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준호의 수상소감

짤린 영상으로만 해당 부분을 봤는데요. 봉준호의 작품상 수상소감은 굉장히 재미있었습니다. 그에 대한 미국인들의 반응이 또 웃겼구요. 아무리 패기와 자신감을 사랑한다 해도 사람들은 결국 그런 사람조차 객석에 앉아있는 사람들을 위해 고개를 숙일 줄 아는, 겸허한 사람을 사랑하는 거죠. 


대충 요약하면 이 수상소감의 시작은 봉준호가 아카데미 시상식을 두고 로컬 영화제라고 농을 친 부분부터일 겁니다. 영화계에는 흔히 두 개의 시상식이 있잖아요, 아트 영화, 대중 영화. 아트 영화 축제의 끝판왕은 깐느이고 대중 영화 축제의 끝판왕은 아카데미입니다. 아주 러프하게 나눈다면 그렇다는거죠. 미국영화인들의 축제지만 사실상 대중 영화 전반을 지배하는 것은 미국의 헐리웃이니까. 이 두개의 판을 두고 깐느를 정복해버린 아시안 감독이 하나 등장합니다. 미국인들은 슬슬 이 아시안 감독의 영화에 열광하고 있었구요. 아카데미 시상식에 왜 한국영화가 후보로 오르지 못하냐는 질문에 봉준호는 이렇게 대답해버렸습니다. 그거 로컬 영화제인데 딱히 이상한 일도 아니지. 안그래도 대중성과 작품성 평가에서 갈 수록 그들만의 잔치로 전락한다는 비판에 시달리던 아카데미를 아주 멋지게 먹인 한방이었습니다. 황금종려잎을 머리에 두르고 있는 자가 자기네 축제를 대수롭지 않게 말하는데 어찌 버튼이 안눌릴 수 있겠어요. 아카데미는 이미 이 도전을 피할 수가 없었습니다. 피하는 순간 다시 그들만의 잔치로 격이 떨어지니까요. 


그 다음 영국에서 봉준호는 1인치의 자막만 넘어가면 멋진 영화들이 있다며 소감을 말합니다. 그래봐야 지들끼리, 다른 어딘가에서는 나를 인정해주는 사람들에게는 우리가 서로 보는 눈이 있다며 포옹, 그래서 아카데미에서의 파격적 수상은 차근차근 명분을 쌓아나간 것 같은 느낌이 있습니다. 깐느에서도 인정받았고, 영국에서도, 골든글로브에서도 인정받은 나를 아카데미 너희는 어떻게 평가할건데? 또 꼰대로 전락할거냐? 분위기가 아주 요상하게 돌아갔죠. 미국인들도 자기네들의 위선에 질려가는 마당에 이 아시아의 풍운아가 일으킨 파란이 너무나 즐거웠고.


우리의 포부를 보여주마! 윈윈 아니면 루즈루즈만 있던 이 양자택일에서 아카데미는 아주 대범하게도 연기상을 제외한 알짜배기 상들을 다 기생충에 몰아줬습니다. 그런데 그게 또 이상하지 않았던 게 경쟁작들이 심하게 미국, 백인, 남자 같은 이야기였기 때문이죠. 좋은 작품이지만 결국 아카데미 풀 안에 있는 범작들이라고 할까요. 아카데미는 오히려 <기생충>의 명성에 기생한 것 같기도 합니다. 아무리 우리가 고인 물이어도 너 같은 변종천재를 알아볼 눈은 있다! 이변은 이변이지만 작품 자체로 놓고보면 충분히 설득력이 있는 초이스였습니다. 오히려 많은 사람들이 바라는 합리적 판단이기도 했구요.


자, 이제 이 갑툭튀 아시안 감독에게 아카데미가 자신들의 관용을 베풀었습니다. 그렇다면 뻔한 감사와 우리 (한국을 포함한) 다른 나라의 영화들도 사랑해달라 같은 말들이 이어질 차례이죠. 그런데 여기서 봉준호가 그 공을 미국영화에 돌려버렸습니다. 나는 가장 개인적인 것이 가장 창의적이라는 말을 되새기며 영화를 공부했다, 그리고 그 말을 한 것은... 여기 우리의 위대한, 마틴 스콜세지다. 아카데미를 부정하고 결국 인정할 수 밖에 없게 만들었던 외부인이, 그 공을 미국영화에 다시 돌린 것입니다. 어찌 미국인들이 감격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미국영화와는 뭔가 이질적이고 너무 한국스러운, 비미국스러운 이 이상한 영화를 기꺼이 "세계인"으로서 인정해줬는데 여기서 그가 "미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격상시켜줬으니 말이죠. 아메리칸 시네마의 전설이자 아버지, 미국인들이 미국영화에 품고 있는 자존심의 유일하다싶이한 증거를 그가 직접 언급해주는데 미국인들이 미국적 자부심을 지킬 수 있던 건 당연하죠. 그래 고맙다 짜식...!! 우리 미국영화, 스콜세지를 또 말해줘서!! 아무리 봐도 기립박수 칠 타이밍이나 맥락이 아닌데 미국인들이 기립박수를 마틴 스콜세지한테 보내고 있더라고요 ㅋㅋ 마틴 스콜세지가 <기생충>을 찍거나 봉준호를 가르친 것처럼 ㅋㅋ


미국영화에 대한 도전은 돌고 돌아 미국영화에 대한 은혜와 축복을 간증하는 자리로 모두에게 훈훈히 마무리되었다는 결말입니다... 전 이게 좀 웃기면서도 봉준호의 비즈니스적 지혜라고 해야하나, 그런 거에 좀 놀랐습니다. 인터뷰들이 아주 적절하게 사람들을 건드리는데, 그게 또 어쩔 수 없는 사실이면서 뭔가를 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드는 도발적인 예리함이 숨어있다고 해야하나요. 그리고 마지막에는 나를 인정해줘서 고마워, 그런데 나는 너희에게 사사받았던 사람이야 하며 감동의 포옹 ㅋ 당연히 립서비스뿐은 아니겠고 존경하던 거장에게 감사를 표하는 성공한 덕후의 가장 멋진 순간이기도 할 겁니다. 그럼에도 이 파격적 드라마가 위 러브 유, 논어메리칸 시네마. 아이 러브 유 투, 어메리칸 시네마로 마무리되는 걸 보면 역시 겸양과 존경이야말로 사람 혹은 행사를 가장 멋지게 만들어주는 게 아닐지...

    • 봉준호는 참 능력자인 것 같아요.

    • 선을 넘을 듯 넘을 듯 넘지 않는 점이 영리합니다.
    • 재능도 재능이지만 운도 너무 좋은 거 같아요.   

      • 이 점에 관해서는, 샤론 최라는 또 하나의 능력자를 만난 것도 운이었어요.

        영화제마다 어록에 가까운 명소감을 남길 수 있었던 것은, 정확함을 넘어 속마음까지 읽은 듯한 적절한 통역의 역할이 크나큰 도움이 된 것 같아요.
        • 최감독님 정말 엄청나더라고요. 미리 대본을 준거 아닌가 생각들정도로요.
    • 해외시상식에서의 기품은 박찬욱만 할 수 있는 건 줄 알았는데 봉준호 이야...


      감독상소감은 장내의 & TV보는 (기생충 선전에 흠..모드인) 외국인들 마음을 스르르 녹게 하고, 스콜세지를 쬐끔이라도 챙긴것에 모두가 마음 편안해지며, 봉편으로 만드는 소감이었죠. (각본상,외국어영화상과 달리 감독상 호명땐 놀랐는지 환호가 다소 적었거든요 ㅎ) 인용된 스콜세지 말 자체가 너무 좋았고요.


      실시간으로 소감 보면서 대박 대박 외쳤네요 ㅋㅋ

    • 재미있는 해석이고 결론적으로 보면 다 나름 맞는 말이기도 하지만 그렇게까지 계산적으로 보고 싶진 않아요. 전 봉 감독이 마틴옹을 언급한 것도 참 좋았지만 퀜틴 형을 언급하면서 고마운 마음을 표시한 것도 아주 좋았어요. 시상식 소감을 많이 봐온 건 아니지만 객석에 있는 관련된 분들을 꼭 찝어 언급하면서 좌중을 들었다 놨다하는 수상 소감도 오랜만에 보는 것 같아서 봉 감독 대단하다는 말밖에... 

      • 저도 봉이 여기선 이런 말 저기선 저런 말 이렇게 계획했을 것 같진 않구요 그냥 어떤 자세로 어떤 말을 하면 좋겠다 정도의 어렴풋한 방향만 있었던 것 같아요 ㅋ 미국인들의 반응도 무의식적인 프라이드였던 것 같고
    • 스콜세지 옹이랑 타란티노 등을 언급한 건 감독상에서예요. :)
    • 뒤늦게 영상 클립만 봤던 터라, 스콜세지 언급 때 기립에 의아하긴 했는데, 이런 맥락이 있었겠군요. 재밌어요.
    • 로컬 운운에 대해 많은 분들이 의미를 부여하시는군요. 찾아서 봐야겠네요. 상대가 우리 로컬 음식 받아먹으면 경계심이나 위화감이 무뎌지듯이, 스콜세지를 존경하고 타란티노를 사랑한다는 말에 큰 박수를 받은 것은 보기 괜찮았어요. 사람이 다 거기서 거기다싶고. 스콜세지 정도면 미국 한국 가를 거 없이 박수 받을만한 인물이고 오스카가 홀대하기도 했으니 부채감도 좀 있겠죠?타란티노는 전부터 기생충을 자주 언급했다니 고마울만도 하구요. 그치만 봉감독이 경직된 부분이 없었냐면 그것도 아닌 것 같아요. 저는 너무 청중을 의식한다는 생각도 조금 했습니다. 떨거나 감격하는 그런 인간적인 모습없이 굉장히 준비된 멘트를 하는 듯한.옆에서 공동작가가 충무로를 언급할 땐 (사람들 지루해하지 않게 끊으라는듯이)팔을 돌리기도 하고. 굳이 찾자면 그렇다는 거고 배우들 챙기고 노장 챙겨준 모습이 전체적으론 좋았죠.

      • 타란티노 언급은 자신만의 어쩌고 톱리스트들에 괴물, 살인의추억 올리고 그랬던걸 말하는걸 거예요. 기생충은 타란티노 영화랑 칸에서도 붙었던 작품인데다 타란티노의 서포트가 필요없;
        • 기생충을 미국인들이 잘 모를 때에도 자기 리스트에 올려서 홍보에 도움이 되었다고 수상소감 한 줄 알았는데 아닐까요.ㅎㅎ
          • 저런 씨네필들은 영화라는 언어로 통하는 면이 있다보니 '형님' 소리까지 할 정도로 친근한 마음을 품고 진짜로 순수하게 애정 표현을 한 거죠.
          • 딱 "기생충"이라고 하진 않았군요. 잘못 이해했네요.
        • 책임감이라는 말도 맞는데 분위기파악과 눈치보기에 힘을 쏟는 우리나라 사람 특성 같기도 했어요. 가식적이라는 뜻까지는 아니구요.
        • 사실 서포트는 필요없는 작품을 서포트한 것으로 "알러뷰"까지 날리는 것두 조금 부자연스럽긴 했구요. 해야 할 인사는 반드시 챙겨서 개념인이 되어야한다는 생각이 강하잖아요,우리가.
      • 저는 침착해서 보기 좋던데....

        그리고 원래 그런 사람들 있어요.

        책임감이 강하달까, 주변 사람들 챙기는 수상 소감도 그렇고 진심으로 그렇게 사는 사람도 있어요.

        그리고, 아카데미 시상식같이 평소 경험하기도 힘든 큰 무대에서 이런저런 계산할 틈이 어딨어요? 떨지 않고 할 말 하기도 힘들텐데...

        봉준호나 기생충 관련 글들마다 불필요하게 부정적이시네요.
        • 그런 글이 많으면 보태기 그럴텐데 저밖에 없어서 괜찮지 않을까 생각했어요.
        • "진짜로 순수하게","진심으로 그렇게" 이렇게 말씀하시는 정도에 비해 저는

          순한 맛으로 이의를 붙인 것 같은데 아닌가요.
        • 사실 이때쯤 이런 지적이 나올 것 같았어요.(당첨! )분위기 흐렸다면 미안하구요
    • 약간 아쉬웠던 건, 전세계가 공감하는 영화 자체의 주제의식에 대해 한 마디 정도 언급했었더라면 하는 점이에요. 한 외국인 평론가도 이 부분에 대해 얘기하는 것 같더군요. 


      시청률은 아카데미 역대 최저였다고..ㅎㅎ 흥미를 끄는 블록버스터가 없었는데다 그들 기준 비주류 영화가 주인공이 되는 바람에 재미가 없었나봅니다. 

      • 영화의 주제의식이 뭔지 전 아직도 궁금합니다. 열심히 찾아보지 않은 탓일 수 있겠지만. 그럴듯한 걸 못 봤네요. 저는 이분이 작가라기보다 그냥 테크니션 같아요. 간지나게 재밌게 만들줄 아는.
        • 빈부격차와 양극화 현상이요.

          • 그것까지는 새롭진 않은 것 같아서요.

            이렇게 얘기하면 하늘 아래 뭐 새로운 게 있냐고 여러 반론이 나오겠지만 뭐 후략하겠습니다.칸과 아카데미가 인정한 영화는 맞죠.
            • 주제는 슬프게도 더이상 새로울 수 없는 것이지만, 기생충의 새로움은 주제를 다룬 방식에 있겠지요.

    • 연기상 후보에 배우들이 하나도 올라가지 않았던 게 좀 아쉬워요. 백인들 주연이었으면 연기도 부문마다 한 명씩 다 올라갔을 거라고 농담하는 트윗을 봤었는데, 사실 맞는 거 같아요


      작품상, 각본상, 감독상까지 받은 영화에 배우 관련 수상이 하나도 없다니...!! (심지어 노미네이트 조차 안 되었다니... ㅜㅜ)

      • 외국인 보기엔 이정은 배우가 눈에 띄었겠지만 저는 조여정이 딱 맞는 옷을 입은 느낌이었거든요. 쨌든 외국어 대사라 연기상은 스킵인가보다..그렇게 생각했네요
      • 이건 북미배급사의 실책인거 같아요. 배우 캠페인은 송강호만 했는데 물론 좋은 배우지만 올해 남조 후보리스트를 보면 조여정이나 박소담을 여조후보 캠페인 했다면 가망성이 더 높지 않았을까 싶어요.
      • 다른 캠페인을 했어도 쉽지 않았을거라고 생각합니다. 그만큼 배우 한 명이 따로 돋보이지가 않는 앙상블 영화라서... 그래도 이걸 상징하는 SAG 베스트 앙상블 캐스트를 받은 것으로 인정받은 셈이죠.

      • 아카데미 배우상은 그냥 영화 한편 잘했다고 주는 건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인지도도 쌓고 연륜도 쌓이면서 후보로 여러해 오르내리기도 한 후에 받는 경우가 많아서 전혀 모르던 한국 배우에게 갑자기 주는 건 작품상보다 더 어렵지 않을까요?
    • 흥미로운 해석으로 지금까지 흘러온 상황을 아카데미 시점에서 짚어주신거 재밌게 잘 읽었어요. 이렇게 날카롭고 재치있는 글솜씨가 그저 부럽 ㅠ.ㅠ어느정도의 세련된 계산이 있었다고 해도 다시 보고 기억해도 마틴 스콜세지 감독에게 영광을 돌리고 모두가 기립하고 박수치던 그 순간은 영화인들 모두의 순수한 감동과 경외감때문에 마음이 떨리는 시간이라서 마음에 소중히 간직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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