페데리코 펠리니의 글을 다시 읽으며

올해 초, 난방배관 공사를 하느라 집을 다 뒤집어 엎은 후부터 집 정리를 제대로 안 하고 대충 살고 있습니다. (저의 깔끔떠는 성격에 질렸던 가족들이 다 갸우뚱해 할 정도~)
다른 혼란은 익숙해졌는데, 책과 음반 정리가 제대로 안된 건 스스로 참 불편해요.  청구기호까지는 표시하지 않아도 도서관이나 음반매장 급으로 체계적 정리를 해왔거든요. 
대공사 끝난 후, 일단 박스에 들어 있던 책/음반을 가구로 옮기는 것까지만도 힘에 겨워서 아무렇게나 진열해 놓은 터라, 뭐 하나 찾으려면 한참 헤매야 하는 사정입니다.
더는 견딜 수 없어 오늘부터 정리에 들어갔어요. 반나절을 하고도 겨우 1/5 을 했는데, 그러다 페테리코 펠리니의 에세이 한 권에 마음이 꽂혔습니다. 

어느 분야든 거장의 재능은 그가 활짝 꽃피운 분야에만 한정되는 게 아니죠. 자신이 걸어간 길의 지형을 바꾼 대가들은 언어를 질료로 했을 때에도 그 재능이 유감없이 발현됩니다. 
영화감독들 중 제게 글로 강렬한 인상을 준 건 타르코프스키와 베르히만과 펠리니입니다.
"영화는 빛을 잉크로 하는 글쓰기다"라고 한 장 콕토의 말을 저는 이렇게 살짝 비틀어 이해해요. "어떤 영화감독은 잉크로도 빛의 세계를 구축한다."

[Fellini on Fellini]는 펠리니가 자유롭게, 그러나 퍽 의식적으로 조각해낸 자화상 같은 에세이들과 인터뷰를 재구성해 놓은 책입니다.  펠리니의 삶과 영화작업은 물론, 그가 관심을 두고 조명한 세상의 편린들이 총망라되어 있어요. 
그 중, 어릿광대 pagliaccio를 정의해 놓은 부분이 매우 인상적입니다. 어릿광대는 펠리니의 페르소나이자 그를 영화로 이끈 첫메신저이기도 하죠.

"나는 언제나 유쾌하고 익살맞으며 초라함에도 불구하고 애정을 불러일으켜 박수를 보내게 하는 방랑자와 어릿광대에게 깊은 감동을 받아왔다. 존경과는 거리가 먼 존재들에게 나는 늘 마음이 이끌린다. [...] 
처음 만난 순간부터, 나는 어릿광대와 같은 사람이 되고 싶었다. 결국, 대체적으로 나는 성공했다."
이어서 펠리니는 몇 페이지에 걸쳐 '어릿광대'론을 적고 있습니다. 그걸 제 마음대로 요약해서 옮겨요.

" 어릿광대. 그는 자유로운 존재다. 그의 삶엔 필요한 것이 거의 없으며, 生의 끝까지 낙관주의를 지속시킨다. 또한 그는 경이로운 존재다. 조롱이나 경멸에 상처입지 않고, 어떤 불행이나 재난에도 살아 남는다. 
그는 타인에게 즐거움을 주는 동시에 스스로도 즐길 줄 안다. 이것은 신의 가호 아래 있는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일이다.
그는 인간의 가장 동물적인 부분과 어린아이 같은 측면의 캐리커쳐이다. 그는 농담의 희생자인 동시에 농담의 주체이고, 조롱하는 자이자 조롱당하는 자이다.
어릿광대는 거울이다. 그가 만드는 기이한 캐릭터 속에서 인간은 그로테스크하게 일그러지고, 그 우스꽝스러운 이미지를 통해 우리는 스스로를 본다. 
그는 인간의 모든 비합리적 측면과 본능적인 부분, 그리고 인간에게 내재된 기성 질서에 대항하는 반란의 기운을 구현한다. 그는 우리의 그림자다. 그는 지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영원할 것이다."

어릿광대의 영어-  Clown의 의미는 <아주 수수한/ 거친/ 서투른>이죠. 후에, 관객을 인위적인 서투름으로 웃기는 사람이라는 뜻의 광대로 확장되었고요.
이탈리아어로 어릿광대는Pagliaccio입니다. 이 단어는 영어 의미와는 조금 차이점이 있어요.  clown은 서커스나 극장에 속하는 인물이고, 훌륭한 곡예사며 거의 예술가라고 할 수 있죠. 그러나 팔리아쵸는 장날이나 저자거리에 속하는 인물이에요. 만만한 조롱의 대상이죠.

밀라노 근무시절, 회사 근처엔 어릿광대 분장을 한 퍼포머들이 와서 짧은 공연을 펼치곤 했어요. 물론 그들은 우리에게 조롱이 아닌 경탄의 대상이었습니다.  그들은 불현듯 거리에 활짝 만개하는 봄꽃 같은 존재들이었어요.
불과 일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그 꽃들이 제겐 어떤 극단적인 풍경처럼 보였습니다. 삭막한 피로 속에서 바라보는 영원한 저편. 손 뻗으면 닿을 거리에 있으나 저와는 단절되어 있는 아름다운 세계.    

pagliaccio.jpg


pagliaccio2.jpg


    • 사진이 뜨나요? 새벽에 노트북을 포맷해서 어떤 상태인지 모르겠.... - -

        • 알려주셔서 고맙고맙~ 맥주 홀짝이며 계속 정리 중.

    • 존경을 받지 못하는 존재, 존경의 부재에도 자조적 희극을 이어나간다는 점에서 새삼 광대의 위치가 얼마나 밑에 있고 그래서 위대한지 곱씹어보게 되네요.
      • 프랑스어에  Plume이란 게 있어요. 깃털과 펜을 뜻하는데 , 앙리 미쇼가 '가볍게 사회의 변두리로 날아다니는 존재'라는 의미로 이 단어를 주인공 이름으로 써서 부각됐죠.
        한없이 가벼운 존재. 어디에서도 환영받지 못하고, 어디에도 정주하지 못한 채  미세한 바람결에도 어디로든 자기가 원하지 않은 공간으로 날아가는 존재. 
        미쇼를 읽은 후로 제게 '어릿광대'는 어디에도 뿌리내리지 않는 씨앗 없는 그런 의미의  존재예요. 

        내 사랑 연아 선수의 '어릿광대를 보내주오' 함 보고 가실게요~
        https://www.youtube.com/watch?v=mnL_ES-640g

    • 난 방 정리하고 다시 그대로 하는데 오래 걸려요 그러다 갑자기 다 합니다 태생적 게으름이죠 존경과는 먼 존재들에 마음을 두는 것도 일종의 태생적 게으름일까 내가 알려준대로 하니까 잘보이네요
      • 그건 '태생적 게으름'이 아니라 '고통'을 아는 것이죠. 마음속 고통을 하찮은 방식으로 표현하는 걸 알아보는 안목. 


        사진 올리는 건 가.영님이 적은 방식으로 붙인 게 아니고 (그건 이미 알고 있었음.)  촉이 가는대로 해봤더니 된 거예요. (공치사엔 찬물 쫙~ ㅋㅎ)

    • 사진을 보니 마르셀 마르소가 생각나요


      https://youtu.be/-PMDYjD21E0



      https://youtu.be/1Xs5kbd6gtE


      ㅡ93년 아카데미 시상식에서 소피아 로렌이 준 공로상을 받은 펠리니. 크로즈업된 줄리에타 마시나.
      • 마르소의 공연을 두 번 봤어요. 파리와 서울에서. 서울 공연 후  '소설가가 몇 권의 책으로도 표현하기 힘든 걸 마임이스트는 5분 안에 표현해 낸다'는 평을 누가 쓴 감상을 읽고 절대공감했죠. (저는 마임의 기본을 배웠어요. 유진규/김성구 쌤에게. ㅎ)
        근데 제가 마임의 아름다움을 알게된 건 Jean-Louis Barrault의 영화를 통해서였습니다.
        <천국의 아이들>의 이 장면.
        https://www.youtube.com/watch?v=0ABzfKzwA7g&t=58s

    • 갑자기 사회적 문제를 일으킨 이 사람이 입었던 옷이 생각나요




      신정아 알렉산더 맥퀸 이미지 검색결과




      알렉산더 맥퀸 옷이었다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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