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마음이 다 닳고

1. "자기 인생에 대한 그릇된 고정관념에 매달려 평생을 허비하는 게 인간이다."
뒤렌마트의 말이지만 꼭 그만이 할 수 있는 말은 아니죠. 대개의 사람들이 자신의 인생이 어떤 식으로 되어가야 한다고 여기는 형태에 대한 고정관념을 갖고 있는 듯싶어요. 뿌리는 땅 속에, 줄기는 곧게, 가지와 잎과 열매는 이러저러하게 라는 식으로요.
아직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형식이라 해도 사람들은 그것을 앞서 지각합니다. 한 개인이 그렇고 한 시대가 그렇습니다. 지각의 변동은 존재의 변동이고 시대의 변동이죠. 중세와 르네상스의 이행기, 근대와 현대의 이행기가 그랬듯 다른 삶을 꿈꾸고 결단하는 개인 또한 그렇습니다.

그러나 유행의, 유목민의, 리좀의, 파편의 사상은 그런 생각을 부정합니다. 단일자의 1과 변증법의 3을 부정하고, 2만으로도 형식이 되리라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어요. (심지어는 긴장이 없는 병렬의 2만으로도 형식이 된다고 생각해요.) 그런 파격에 의지하므로 그들은 깊고 강합니다.

어제, 그런 생각을 가진 사람의 작업실에 가 작품들을 봤습니다.  나란히 걸려 있는 두 장의 사진이 시선을 잡았는데, 두 사진은 부딪치지 않고 나란히 닮은 모양으로, 그러나 어딘가 서로 다르게  벽에 걸려 있었습니다.
거기에는 무엇을 지향하지 않고도 나/우리는 이미 존재한다는 확신이 있었어요. 전통적인 형식감각에 비하면 일종의 비정형이었고 결말없음이었으며, 유행어로 말하자면 '탈주'였습니다.

저는 그런 사상을 거절하는 사람에 속해요. 고전과 모던에 머무는 정도가 저의 경계입니다.  형식을 이루지 못하는 '패배'라도, 그러한 패배에 정직한 편이 저에겐 낫다고 생각해요. 또한 고전과 모던을 하나의 正으로 삼아서도 비정형을 위한 공간을 만들어 낼 수 있다는 믿음이 있습니다. 의미의 결집은 의미의 소멸을 요구해요. 그것이 형식적인 아름다움이고 완결이기 때문에 그렇습니다.

2. 살면서 맞는 모든 변화의 첫순간은 '갑자기' 혹은 '문득' 이라는 부사의 문을 통과합니다. 주어 없이 발생하는 '갑자기'와 '문득'이란 없을 거예요. 하지만 드물게 주어/명사가 보이지 않는 안개 속의 '갑자기'와 '문득'의 순간들이 방문하는 경우도 있습니다. 그럴 때 제 시선은 안도 밖도 아닌 어떤 공간을 향하게 돼요. 고요한 긴장이 스쳐가는 순간입니다.
투명해서 세상 어느 사물과 상황도 가리거나 건드리지 않을 듯한 작은 스침, 혹은 불투명해서 어떤 사고의 노력에 의해서도 삶으로 통합되지 않을 듯한 정적의 순간. 

어제부로 저는 한 친구의 얼굴을 휩싸고 있던 침묵과 그 예민한 눈빛을 보이지 않는 生의 창고에 적립했습니다.  우리는 서로에게 무엇이었을까요. 그 무엇도 되지 못한, 사소하나 잊을 수는 없는, 저 흔한 순간들 중의 하나였을까요. 
이렇게 쓰고 있는 동안에도 심장이 불규칙하게 뛰는 걸 느낍니다.  감정도 육체를 매개로 파악되니 참 아이러니하죠. - - 이 느낌에다 여러가지 이름을 붙여봅니다. 불안, 기억, 혹은 시간... 그러다가 '낯선 음악'이라고 생각하기로 합니다. 그래요, 기쁨도 슬픔도 다 낯선 음악이죠 뭐.

자, 낯선 음악을 견딜 만한 것으로 만들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요. 제 삶을 변화시켜야 하는 것일까요?
낯선 음악이 초래된, 혹은 솟아난 장소는 어디일까요.  답하지 못하지만,  질문하는 동안 여러 기억들이 문득 다르게 이해되고, 그 풍경의 변화를 저는 무연히 바라봅니다. 그렇게 삶은 변화하는 것이겠죠. 
삶의 변화 속에서 우연을 감지할 때,  삶이 아무 이유 없이도 어둡고 억울할 수 있음을 깨닫습니다. 그 부질없는 깨달음으로 마음이 다시 환해지겠죠. 장조에서 단조로, 단조에서 장조로 바람은 휙휙 바뀌어 불고, 표정의 미동조차 없이 저는 길을 건너고 있는 중입니다.
 

    • (전하지 않을 메모) - S에게

      네가 자존감을 잃지 않기를 바라.
      어떻게 그렇게 초보자의 함정에 빠질 수 있는지 아직은 이해 못하겠어.
      고요히 흐르며 보이지 않게 도사리렴.
      거짓이 아닌 방식으로 평온하게 숨쉬렴.
      누구도 건드릴 수 없는, 누구도 어찌할 수 없는 삶을 살렴.
      바다 저편의 섬과 해안의 격랑 사이를 왕복하며 시간의 파도를 넘고 또 넘으렴.
      언젠가는 내게 기별을 전하고 싶은 순간도 오겠지.
      그때의 풍경을 지금의 너와 나는 절대 알 수 없는 것이지만.
    • 전 삶의 대부분이 뽑기나 다름없는 우연들로 결정된다고 생각합니다만 자유의지를 부정하지 않습니다. 희노애락이 가진 가능성과 힘을 긍정하구요...
      • 자유의지도 우연이라는 게 대세학설이죠. 
        친구들과 '리벳의 실험'- 자유의지가 행동의 원인이 되지 못하는 허상이라는 실험- 을 두고 토론했던 시절이 떠오르네요. 
        저는 일찌감치 "자유의지는 세상/환경이 주는 ‘오염’과 ‘감염’에 투쟁하는 의미 정도로만 여기고 그냥 맘 편히 살아라~" 던 스피노자의 결정론적 대우주관을 맘에 품어버린 사람이라... - -

    • 문득과 문뜩 모두 옳은 표현이라고 하는데, 전 문뜩이 더 좋더군요. 이번에는 문득이 더 걸맞다 싶고.
      • 깜박보다 깜빡, 방긋보다 방끗, 담북보다 담뿍, 싹둑보다 싹뚝을 더 선호하시려나요~ 센 발음이 주는 단호함이 있죠.
    • 저사람 말이 맞습니다 허나 허비라고 하기엔 그저 살아야하니 고정관념은 각자의 근원적 표상이라 뒤돌려 고정시키기는 힘들고 그만큼 오래 살수도 없고 에또 ㅡ이거 일본말이네 그리고 뭐드라 그런뜻 입니다
      • 인간수명의 유한함을 고정관념 고수의 한 이유로 대시니, 고대 그리스인이 떠오르네요. 그들의 평균수명이 20세 정도였다죠. 그 시대의 고정관념은 100세 시대인 현대인의 것에 비할 바 아니게  철옹성이었겠다는 짐작이 저절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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