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벽의 불안

1. 누군가 제게 상처를 주는데도 그 사람을 이해할 수 있을 때, 그 이해에서 어떻게 해볼 수 없는 괴로움의 얽힘이 생겨납니다. 깊고 캄캄한 틈이 발 밑에 열리는 것 같죠.
이 나이쯤 되니까 상처 자체는 별반 고통으로 작용하지 않는데, 그들에 대한 제 이해가 때로 몹시 벅찹니다. 
하지만 저는 제가 살 것 같았던, 그런 삶을 살고 있어요. 그러므로 잘 살고 있는 셈이죠. 아무렴 그렇고말고요~ 

2. 협화음 보다 멋진 것은 불협화음에서 협화음으로의 이행이에요. 그 과정에서 만나는 새로운 시야와 긴장의 해소가 마음을 잡아줍니다.
그런데 모든 불협화음이 다 그런 선물을 주는 것은 아니죠. 협화음을 필연적으로 추동하는 그런 불협화음이어야 해요.
아, 어쩌면 모든 불협화음 속에는 협화음으로 통하는 복도가 열려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어두운 단상일까요, 밝은 단상일까요.

3. 사람들이 닮은 것을 사랑하는지, 혹은 닮지 않은 것을 사랑하는지 알지 못합니다.
물론 이런 의문은 어리석음에서 나오는 것이죠.
사랑하기 위해선 닮지 않았음의 이격離隔이 필요하고, 다시 한번, 사랑하기 위해선 당신을 알겠다는 동일同一이 필요한 것이니까요.
그러니 '사랑해줘'라고 말할 권리는 누구에게든 있는 거죠. 왜냐하면 '넌 나이니까.' 왜냐하면 '넌 내가 아니니까.'

4. 퇴근길, 심란한 마음을 무시할 겸 필요한 문구류들이 있어서 대형서점엘 들렀습니다. 간김에 영화/미술 코너를 구경하고 있는데 어떤 파파할머니가  말을 건네왔어요.
"아가씨,  내가 이 나이에 연필스케치를 배우고 있어요. 도움이 될만한 책 좀 골라줄 수 있어요?"
얼굴에만 살짝 부기가 있을 뿐, 목소리도 카랑카랑 생기있고, 돋보기 없이도 글자들을 다 읽으시더군요. 건강해보이셨어요. 몇권 권해드렸더니 고맙다며 활짝 웃으시는데, 누군가의 이 글이 떠올랐습니다. "가장 깊은 것이 가장 맑은 것이다." (폴 발레리였나?)

5. 갑자기 책상에서 물러나, 현관문을 열고 어딘가로 가고 싶습니다. 그러나 아직 캄캄한 새벽이라 갈 곳이 없어요.  
5분 가량의 무작정 가출본능이 막무가내로 물결칩니다. 4분 분량의 궁리가, 3분 분량의 심호흡이, 2분 분량의 포기가, 1분 분량의 침묵이 지나갑니다. 자리에서 일어서,  뒤로 돌아...... 커피 한 잔을 만들어왔습니다. -_-

    • 가장 가까운 사람일수록 상처를 주는 방법을 잘 알기 때문에 더 조심해야해요. 도와 미는 협화음이지만 도와 레를 같이 치면 불협화음이듯이. 한칸 정도의 거리가 필요해요. 항상 새겨둡니다. 누구든지간에 적당한 거리 두기. 

      • 쇼펜하우어가 우화를 통해 '호저의 딜레마'를 언급한 이유겠죠. 서로를 필요로 하는 사이일수록 물리적/심리적 거리를 적정선으로 지키는 일이 그처럼 어렵습니다.

    • 때려 치우고 싶은 충동이 문득 문득 올라오는 그런 계절입니다. 조심하지 않으면 바람에 휩쓸려 어딘가 먼 곳으로 떠나버릴 것 같아져서 무섭죠. 

      • 길을 잃는 건 제 길을 가지 못하는 상황인데, 계절 핑계를 대며 방랑하는 건 나쁘지 않죠 뭐~  
        독일 속담인지 싯구에 이런 게 있어요. "붉은 숲(단풍)의 계절에는 소떼도 길을 잃는다." 
        여러 시에 나타난 걸 보면 심지어 자연도 자주 길을 잃던데요. - -

    • 세상에... 요즘 저의 고통과 어쩜 이렇게 닮았는지요... 닮은 것과 닮지 않은 것 사이에서 저는 결국 닮지 않은 것에 좌절하고 아주 약간 닮은 것에 모든 희망을 걸어요...
      • 대학시절, 선배가 <닮은 사람들>이라는 이름의 동아리를 만들고 가입을 권했어요. 그시절의 저는 모임 알러지가 심했던 터라 거부했는데, 그 동아리가 신입생을 맞아보기도 전에 깨져버리더군요.
        선배 설명으론 서로의 기질과 가치관이 잘 맞으니까, 다른 면을 캐보려는 탐색과 스파이질이 작동하는 경향이 있어서 힘들더라고....ㅎ

    • 빈것이 오히려 진실인 젊음이 지나면 파열의 틈으로 생을 보게되어 서럽다고 합니다.


      그러네요 안닮아서 사랑하는 게 정말이지,난 나 닮아야 좋아해요.


      난 나가려고 맘먹으면 끝내 나갑니다 안나가려고 시간을 보내다 시계를 보고 늦어 안나갑니다.

      • 첫문장이 마음을 끌어서 반복해 읽노라니,  두 작가의 글이 연결돼 떠올라요. 
        하나는 김훈의 인터뷰. "무질서와 몽매 속에서 사는 걸 ‘청춘은 아름답다’고들 하던데, 나이 드니까 그런 무지몽매와 상종 안하게 되어서 좋아~"
        +
        전연옥(여옥 아님!) 시인의 이 싯구. "(나이 드니까) 남의 상처도 내 것처럼 아프고 / 별스러운 게 다 슬프고 " 
        •  늙으면 구질구질 해진다는걸 김훈은 누구보다 더 잘 알겠죠.

          • 그가 말하길,  자기 또래 사내들은 대개 부패하거나 일상에 매몰된 진부한 인간들이라 상대를 안 해서 친구도 없다고.  근데 20대라는 나이를 졸업한 후 그 또래 부류와 어울릴 일이 없는 게 더 좋다고. ㅋ
            그리고 기억에 남아 있는 엄격한 진술 하나.  "나이들수록 체화되지 않은 어휘 -가령 혁명, 진보, 자유... 같은 추상적/관념적인 단어들 - 을 쓸 수가 없다. 덥다, 춥다, 슬프다, 기쁘다... 류의 확실한 단어들로만 글을 쓰려니 점점 더 어려워진다."

            그의 호를 아시나요?  아름답고 쓸쓸한 의미예요. 봄에 몸이 마르는 슬픔이라는 뜻-  '춘수'.

            • 중2 때  김훈을 대면한 적이 있어요. '평화만들기'라는 인사동의 유명했던 까페에서였죠.  
              작가, 온갖 분야 예술가/ 명사, 기자들이 밤마다 모여 놀며 소통하던  공간이었어요. 막내 이모가 근처 모 신문사 기자여서 밤이면 그 소굴에서 놀았는데, 어느날 저와 접선할 일이 있자 절 그곳으로 데려갔어요.
              이모는 업무 보느라 테이블에서 사람들과 노닥이며 절 바에 혼자  앉혀뒀는데, 
              어느 순간 바로 앞에 있는 주방 문(허리를 굽히고 드나드는 쪽문)이 벌컥 열리더니 얼굴에서 물이 뚝뚝 떨어지는 아저씨가 불쑥 제 앞에 모습을 드러냈죠. (주: 술 깨기 위해 주방에서 세수하고 나왔던 것.) 화등잔처럼 눈이 커서 그냥 심쿵했는데, 그게 김훈이었어요. (물론 나~중에 이모의 설명으로 알았음.)
              절 보더니 "왜 예쁜 아이가 이곳에 혼자 앉아 있을까?" 라며 곰곰 얼굴을 뜯어보던 눈길이 기억에 남아 있습니다.
              그 뒤의 강렬했던 모습들은 에..... 공개 안 함! -_-

              • 어릴때는 다 예쁜데 지금은 아니겠죠 김훈은 나름 사나이 일생을 사는 사람
    • 요즘 국제정세가 심상치않죠. 미국이 호르무즈에서 빠진다는 이야기가 나오던데 그 경우 한국은 헬게이트가 열리죠. 우리가 지금쓰는 석유의 대부분이 이 호르무즈 해협을 통과하거든요. 미국이 빠지면 우리 원유수송선을 지키기 위해 자구책을 세워야 합니다. 그런데 한국정부는 대통령 인사권 남용문제가지고 나라가 두 패로 갈려 싸우고 있으니 한심하기도 하고 짜증도 나고 그러네요. 대통령 인사권이 대통령 하고싶은대로 하라고 국민이 위임한 것이 아닌데 왜 대다수가 반대하는 인사를 해서 정작 중요한 일은 안하고 정쟁으로 시간낭비만 하는지. 참으로 개탄스러운 나날들입니다. 어떤이들은 광장 민주주의라고 하는데 이건 광장민주주의가 아니죠. 서로 다른 입장을 가진 사람들이 같은 장소에 모여 토론하고 합의를 도출하는게 광장민주주의인데 이건 단순히 세력 과시 입니다. 예전 김대중이 백만을 모았네 김영삼이 백만을 모았네 서로 경쟁하듯 군중집회를 하던 때를 연상시키고 있죠. 그때도 동원됐네 자발적이네 가지고 옥신각신 했죠. 조폭들 머리수로 세과시하는거와 무슨차이인지. 그건 그렇고 본문을 보니 사랑이 고프신거에요? 그럼 사랑을 하세요. If you would be loved, love and be lovable
      • 댓글이 잘못 붙은 줄 알고 잠간 어리둥절~  - -  본문으로 개진해야 마땅한 의견을 왜 이런 글에다 파묻으셨을까효? (수줍음은 아닐 테고 귀차니즘?)
        미국의 동향에 따른 석유 문제도 발등의 불이지만, 동아시아의 세력 판도가 재구축되느라 한반도 주변 정세가 심상치 않습니다. 당연히 우리정부는 주도적으로 대응할 수 있는 전략을 짜고 있겠지만, 솔직히 저는 이 정부의 외교력에'도' 회의감을 가지고 있는 터라 별 기대가 없어요. 세계의 자본이 다시 한국을 '악마의 맷돌'에 넣어서 가루로 만들까봐 막연한 스트레스를 받고 있고 엷은 공포감도 느끼고 있습니다.

        그나저나 본문을 그렇게 해석하셔서 갸우뚱~ 
        사랑은 빠지거나 만들어내는 것이지 원하는 게 아니지 않아요? 아마 제 인생에 사람으로 인한  <에피파니>는 없을 겁니다. 탐하지도 기다리지도 않으니까요. 사랑은 피드백인데 저는 제 속의 주름들 살피며 세기만도 바빠요. 에취!
        • 옛 친구와 필담 나누던 버릇이 나와 너무 편하게 아무 이야기를 막 했네요. 자제하겠습니다.
          • 왜요~ 저번에 말씀하시길 대댓글 놀이가 학창시절 필담나누는 것 같다고 하셨을 때 백퍼 공감했는데요. 고딩 때 쉬는 시간을 못 기다리고 한 친구랑 필통에다 쪽지 돌려가며 필담 나눴던 기억이 상기됐거든요. 뭔 자제? 그건 다른 데서나 하시고 제겐 뚝!


            아부지가 저와 대화할 때마다 "어우 쌀쌀맞은 놈~"이라는 상투어를 쓰시는데, 제 어투가 냉냉하긴 한가 보군요. 이 게시판에선 나름 다정버전을 시전하고 있건만 어쩔~ 

    • 불협화음과 협화음이 순차적으로 반복되는데 사람은 협화음의 순간을 잊지 못하고 영원한(불가능한) 협화음을 지향하는 것이 아닐까 싶어요. 끊임없이 거의 무작위적으로 이어지는 반복 중에 불협화음-협화음-불협화음의 한 구간을 똑 잘라서 만들면 절망을 담은 영화가 되고 협화음-불협화음-협화음 구간을 잘라내어 보면 위기를 극복한 해피 엔딩 영화가 되겠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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