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의 풍경

아니 그게 아니라니까?

저희 집과 할머니집을 오가며 간간이 섞여나왔던 소리입니다. 그러니까 평온한 가족이란 단어는 판타지라는 걸 다시 한번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대단한 불화도 아니고 데시벨 높은 언성을 들은 측에서 충분히 납득하고 넘어갔지만, 그럼에도 조금 어색하긴 했습니다. 왜 저렇게 짜증을 낼까. 왜 저렇게 짜증을 긁을까. 피 한방울 안 섞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오히려 별로 겪을 일 없는 스트레스이고 훨씬 더 교양있게(가식적으로) 처리되는데, 가족 사이에서는 더 격하고 직접적으로 해결이 되곤 합니다. 가족의 편안함이란 고민없이 짜증을 지를 수 있는 특권인 걸까요.

일단 제가 엄마한테 짜증을 냈다는 걸 고백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희 엄마는 다 좋은데 특유의 자기긍정고집이 있습니다. 당신께서 뭔가를 원하면 그 원하는 대로 저나 다른 가족의 반응을 미리 편집해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의사소통에 굉장한 난맥이 생기곤 합니다. 평소에는 귀여운 해프닝 정도입니다. 예를 들어 저는 일평생 단 한번도 매생이죽을 먹어본 적이 없고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그런데 저희 엄마는 매생이죽을 좋아합니다. 그러면 저와 같이 먹었으면 하는 바람을 품고, 현실을 왜곡해버립니다.

"쏘니야, 너 매생이죽 좋아했잖아? 왜 갑자기 안먹는다는 거니...? ⊙.⊙"

이러면서 식탁에서 계속 매생이죽을 권하면 권유받는 저는 계속 진실을 밝히면서 거절을 해야 합니다. 그런데 엄마의 천연덕스러운 표정을 보면 좀... 열받습니다. 그냥 기가 막히고 말 일인데 이런 결정들이 사소한 데서 계속 발생하니까 제가 해명부터 해야 하는 상황이 되는 것입니다. 그 의사소통의 실패는 고스란히 제 책임이 될 때가 많구요...

이번 추석에는 엄마의 자기중심적 착오가 더 빈번하게 일어났습니다. 저한테 제육볶음을 먹을 건지 잡채를 먹을 건지 엄마가 물어봅니다. 그런 전 제육볶음이 먹고 싶다고 말합니다. 이 다음 어떤 요리가 나왔을지는 아시겠죠... 그리고 저의 질문에 저희 엄마가 뭐라고 대답했을까요. "너가 제육볶음보다는 잡채 먹자면서?" 차라리 그냥 당신의 뜻을 우선했다면 모르겠는데, 그게 갑자기 저의 선택이 되고 대사로 낭독되면 사람이 환장하게 됩니다... 내가 언제? 이건 먹고 싶은 걸 먹냐 못먹냐의 문제가 아니라 진실의 문제가 되는 것입니다!

얼마 안있어 진실왜곡은 다시 터졌습니다. 어떤 한과를 두고 이게 유과냐 약과냐 하는 언쟁이 저와 엄마 사이에 불이 붙었고, 엄마는 호기롭게 외쳤습니다. 십만원 내기 하자 십만원! 타짜의 고니를 방불케 하는 그 자신감에 저는 아귀처럼 달라들었다가는 손모가지가 날아갈 것 같아서 포기했습니다. 아 무슨 십만원씩이나.... 식품 쪽에 종사하는 제 동생이 남편과 함께 저희집에 뒤늦게 오자 저희 엄마는 네 오빠가 뭣도 모르면서 헛소리를 한다~~ 하고 동생신문고를 둥둥 울려댔습니다. 이게 약과냐 유과냐??? 제 동생이 정마담처럼 저를 보면서 말하더군요. 오빠 이건 약과야... 그러자 저희 엄마가 또 합의된 적 없는 승전보를 울리기 시작했습니다.

"10만원 내놔라~~ 10만원!! 아까 내기했잖아 10만원 내놔!!!"

저는 졸지에 10만원 내기를 한 사람이 되어서 꼼짝없이 돈을 뜯길 판이었습니다. 약과도 모르는 인간이 되서 짜증나는데, 이제 참여하지도 않은 내기로 쌩돈을 날릴 판이라서 더 짜증이 나더군요.

"내기 안했잖아!! 내기 안한다고 했잖아!!"

그런데 옆에서 보면 영락없이 제가 내기약속을 무르면서 ㅌㅌ를 시전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그걸 의식하니까 저도 괜히 움츠러들고 그걸 또 극복하려고 승질머리를 동원하게 됩니다.

앞으로는 그냥 엄마에게 문자를 보낼 생각입니다. 기록을 남겨야 다른 소리가 안나오겠죠...
    • 누구든 자기 맛있는걸 남한데 먹이려 합니다 고귀한 인류애죠 엄마가 좀 더하시네요
    • 유과 약과는 생긴거 부터 다른데 좀 모르시네요
    • 자신이 좋아하는 (좋은 행위라고 믿는)것들 100가지를 해주는 거보다, 상대방이 너무 싫어하는 그 한가지 . 내겐 아무것도 아니지만, 또는 난 좋아하지만. 상대방에겐 너무나 싫고 못 견디겠는 바로 그 한가지. 그거 하나를 안 하거나 고쳐주는 게 어려운 것이 인간 에고의 속성이죠. 불가능에 가깝달까요. 관계의 속성이고 우리가 사랑을 한다 널 아낀다 할 때부터 시작되는 비극 같습니다. 자신이 생각하기에 상대방을 위한다고 하는 행동들이 그닥 상대방이 원하는 게 아닌 경우도 참 많죠. 가족 관계에서 그 에고의 일그러짐이 극대화되는 것 같아요. 영화 20세기 여인들에서 애슐리 쥬드가 자기 아들을 두고 말했던 게 생각나요. "그냥... 걔를 사랑하면 할수록 점점 더 멀어져"(점점 더 나빠져였나요? 갑자기 헷갈림;;)


      또 하나 드는 생각은 sonny님 어머니께서 오랜만에 보는 아들과의 그런 투닥거림마저도 재밌고 반가우신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드네요. 저희 어머니는 아직도 제가 오이지무침을 싫어한단 걸 받아들이지 못하시며, 매년 노구를 이끌고 오이지를 담가 사력을 다해 꾹꾹 물기를 짜서 무쳐 택배로 보내 주십니다. 많이요. 아주 많이. 꽤 오랜 세월동안 애쓰지 마시라 힘드시다 병난다 난 오이지무침 진짜 싫어한다 애원하고 싸워도 보고 달래도 봤지만. 이제는 그래 그럼 내가 오이지무침 싫어하는 걸 고치자! 하기로.... 저희 큰언니가 그러더라고요. 엄마는 그냥 그렇게 오이지 무침 했다고 하면서 너랑 게 얘기하는 게 좋은 거라고.


      여튼 sonny님 경우와는 좀 핀트가 다른 얘길 한 것도 같은데. 그렇다고 자기긍정고집 어머니 나빠여!!! 댓글 달수도 없고 해서... ㅎ 주절주절 해봤습니다. sonny님 글 재밌게 읽고 있어요 -
      • ㅋㅋ 감사합니다


        오이지를 싫어하는 저에게 너무 무서운 사랑법이군요....
    • 부모와 자식의 불화에는 크게 세 단계가 있는데, sonny님은 1단계- 삐지는 단계- 가 되겠습니다. 네, 네. 


      부모가 날 이해해주지 않고 당신의 가치를 강요하시므로써 토라지고 화내는 단계죠. 네, 네.


      이런 경우는 보통 그 순간이 지나면 감정이 스르르 풀려버리니 유념치 마세요. 네, 네.




      어머니는 sonny님이 칼 없이 날을 타고 판 없이 널을 뛰던 작은 무당 시절을 다 아는 분이에요. 무조건 무릎 꿇어드리세요~


      어머니의 주입식 강요는 까마득히 좋은 거예요.  우리 앞에 그분과 까마득히 좋을 시간이 얼마나 남아 있을까요.

      • 네 고향에서 올라올 때마다 그런 소회에 젖곤 해요... 언제 또 이렇게 토닥거리나 싶어서...
    • 어머니도 Sonny님도 연세가 아직 어리(?)신가봐요?


      저라면 겁부터 났을 것 같아요..

      • 아뇨.. 저도 사실 좀 걱정을 하긴 했습니다...ㅠㅠ
    • 말도 안되는 트집도 질기고 질긴 고집도 기운이 좀 남아 있을때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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