테레지엔슈타트의 아이들

terzin

 

 (며칠 전 올렸던 글에 달린 댓글을 뒤늦게 읽었어요. 언급하신 스티브 라이히의 <Different Trains>를 기어코 듣노라니 이 아이들이 눈에 밟혀요. 명절을 하루 앞두고 적절치 않은 사진과 글이겠으나 듀게인들 연식이 짐작돼서 에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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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라하에서 기차를 타고 잠시 몸을 뒤척이노라면 체코의 테레지엔슈타트에 닿습니다. 이차대전 중 나치는 이곳을 휴양지인 양 속여 유대인들을 불러들였죠. 외국인에게 보여주기 위한 전시용 '게토'를 만들기 위해서였다고 해요.
이곳에서 만오천 명의 아이들이 살았습니다. 어른들과 똑같이 죽음에 대한 공포를 겪고, 어른들이 본 모든 지옥의 풍경을 본 아이들이에요. 그 중 백여 명의 아이들만 살아서 집으로 돌아갔고, 수많은 아이들이 도달한 곳은 크레마토리움(화장터)이었습니다.

제가 그곳에 갔던 날은 수많은 참배객/관광객이 관광버스를 타고 막 도착한 뒤였습니다. 그들은 다양한 언어로 떠들며 자료관으로, 서점으로, 영화관으로 흩어졌어요. 그 어수선한 무리 속에서, 저는 벤치 한쪽에 홀로 앉아 있는 무표정한 얼굴의 노인을 발견했습니다. 
그는 마치 동상인 듯 미동도 없이 앉아 있었어요.  사람들이 건물 속으로 완전히 사라지고 자신만 홀로 남자, 그제서야 비로소 노인은 안경을 벗더니 천천히 눈물을 닦았습니다. 그건 테레진의 아이들이 느꼈을 절대고독의 현현으로 보였어요. 아마 그 노인은 틀림없이 유대인이었을 겁니다. 

수용소 영화관에서는 그들이 홍보용으로 찍은 필름들을 상영해줬어요. 여자들은 수줍게 웃으며 화단에 물을 주고, 남자들은 열심히 감자를 캐고, 아이들은 초롱한 눈빛으로 공부를 하는 모습이 담겨 있는 영상이었죠.  
아이들의 그림과 글은 한 권의 책으로 묶여 남아 있더군요. 이런 절규의 말들이 기록돼 있는 책입니다. "안돼, 안돼요 하나님. 우리들이 사라져 가는 걸 보고만 계시지 말아주세요." 

2.
리디체 마을 벌판 한쪽에 학살된 아이들의 동상이 서 있습니다. 표현할 길 없는 표정이 배어있는 얼굴들이에요.
그들을 바라보노라니 슬픔과 분노가 뒤얽혀 제 가슴 속을 마치 운하처럼 음울하고도 나른하게 흘렀습니다. 인간이란 통째로 하나의 거대한 오류라는 생각 외에는 아무런 생각도 들지 않았어요.
침묵하며 외롭게 죽어갔을 이름 없는 아이들. 그 얼굴들 마다에 따스하게 깃들던 금빛 가을볕과 강아지풀만 무성하던 無言의 벌판을 저는 죽는 날까지 절대 잊지 못할 거예요.

테레지엔슈타트에 다녀온 후 한동안 괴로움에 시달렸습니다.
그건 밤이기도 하고 낮이기도 했어요.  소란한 광장이기도 막힌 골목 안이기도 했어요. 
걷고 있는 제 앞에서 갑자기 길이 사라져요. 소름돋는 공기와 압도하는 정적.
불안한 기운에 몸이 떨려옵니다. 저는 숨을 죽인 채 눈에 힘을 주고 앞을 바라보죠. 
저편에서 허공의 벽을 열고 나와 느린 걸음으로 다가오는 아이들.
커다랗게 부풀어 오른 슬픈 얼굴들이 깃발처럼 펄럭이며 속삭입니다.
'우리를 좀 데려가 주시겠어요~'
             
왜 그들이 아직도 테레진과 리디체로부터 걸어나오는지,
왜 자신들이 이미 오래 전에 죽었다는 사실을 모르는지,
왜 이승을 떠돌며 나를 두렵게 만드는 건지,
왜 새벽녘 불길한 꿈으로 나타나 내 어지러운 삶을 밑바닥에서부터 흔들어대는지,
왜 살아서 단 한번도 만난 적 없는 사람의 마음을 이렇게 산산조각 내어 부숴놓는지,  모르지 않습니다. 

그들은 바로 인류가 저지른 가장 잔혹한 죄의 얼굴이며 이세상 모든 상처의 모습이라는 것을.
인류의 모든 죄와 상처가 분노하고 팽창하고 응결한 그 정령들이 제가 방심하고 웃으며 걷는 길에 나타나 애원한다는 것을.
'우리를 좀 데려가 주시겠어요~ '

지금도 세상 한쪽에선 그 아이들과 같은 절망들이 되풀이되는 곳이 있을 테죠. 
미국이 침공하는 이라크에서, 테레진과 리디체 아이들의 조국이 된 이스라엘이 유린하는 팔레스타인에서도.


terezin2-1
    • 부모님은 구정에 의미 안 두시는 분들이라 조카 보러 런던으로 고고씽하셨는데, 막내가 그래도 명절이니 삼색나물은 먹어야 하지 않겠냐며 장봐와서 시금치/도라지/고사리 나물 볶고 있는 중. 갈비찜은 덤~ 흑

    • 인종주의의 끝이 어디인가 보여주는 거죠. 단언컨데 유럽인은 유대인의 사례를 보고서야 비로소 자신들 같은 '백인'도 인종청소의 대상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깨달은 거죠.
      • 유럽 여기저기에서 살아본 소감으론, 독일이 역사를 통한 통렬한 반성으로 인종주의의 파괴적 성격을 가장 잘 알고 있고, 의외로 프랑스가 사회적 불안을 일으키는 요소로 인종을 의식하는 것 같더군요. (제 개인적 판단. - -)

    • 가슴이 먹먹해지네요. 기억하고 또 기억해야 할 죽음의 역사가 지난 세기의 역사 같습니다.

      어제인가 파병이 결정되었다 하는데, 돌이킬 수 없는 결정이라면 그래도 한사람이라도 사람을 살리는 일이 되었으면 좋겠습니다.
    • 파병에 저는 반대 입장입니다. 
      이란의 핵무장 의혹 문제는 트럼프가  경제제재를 취소하면 소통하고 협상을 하겠다고 그쪽에서 분명히 밝혔으니,  외부세력인 한국은 가만 지켜보는 게 옳지 않았을까 라는 생각.
    • 삼색나물, 갈비찜까지 끝내고 잡채 재료 다듬는 중. 내일 한국설날 음식 먹이려고 외국인 동료 둘 초대했기 때문. 


      dpf는 우리집 분위기 - 조부모님이 쓰시던 옛가구- 를 좋아해서 설레는 맘을 달래느라 미용실 다녀왔다고. 


      특히 할아버지가 쓰셨던 빨간색 자개 서탁에 뻑간 바 있음. ㅋㅎ

    • 종교가 뭔가 생각해보게 된 거의 반세기 밖에 안된 일들이죠
      • https://www.youtube.com/watch?v=Cc06DlwpTmA


        오늘 아침을 저는 이 곡으로 열었어요. 제 사랑 바흐의 <프랑스조곡>을 조성진이 연주한 버전으로 생각이 어지러울 때 들으면 좋아요~



    • 그래서 저는, 다같이 벌을 받을 것만 같아요. 죄들은 도처에 있고 도움과 개선은 너무 느려서. 너무 부정적이죠 ㅎ
      • 신자는 아니지만, 테레진에 다녀온 후 성경의 마태복음과 누가복음의 두 문장을 비교해봤더랬어요. 마
        태복음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한 것처럼’이라는 완료형이고,  누가복음은 ‘우리가 우리에게 죄 지은 모든 사람을 용서하고 있사오니 우리의 죄도 사하여 주옵소서’ 라는 현재형이더군요. 어디선가 마태복음의 독자는 유대인이고, 누가복음의 독자는 헬라인이라는 해설을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오페이레마타' 라는 단어를 그무렵 알게 됐는데 ‘빚진’ 이란 뜻이에요. 역사의 어둠 속에서 우린 모두 빚진 자들이죠. 

    • 소개해주셔서 관련 선전 영상을 찾아봤어요. 나찌 선전대로 적십자 대표단이 속아넘어갔다니 보고 싶은대로만 믿는 인간의 성향때문에 속은건지 나찌의 향응이 너무 좋아 속은건지..? 저 뒤에서 사람을 가축처럼 다각도로 착취하고자 여러 시도들을 했건만 그냥 넘어갔다니 다 지난 역사인데도 분개하게 되네요.
      • 어떤 키워드로 검색하셨을까요? 영상을 링크해주시면 심호흡한 후에 함 다시 보고 싶습니다. - -

        • 너튜브에서 지명 그대로 넣어봤어요.
          • 그곳에서 봤던 영상은 아니나 유튭에 올라와 있는 대여섯 편을 시청해보니 이게 가장 비슷하네요.


            https://www.youtube.com/watch?v=SnOugoHzoiI

      • 알면서도 모른체 했을겁니다. 당시 중립국이라는 스웨덴이 나치 독일을 제압할 수 있는 힘이 있었던 것도 아니고 듣자하니 그동네도 당시에는 나치 천지였대요. 그냥 정부 차원에서 중립국 포지션을 취했던 것 뿐이지.


        사실 이런 일은 지금 중국에서도 일어나고 있죠. 티벳과 신장 위구르 자치구에 지어진 수용소들과 거기서 벌어지는 인권유린 행위에 대해 국제사회 누구도 아무런 얘기를 못하는 상황이니까요.
        • 다른 나라의 인권문제에 대해서는 알아도 어떤 조치를 취할만큼 적극적으로 나설 나라는 거의 없다고 봐야겠죠. 나치의 만행이 끔찍할 뿐 아니라 현재에도 이런 참혹한 인권유린이 지속되고 있는데 다들 손놓고 있으니 암울한 기분이 드는군요. 홀로코스트도 그 당시에는 사람들에게 믿기지 않는 소문이었던 것 같은데 사람들에게 거의 알려지지 않은 채로 묻히는 인권유린 범죄들이 훨씬 더 많겠죠.

          • 중세 서사시에 보면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는  토포스가 있어요. 인류의 업적이나 과오에 대해 말하다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라고 한마디 하면 종결되고 말죠.  - -
            우리가 아우슈비츠를 성토/반성하기에는 언어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생각을 합니다. 근데 과연 현재의 우리는  통렬히 성찰하므로써 아우슈비츠 같은 상황에 대한 재현 금지 명령을 제대로 하고 있는 걸까요?
        • 나라별 인종차별 지수, 저의 체감으로는 독일>네덜란드>스웨덴> 영국= 미국, 캐나다> 프랑스 >>>>> 아시아 여러 국가입니다. 한국도 최하위권에 속하죠. -_-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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