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사람이 보낸 메시지

1. 어머니

"드디어 우리집 단풍나무들이 모두 색을 바꾸었다. 붉고 노란 색들이 저녁 하늘을 배경으로 아름답기도 하더라.
나이 드는 일의 장점 한 가지는 세월이 가도 변함없는 것이 무엇인지 알게 되는 것, 그런 것이 정말 있다는 것을 알게 되는 일이다.
내가 저 단풍나무들을 심던 시절에 사랑했던 것, 그 사랑은 조금도 변치 않았다. 20년이 지나도록.
그러나 이와 똑같은 흐름으로, 세월이 가면 덧없이 사라지는 것이 있다는 것도 알게 되는 장점 또한 나이듦에는 있다.
(후략)"

어머니의 E-mail을 읽노라니 마음의 경계 지역이 산란합니다. 어머니처럼 삶의 가닥들이 명확히 보이는 나이에 이르고서야 인간은 참되게 외로워볼 수 있을 것 같다는 짐작이 돼요.  뭐 젊은 날의 외로움이란 잠시 '다른 곳'을 쳐다보고 있으면 대개 해결되는 것이죠. 

특별한 일이 없으면 주말마다 집에 가서 부모님과 부비대고 옵니다. (이번 주는 다른 일이 있어 못 가요.) 
그런데 언젠가부터 제 등을 쓸어보는 어머니 손길에서 황량한 회오리바람이 비현실적으로 일고 있는 느낌을 받고 있어요.  뭐랄까,  지평선만 그어진 벌판에 홀로 서 있는, 바람에 휘어진 가는 미루나무 같은 느낌이랄까요. 
어머니가 적시한 '조금도 변치 않은 사랑' 속에는 저도 들어 있다는 걸 잘 압니다.  어머니가 저를 사랑하고 있지 않다면 저의 삶의 방식, 저의 침묵, 제가 가리고 보여드리지 않는 얼굴을 견딜 이유는 없을 거예요.
그러나 저는 어머니의 사랑이 원하는 대로 살 수 없고, 살고 있지도 않아요.  제가 할 수 있는 건 어머니의 사랑을 느끼고, 이해하고, 감사하기. 그 정도입니다. 그러니까 저는 어머니의 '세월이 가면 덧없이 사라지는 것' 속에도 들어 있는 것입니다. 

제가 어머니의 사랑 밖에서 그 사랑을 가만히 바라보는 사람인 양할 때, 어머니는 아이러니한 소원疏遠을 느끼며 외로우실 거예요. 그러나 저는 이미 어머니와 다른 삶으로 넘어섰어요.  그 고독의 왕국은 너무나 넓어서, '어머니 속의 나'에게 이르기에는 멀고도 멀어졌기에 다른 도리가 없습니다. 
사람과 사람의 관계에서 가장 큰 등한은 상대에게 아무런 '현재'도 주지 않는 것이죠. 저는 어머니의 현재지만 어머니는 저의 현재가 아닙니다. 이것이 깊고 무거운 관계가 진행되는 방식인 거죠.
어머니의 메일로 인해 '존재의 슬픔'에 대한 은유들을 더듬어보고 있습니다.  현재의 피로한 '나'가 태어나기 전의 따뜻한 어둠을 찾아 해매는 시간이기도 합니다. 

2. dpf

어제 퇴근 무렵, 커피를 마시며 다음 주 브리핑할 파일을 점검하고 있는데, 갑자기 책상 앞 유리 파티션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습니다. 고개를 드니, 노란 국화다발로 목 부분을 가린 dpf가 저를 들여다보며 웃고 있었어요.  메신저로 나누는 퇴근 인사를 생략하고 찾아와 천연히 웃고 있으니 동화 속 소년 같았습니다. 
마주 웃어주고서도 몇 초가 지나서야, 파티션을 통해서는 내 자리가 들여다보이지 않는다는 사실에 생각이 미쳤어요. dpf는 자신의 얼굴만 되비치는 유리 앞에서 마치 내가 보인다는 듯 웃고 있었던 거예요. 

보이지는 않지만, 누군가 있어야 하는 바로 그 자리를 향해 미소짓기. 이것은 우리 삶의 보편적 형식이어야 하는 것이지만 실제론 실현되기 어려운  미덕인 것이죠.  그가 인사와 함께 던져놓고 간 국화다발로 인해 지금 제 방에까지 '존재의 향기'가 은유적으로 가득합니다. 현재의 피로한 제가 소녀시절의 어떤 생기를 찾아 헤매는 시간이랄지 뭐랄지. -_- 

3. 조카(의 공개일기)

"오늘은 그리스의 날이었다. 나는 그리스의 전통옷을 입고 학교에 갔다. 운동장에서 친구를 만났는데 친구 이름은 Jack Mason이다. 내가 교실에 들어갈 때 친구들이 **이 멋있다고 말했다. 내 옷이 좀 멋있는 거 같았다. 엄마도 발표회를 보러 왔는데 내가 강당으로 갈 때 보니까 나를 자랑스러워했다. 
나는 발표회에서  perseus the Gorgon slayer 이야기를  좀 읽었다. Rosie 다음에 읽었다. 다음에는 Oliver와 Whoasif가 읽었다. 우리가 이야기를 읽어주면 다른 친구들이 연극을 했다. 나는 Rosief를 사랑한다. Oliver와 Whoasif는 좋아한다."

-제가 단 댓글. 
하루를 돌아보며 생각을 헤아리고 기록하고 예측하는 너의 일기를 읽을 때마다 산책하는 기분이야.  생각과 마음을 이러저리 흩뜨려보게 하는 <산책>.
산책이 뭘까? 천천히 걷는 것만을 뜻하는 건 아니야. 
散策 : 책策을 흩뜨리는 의미도 되는데, 지금은 이해하기 어려울거야. 기억해두고 엄마랑 한문사전을 함 찾아보렴. 
    • 사람의 일생은 자기의 작은방에서 몇가지 물건들을 챙기며 사는거 아니겠습니까 창밖에 나무와 꽃과 석양이 보이면 더 쓸쓸하겠죠 누가 그렇게 웃어주면 행복이죠
      • 게시판에서 허허실실하시다가 가끔 형이상학적인 생각을 던지시는데,  정말 깜짝 놀라요, 와우~
        • 멋있다고 해주면 아주 기분이 좋아요 어디님이 해주는 사람 중 한명 그래서 댓글을 부지런히 담

    • 할아버지가 가르쳐주셨군요 이따 찾아봐야지
    • 모친과 이메일도 주고 받으시는구나..ㅎㅎ. 잘 읽었어요~
      • 부모와 메일로 대화하는 건 당연하지 않나요? - - 우리 가족 중에 문재가 가장 뛰어나다고 인정하는 게 어머니예요. 글을 파고 사셨으면 지금보다 성취를 이뤘을 것 같은데 생화학을 전공하셔서 세상에 알려지지 못했... ㅎ

    • 어디로갈까님 글을 읽으면 저도 따라서 마음이 정돈되는 것 같아요. 이러다 팬이 되겠어요.
      • 쓰시는 김에  (이미) 팬이라고 시원하게 쏘셨으면... 제가 더 부끄러웠겠죠? ㅋ


        요즘 다시 라틴어를 공부 중인데,  Fan은 봉사자, 열성가라는 뜻인 라틴어 fanatucus에서 유래된 약어더군요. 


        자본주의 사회에서는 한 인물/집단 에 대한 헌신으로 사용되고 있고요.





    • 절친 결혼식의 들러리를 서느라 왼종일 낯선 체험을 했어요.


      평소 화장을 안 하고 다니는데, 신부화장 팀에서 신부랑 비슷하게 공들여 변장 시켜놓으니 제 얼굴도 가관이 되더군요. ㅋ




      들러리 역할이 결혼 당일 신부를 악귀로부터 지키기 위해 비슷하게 꾸민 가짜들을 세워놓는 거였다죠. 으흠. 


      아무튼 11월 중순에 반팔 샬랄라 드레스 입느라 감기 얻어 걸린 것 같습니다.  에취!


      그나저나 오늘 신부가 제게 한 협박. 


      "만약 니가 결혼하면 나는 혀깨물고 죽어버릴거야~ 넌 평생 독야청정해야 해~ " 





      • 체 자기는 잘도 가면서

        • 고딩 1 때 한반이었는데, 제 옆모습을 훔쳐보느라 공부를 못하겠다고 담임 샘께 하소연해서 존재를 인식하게 된 친구예요. ㅋㅎ


          잘 안 먹는 꼬챙이 제가 안타까워서 온갖 종류의 음식을 어머니께 만들어 달래서 도시락 싸 등교했더랬죠. 제 지인 중 무식한 인물 베스트 5에 당당 꼽히는 인물인데, 제 부모님만큼 절 사랑해줘요. 


          정말 함께 살아보고 싶은 남자에게 수 년 간 공들여서 한 결혼이라 제 맘도 참 좋습니다. 

          • 우와 대단한 친구 그럴만도 하네요.

    • 조카가 제 엄마 도움을 받아 한자사전을 검색했군요. 이렇게 정리가 됐다는데,  아이는 대부분 처음 접하는 의미였겠지만 저도 처음 알게 된 부분이 있어요. 




       - 책策


      1. 꾀, 계책(計策)


      2. 제비(기호 등에 따라 승부 따위를 결정하는 방법)


      3. 대쪽(댓조각), 댓조각(대를 쪼갠 조각)


      4. 책, 서적(書籍), 장부(帳簿ㆍ賬簿)


      5. 채찍


      6. 점대(占-: 점을 치는 데에 쓰는 댓가지)


      7. 산가지(算--: 수효를 셈하는 데에 쓰던 막대기)


      8. 수효(數爻), 숫자(數字)


      9. 지팡이


      10. (임금의)명령서(命令書)


      11. 별의 이름


      12. 낙엽(落葉) 소리


      13. (과거를)보이다


      14. (상을)주다, 포상하다(褒賞--)


      15. 헤아리다, 예측하다(豫測--)


      16. 기록하다(記錄--)


      17. 꾀하다, 기획하다(企劃--)


      18. 독촉하다(督促--)


      19. 채찍질하다


      20. (지팡이를)짚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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