끝나지 않는 '대화'

듀게에 소개한 적 있는 다국적 정례모임으로 긴긴 일요일을 보냈습니다. 잠자고 일어난 지금까지도 머리엔 바람소리만 하염없고 마음은 가로등 하나 없이 어둑해서, 편집창을 열고 모처럼 장편일기를 썼어요. 몇 개의 단어로 골조를 세워두는 식의 메모만으로는 안 될 상념이 고여 있었거든요. 메모는 생각은 남기지만, 시간이 지나면 표현이 사라져버려요.
아무려나,  어젯밤 잠들기 전까지 머리속에서 일렁거렸던 대화의 형식 또는 방법에 관한 비유들.

- 공중곡예로서의 대화.
두 사람이 각자의 포스트에 오릅니다. 그러고는 자기 몫의 밧줄을 잡고 각기 다른 편에서 몸을 던져 만남의 지점까지 날아 오죠. 
실수가 없다면 두 사람이 손을 맞잡게 되고, 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잡아 자기의 포스트로 데려갑니다. (어제 대부분의 대화가 이 유형이었음.)

- 동행으로서의 대화.
두 사람이 우연히 만나 어느 거리만큼 함께 길을 갑니다.  둘은 자연스럽게 멀리 보이는 산이나 구름, 또는 아직 펼쳐지지 않았으나 기대되는 풍경들에 대해 얘기를 나눠요. 그러는 동안 서로 국적이 다르고 살아온 이력이 다르고 살아갈 삶의 모양도 다를 거라는 걸 알게 되지만, 그 순간 만큼은 풍경을 공유합니다. 

- 운전으로서의 대화.
길을 아는 사람이 길을 잘 모르는 사람의 차를 인도해 함께 간선도로로 들어섭니다. 인도하는 측에선 그 도로가 교차로가 없는 직진로이기 때문에 그냥 앞으로 나아가기만 하면 된다는 걸 알아요. 앞사람의 차만 보며 긴장해 있던 뒷사람도 어느 순간부터는 창 밖 풍경들을 음미하는 마음이 됩니다. 

- 침묵으로서의 대화.
저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상대도 아무 말도 하지 않습니다. 그러나 양각 뿐만 아니라 음각 또한 형태를 지니는 법이므로, 저와 상대는 둘의 어떤 상황과 그 상황에 대한 준비의 내러티브를 어느 정도는 읽을 수 있게 돼요. 그리고 어느 순간, 서로가 서로를 읽고 있다는 사실까지도 불현듯 깨닫게 됩니다.

대화는 길을 가는 것과 같습니다. 갈길을 가다 보면 마을이 나오고 광장이 나오고 골목이 나오고 골목끝이 나오고 바다가 나오고....... 무엇이든 나와요.
아름답거나 거대하거나 풍요로운 장소가 아니라 하더라도, 그 모든 장소는 기억할 만한 장소들인 거죠. 이것을 잊지 않으려 합니다. 
대화는 서로가 열리고서야 이루어지는 것이며, 대화에 뒤따르는 변화를 미리 계산하지 않을 때 가장 좋은 결과를 얻게 되는 것 같아요. 이것도 잊지말 것!

덧: 초기 사춘기시절,  말하기 싫다고 했더니 울 할아버지가 토닥토닥 해주셨던 말씀.
"말하기 싫으면 안 해도 돼. 그냥 잘 듣기만 하거라. 니가 듣고 있다는 걸 상대는 알지.  그것도 충분한 대화다."

    • 음 할아비 말씀이 맞아 이제 말하려 하지 말고 열심히 듣고 있다는걸 보여줘야지

      • 아니 포킹이 이런 다짐을 하시다니...  듣는 건 듣는 거고 말씀도 하셔야죠.
        듀게 같은 게시판은 커다랗고 자잘한 이야기들이 섞이고 엮이는 가운데 생성되는 '무엇'에서 각자 생각을 잡아나가기 위해 등업절차까지 거쳐가며 모인 곳이잖아요.  그걸 간과하시면 아니되옵니다~
    • 여기 쓰신 게 바로 그 장편일기는 아닌 거죠? 길과 여정이란 대화의 메타포라니. 아름답습니다.


      혹시 길을 잘 찾으시나요? 저는 타고난 길치인지라 이런 식의 이미지는 저절로 떠오르지 않거든요. 어디로갈까님 글을 읽으니 비로소 이미지가 떠오르지만요.




      (제 두뇌 속에는 지도와 방향이 잘 들어오지 못하네요. 어릴 때 집밖으로 잘 안 나가서인지. 자동차나 기차는 저에게 하울의 움직이는 성처럼 철컥 문패가 바뀌는 순간이동 매체로 인식됩니다. '부산'이란 문패가 있는 상태의 기차를 타고 중간에 어떤 길을 오는지는 모르고 그냥 그 안에서 철컥철컥 하면 '대전'이란 문패가 있는 상태의 기차를 내리게 되는 거죠.)




      저도 머리 속에 지도를 넣으면 동행같은 대화를 할 수 있을까요. 

      • 저는 지도를 잘 읽고 공간감각이 있는 편이어서 낯선 곳은 헤매지 않고 잘 찾아가요.  미로공원 길찾기 같은 것도 잘하죠. 근데 일년에 서너 번, 늘 다니는 집/학교/회사 길에서 방향을 반대로 잡고선 엉뚱한 곳에 가있곤 한답니다. 밤에 일어나는 현상이니 어둠치라고 해야 할지... 

        '동행'은 목적지 정하지 않고 같이 걸어보는 게 목표인 거니 지도는 장착하지 않아도 되죠. 도중에 멈춰서거나, 주도권 쥐고 방향을 정하려는 과욕만 서로 안 부리면 어렵지 않아요. 
        운 좋게 합이 잘 맞는 상대일 경우, 김승옥의 <무진>이나 황석영의 <삼포>같은 상상의 공간에 도착하는 경우도 있는 걸요.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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