제 체력보다 정신력이 먼저 손들고 나가떨어질런지도 모르겠어요. 
지금 같은 재앙 경쟁의 시대에는 전 시대에게서 전해받은 지식이 많은 사람보다 위기상황의 매뉴얼을 겸손하게 받아들이고 실천하는 사람들이 더 사회를 지탱하는 힘이겠다는 생각이 확연히 듭니다.

5. 뜬금없이 떠오르는 햄릿의 독백.
"호두껍데기 속에 고립되어 있어도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나는 무한차원의 왕이다."
(듀게인 모두 무한차원의 왕/여왕으로 이 위기를 지나시기를... -_-)
    • 햄릿은 읽어보았는데 왜 저런 멋진 독백이 생각 안 날까...ㅜㅠ  다시 읽어보자~!
      • 셰익스피어의 희곡에는 시대의 정서를 뛰어넘는 통찰이 있어요. 햄릿은 리어왕과 더불어 명언의 보고인데,  제가 좋아하는 대사 중 지금 생각나는 거로는
        - 저 해골도 한때 혀가 있어 노래부른 적이 있었지.
        - 비수를 손에 들지 않고도 사람은 가시돋힌 말 속에 그걸 숨겨둘 수 있지.
        - 노인은  두 번 태어난 어린이다.
        - 너의 말은 네 맘 깊은 곳을 들여다보게 한다.
        • 건성으로 읽어서 그런지 호두껍데기 독백 대사가 어느 상황에서 나온 건지 전혀 모르겠네요.
          다른 대사와는 차원이 다르게 들려요. ㅎㅎ
          매트릭스 영화 생각났어요. 기계가 인간의 목 뒤에 접속선을 박고, 인간은 꿈속에서 살잖아요?
          그야말로 악몽만 꾸지 않는다면 그것이 이상적인 인류의 존재 양식이 아닌가 싶어요. ^^;
          • 2막 2장에 나오는 대사예요.


            저는 우주물리학의 신비를 풀어주는 책, 스티븐 호킹의 <호두껍질 속의 우주>를 읽으면서 저 말이 화인처럼 각인 됐죠. 


            호킹도 셰익스피어 마니아라는 인증을 책 제목으로. ㅎ 

    • 1번의 사례는 옳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원래 남의 인생이란 건 문제삼으려면 얼마든지 문제삼을 수 있는 법이고 교수쯤 되는 권위를 가진 사람이 제자 관계에 있는 사람에게 지적을 하면 상대는 그걸 무겁게 받아들일 수밖에 없으니까요. 그런데 인생이란 건 최고의 아웃풋은커녕 최선의 아웃풋만 달성해도 성공한 건데 남의 인생에 신경쓰이는 훈수질을 해 놓고 이후에 발생되는 비용은 나 몰라라 하는 건 옳은 태도가 아니라고 봐요.




       삶의 방식을 바꾸게 되면 그에 드는 비용이 있고 잃게 되는 기회비용도 있잖아요. 훈수를 하려면 그에 따르는 비용도 제공해주면서 해야지 말만 던지는 건 글쎄요. 대학생쯤 되면 최고는 아니어도 자신의 인생의 최선의 길을 걷기 시작할 나이인데 안도감과 응원을 제공해 주는 게 타인이 줄 수 있는 최선이 아닐까 싶네요. 어드바이스와 함께 비용을 제공할 게 아니라면요.

      • 3학년 2학기 기말시험 때였어요. 워낙 학점이 박한 선생님이라 그 과목 시험은 모두의  스트레스였죠. 하지만 오픈북 시험이므로 차분히 준비한 사람에겐 응분의 학점이 보장되는 편한 과목이기도 했어요. 
        당일, 시험 시간 전인데 강의실에 들어갔더니 웬열~  문제가 프린트된  시험지 더미가 교탁 위에 놓여 있더군요.  친구들 반 정도가 동요하더니 머리 맞대고 공동 답안지를 작성했죠. 나름 선생님의 매의 눈을 피한답시고 답안은 조금씩 다르게 쓰는 치밀함을 갖춰서요.

        시험시간이 되자 우리에겐 문제 항목이 같은 새 시험지가 배포됐어요. 그러나 공동답안을 작성한 친구들은 미리 작성해둔 도둑 시험지를 제출하고 나갔죠. 
        자, 그런데 거기엔 소름돋는 선생님의 음모가 있었으니, 미리 유출된 시험지는 선생님이 매직팬으로 옆면을 그어 표시해둔 덫이었던 거에요.
        뭣 때문에 우리에게 그런 테스트를 하신 건지는 지금도 모릅니다. 아무튼 도둑 시험지를 제출한 학생에겐 F학점은 물론 재수강의 기회도 박탈한다는 공고가 있었어요. 필수 이수과목이었으므로 졸업이 안 된다는 의미였죠.

        과 전체가 멘붕에 빠졌습니다. 과 대표가 어떻게든 사태를 수습해보려 했는데, 선생님께 읍소하는 일에 제가 동참해주기를 간곡히 청했어요. 선생님이 제게 내린 공식별명이 '건방진 놈'이었을 정도로 선생님을 겁 안 내는 제자였거든요. 
        아무튼 션생님 댁으로 빌러간 날이었습니다. 두 시간을 그댁 거실에서 벌 선 후에야 선생님이 냉냉한 얼굴로 나타나셨어요. (그나마 사모님의 애절한 간청 덕~) 그리곤 당신의 결정을 관철할 거니 무망한 짓 말고 그만 돌아가라는 싸늘한 통고를 하시더군요.
        그순간 제 성질머리가 욱하고 작동했죠. " 그 현장을 보고도 묵과한 잘못이 있으니  범죄은닉죄로 제 학점도 같이 날려주세요~" 
        그때 옆에서  과대표가 '망했구나'하고 푹푹 쉬던 한숨소리가 지금도 절망의 순간이면 불쑥 기억납니다. ㅋ

        며칠 후, 다른 학년까지 과 전체가 소집됐고 선생님이 우리에게 저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F 학점만 날리고는 재수강이 아니라 재시험의 기회를 주셨습니다. 어떤 친구들은 가장 참담하게 그 사건을 기억하지만, 제겐 <thinker>라는 개념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는 계기가 됐어요. 네 뭐.... 

    • 음. 제가 생략한 은사님 말씀의 배경과 안유미님의 경험이 갖는 어떤 트라우마가 충돌한 듯싶네요.
      댓글의 의미가 알둣 모를듯 애매합니다.
      제가 지금 (대부분의 분들에겐 초저녁일 시간이지만)  너무 졸려서 그만 자러갑니다. 내일 일어나면 저 말씀이 나온 배경을 함 적어보겠습니다.

      • "지금까지 너희가 살아온 방식을 불편하게 하는 선생을 말하는 것이다."라는 문구 때문에용. 그정도로 남의 인생을 판단할 깜냥이 되는 인간은 없다고 보거든요.




        한데 예로 드신 일화는 빼도박도 못하게 도둑질이네요; 물론 저런 테스트가 너무 사람 간보는거 같긴 한데...어쨌든 도둑질은 나쁜 거니.


    • 나 저때 한번 살았었나봐요 햄릿이 나 따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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