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로운 것과 사귀다

어제 모 연구소의 새건물 준공식에 갔다가 계단 한쪽 벽면을 장식하고 있는 설치미술에 시선을 빼앗겼습니다. 한 달여 정도 소요된 작품이라는데, 대하는 순간 영화<He loves me>에서 오드리 뚜뜨가 만든 캡슐 꼴라주가 생각나더군요. 물질의 홍수 속에서 점점 부서져가는 우리들 자아의 윤곽을 보는 듯도 했어요. 

예술가 중에는 동시대의 감성/감각에 천착하지 않고, 대중에게 발표하는 작품을 자아를 담는 그릇이라고(만) 생각하는 이들이 있습니다. 미술이든 시든 음악이든 그런 이들의 작품은 제 경우, 독립적인 개인이 아닌 바다나 나무처럼 바라보게 됩니다. 알듯말듯한 비소통의 느낌도 좋고요.


동행자는 지혜로 착각되고 있는 인간의 탐욕이 느껴지지 않냐며, 유머러스한 컨셉에도 불구하고 밝지 않다고 가볍게 고개를 저었습니다. 아무튼 곰곰 감상해본 바, logical existence의 피로감이 있는 그 작품의 키워드는 하이브리드, 팬시, 미래주의인 것 같았습니다. 


- 하이브리드 Hybrid 

각각의 방향성을 지닌 개체들이 잡종으로 혼합된 것이 하이브리드일 것입니다. 기존의 방향성들을 상쇄하면서 새로운 의미가 나타나는 것. 그런데 하이브리드는 메시지 보다는 그 문법만 부각되는 경우가 대부분인 것 같아요. 미술 전공자가 아닌 저 같은 일반인의 눈에는 하이브리드라는 새로운 의미 자체가 모호하거나, 그 의미의 새로운 방향성이 한 눈에 읽히지 않기 때문입니다. 


현대인에게는 '하이브리드'에 대한 욕망이란 것이 존재하는 걸까요? 아마도 그런 것 같습니다. 그러나 저는 그걸 다 이해하지 못해요. 이해를 못하는 채, 자의 없이도, 저 역시 이미 삶의 많은 디테일에서 하이브리드를 소비하며 살아가고 있지만요. 뭐 꼭 소비가 아니더라도, 이미 저의 사고나 존재양식 자체가 문화적인 관점에서는 하이브리드적일 수밖에 없을 테죠. 


- 팬시 Fancy 

팬시는 우리에게 친근합니다. 하지만 정의내리기는 쉽지 않아요. 비현실적, 공상적, 환상적, 비자연적인 것이 밝게 발현되면 팬시할 수 있습니다. 그것이 으스스하거나 불길하거나 어두운 색채를 띨 때는 아마 그로테스크하거나 uncanny할 것이고요. 그러면 팬시는 낯익은 낯섦이면서 밝은 것이라고 정의내릴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 미래주의 Futurism 

팬시와 하이브리드가 미래주의적인 면을 띨 때, 테크놀로지의 수단과 이미지를 동원하기 쉬운 것 같아요. 20세기 초반의 미래파와는 달리, 오늘날 미래전망을 긍정적으로 그려내는 세계관은 찾아보기 어렵습니다. 장미빛 미래상보다는 암울한 미래상쪽이 훨씬 구체적으로 이미지화되기 쉬워서인 듯합니다. 그런 점에서 그 설치작품은 예외에 속한다고 느꼈어요. 미래주의적인 팬시와 하이브리드가 어떤 구체적인 전망이나 메시지를 결여할 때, 그것은 좁아진 세계의 문화적 보편어의 문법원리로서만 부각됩니다. 


그 작품은 보편어로서의 하이브리드입니다. 그렇긴 해도 성찰의 여지가 없는, 굉장한 속도로 모든 순간 충돌하는 현상으로서의 하이브리드이고 보편 문법에 해당됩니다. 감상자들은 그 문법의 랑그로부터 개인의 파롤에 관한 생각을 해야 하지 않을까 싶더군요. 

그 건물에 머무는 동안 즉흥적으로 생각해 본 것은 이 정도입니다. 앞으로 이 점에 대해 공부하듯 계속 머릿속에서 어루만져 보고 싶지만 아는 게 별로 없으니 가능할런지. - - 


덧: 그 연구소는 사진촬영이 금지된 공간이라 작품을 카메라에 담지 못했어요. 분위기가 아래 작품을 떠올렸으므로 붙여봅니다. 

밀라노에서 근무하던 건물 로비 한쪽에 장식되어 있던 설치미술이에요. 

 intf

    • 사진 멋있네요 기본적으로 회상의 삶은 아날로그적이지만 쿠준히 디지털로 살수 밬에 없는게 인생이지 않나 그리 생각합니다
      • "회상의 삶은 아날로그 적이다" 이 문장은 광고 카피에 써먹으면 좋을 듯. 
        어느 과학자가 주장하길, 디지털은 편하기는 하지만 아날로그가 치매에 걸리게 하지 않는 힘이 더 있다고 하더군요. 뭐 아날로그가 디지털보다 제한된 공간이긴 합니다.
    • 어떤 이슈로 지쳤다가 여기 근사한 설치미술이 있다고 해서 감상하러 왔습니다. 
      '나라는 섬은 타자라는 바다없이 홀로 뜰 수 없다.' 


      사진 속 저 아저씨는 끝없는 상호작용 속에 이미지들을 덕지덕지 붙여가면서 바다에 뜬 섬처럼 계단을 올라가네요. 거북목이라 지쳐보이는데 보이기에는 쾌활하군요. 




      여기까지 제 빠롤입니다. 

      • 저 작가가 이 댓글을 접한다면 흡족해서 미소 지으실 듯. ㅎ
        '나라는 섬은 타자라는 바다없이 홀로 뜰 수 없다.' 는 문장이 낯설지 않은데 따로 출처가 있나요?
        어느 시인이 '타자는 나의 집에 들어선 적이기도 하고 진구이기도 하다'고 했던 게 생각나고, 
        관념 철학자 셸링이  '나를 넘어서는 타자는 신을 넘어선 신'이라고 정의했던 것도 생각납니다.

        • 그 문장은 어딘가 들은 말들을 섞어놓은 하이브리드입니다. :)
          • 고전적인 형식의 틀을 가진 하이브리드는 문학에서 보통 '창작'으로 인정합니다. - -
    • 하이브리드 하니 온전한 단독자로서의 개체가 과연 존재할 수 있을까, 존재의 독립이란 과연 성립할 수 있나 하는 의문이 떠오릅니다. 저는 저번 키아프 전에서 이동기 작가의 아토마우스를 보면서 하이브리드란 개념을 곱씹었어요. 누가 봐도 미키마우스를 원전으로 삼고 거기에 아톰을 섞은 디자인의 캐릭터를 보았을 때 이걸 선뜻 독립적 개체로 보기 어렵더군요. 이건 매우 재미있는 반감이었는데, 데즈카 오사무의 아톰이 미키 마우스를 따라했던 걸 곱씹어보면 표절의 표절로서 두 캐릭터의 혼종이자 손자로서 아토마우스를 볼 수 밖에 없었거든요. 왜 나는 아톰의 오리지널리티는 수긍하면서 아토마우스에게는 그렇지 못할까. 왜 제3세대 마우스인 아토마우스는 이렇게 잡종처럼만 보일까 그런 생각을 했어요. 동시에 어떤 식으로든 오리지널의 후세대인 카피본이 독립성 대신 하이브리드만을 저렇게 보이는 게 오히려 이 작품의 의도가 아닐까 의심도 하게 됐구요. 난 이 작품들 없인 나올 수 없었고 오리지널리티가 아예 없어 하고 일부러 선언하는 느낌이랄까. 미술관과 하이브리드를 언급해주셔서 저도 그런 경험을 말씀드리고 싶었네요...
      • '키아프'를 관람하시는구나....  저는  8년 전쯤부터 둘러보고 있어요.  
        제 수준으로는 한번 더 봐야 가늠이 될지 말지 할 작품들이 많아서,  그만큼 내공과 수가 뒷받침된 실험을 이해할 수 있는 눈밝은 사람이 되고 싶다는 다짐을 하게 되는 전시입니다. - -
        삼년 전이었나, 키아프 끝난 뒤 뒤풀이 모임에 끼어서 놀았던 적이 있는데 고등어구이 파티였어요. 모임 장소가 한옥이었는데, 한 작가가 수돗가에서 고등어를 구웠고 참석한 이들이 그 음식을 고양이떼처럼 속속 해치우던 모습이 눈에 선합니다.ㅋ 
        배가 부르자 풍류가 찾아들었고, 그 중에는 놀라운 재능의 작가들이 양자역학과 진화생물학을 엮는 놀이 솜씨를 펼쳐보여서 감탄했던 기억이 나네요. 고등어 맛보다 윗길이었다고나 할까요. 

        2019 KIAF를 보고 한 생각은 '하이브로드의 세계가 잘 안착하면 새로운 경전이 될 텐데, 아직은 최신 모드도 '중론' 번역 정도의 표현인 것 같다' 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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