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명하기 게임, 인간의 본성

동네 아이들이 골목에서 노는 소리를 좋아합니다.
가끔 가만히 듣다보면 '인간의 본성'이라거나 '사회'란 것에 대해 생각하게 되죠.
내가 배워야 할 모든 것들은 유치원에서 배웠다거나 하는 책처럼(읽어보진 않았습니다만..;;;) 사회적 발달은 이미 그 시기에 완성에 가까워지는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인생.. 의미.. 무엇..)

오늘은 너댓살 먹은 여자아이가 name calling으로 권력을 획득하는 과정을 들었어요.
자기보다 두어살 많은 남자아이를 '똥파리'라 부르는 것으로 집단내 권력의 양상을 바꿔놓는 것이었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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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개 같이 놀곤 하는 아이들은 4명이 기본팩, 여기에 확장팩으로 아이들이 추가되거나 빠지곤 합니다.

기본팩을 구성하는 아이들을 나이순으로 정리하면 '- 여아a < 남아a < 여아b < 남아b +' 정도인 것 같습니다. 가장 큰 아이와 가장 어린 아이의 나이차는 너댓살 정도?
(호칭과 음성으로 짐작할 뿐이라 정확하진 않습니다.)
통상 팩의 우두머리 노릇, '놀이의 종류'나 '규칙'을 정하는 역할을 하는 것은 남아b입니다.
각각 남아b는 대체로 공정한 편, 여아b는 자기 주장이 강하지 않고, 남아a는 남아b에 충성심이 강하고..
여아a는.. 재미있는 아이죠. 이 중에서 혼자만 미취학 연령인 것 같구요.

오늘은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여아a가 남아b에게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오빠를 똥파리라 부를거야'
남아b와 여아b는 이에 특별히 코멘트하지 않지만, (아마 이런 호명이 유치하다고 느껴서겠죠)
남아a는 여아a의 선언을 비웃습니다. (여기서 '호칭은 사회적으로 공인되어야 하는 것'이라는 인식이 발견됩니다)
그러나 남아a의 반발에도 불구하고 그보다 서열이 위라 여겨지는 남아b와 여아b가 이를 묵과하면서, 상황은 여아a가 바라는대로 흐르죠.

호칭의 사회성에 대해 남아a와 '다른 의견'을 갖고 있는 여아a는, 자신의 선언을 철회할 의사가 없고..
자기 의사를 관철시키기 위한 구체적 실천을 즉시, 충실히, 그리고 꾸준히 이행합니다.
'똥파리 오빠, 블라블라', '똥파리! 똥파리! 똥파리!'..

처음엔 그저 무시로 일관하던 남아b도 이 상황이 지속되자 견디지 못하고 '내가 왜 똥파리인가?'를 묻습니다.
하지만, 돌아오는 여아a의 답은 '내가 그렇게 부르기로 했기 때문'이죠. 흠 잡을데 없는 완벽한 답입니다.
'표현의 자유'에 대해 폭넓은 관용적 태도를 갖고 있기 때문일까요, 남아b는 뭐라 대꾸하지 못합니다.
(...이 문제에 대해 잠시 생각해봤는데, 사실 저도 뭐라 해야할지 모르겠더란..)

그냥 바보같고 유치할 뿐이던 '똥파리'는 이제 모욕적이고 구체적인 위협으로 작용합니다. 호칭과 그 배후의 합리성, 상호존중에 관한 사회적 합의는 파기됐습니다.
암묵적으로 전제된 것으로 여기던 무엇이 사실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발견과 함께 팩의 우두머리인 남아b의 권위도 위협받습니다.

'똥파리' 호명의 괴벨스적 훌륭함은 그 미묘함에 있습니다. 일단 사실 여부를 논할 여지가 없이 간결하고, 어딘가 모욕적인 것 같은 기분도 들지만,
그보다는 바보같고 유치하다는 느낌이 크기 때문에 이에 대해 적극적으로 대응하는 일도 바보처럼 느껴지죠.
그 미묘함으로 인해 제재받지 않으면서, '똥파리'는 구체적인 작용을 획득합니다.
그게 뭐가됐건, 상대가 원치않는 이름으로 호명한다는 그 단순한 사실, 상대의 의사에 반하는 호명을 관철시킬 수 있다는 것 만으로 권력이 됨과 동시에
이를 각인시킬 수 있죠. 미묘하게 모욕적이라면 더 효과적일테고.

'개새끼는 통하지 않지만, 똥파리는 통한다'는 걸 여아a는 어떻게 안 것일까?
결국 오래지 않아, 남아b는 다시 묻습니다.
'어떻게 하면 똥파리라 부르는 일을 그만둘 것인가?'

남아b가 이 상황을 타개할 간단한 해법들이 몇가지 있죠.
기존의 권력관계를 이용해서 여아a를 제재해도 되겠고, 같은 방식으로 멸칭을 쓰는 것으로 보복할 수도 있겠죠.
물리적인 억지력을 행사하는 것도 한가지 방법입니다.
그러나 이같은 해법들은 권위의 정당성를 손상시킬 위험도 있거니와, 그보다 남아b 자신에게 유치하고 부당한 것으로 여겨져 채택되지 않았겠죠.
결국 놀이의 규칙은 여아a가 원하는대로 수정되었으며, 아이들은 '똥파리 없는 상태'로 돌아갔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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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똥파리 없는 상태'가 '똥파리 이전의 상태'와 같을 수 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새로운 놀이의 규칙이 모두가 동의할 만한 최선의 것이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이 경험으로 여아a와 남아b는, 아니 모두가, 뭔가를 배웠겠죠. 오, 다가올 미래의 세대여..
    • 너무 즐겁게 읽었습니다. 역시 인간은 재밌어요.

      여아a가 저보다 낫네요ㅋㅋ
      • 유치하기만 한데 뭐가 그리 좋으신가요? 이래 봤던 경험이 있으셨던 건 아닌지요? 저는 제 아이가 저러면 그냥 말리고 그러지 말라고 할 것 같은데요. 요새는 초등학교에서 아이들끼리 한 말갖고도 학폭위도 열리기 쉬운 세상인데요. 이 각박하고 바쁜 세상에 호구되는 것은 싫지만 최소 남에게 피해 줘서 학폭위 열리고 아이의 평판에 금이 가고 기록이 남고 이런 것은 피하고 싶습니다.

    • 흥미롭지만 흥미롭지만은 않은 이야기네요. 진지하게 반응하자면 기득권이라 함은 자신의 호명이 사회에서 전혀 위험하지 않고 젠틀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위치에 있는 사회적 범주를 말하는 것 같습니다. 당연히 상대적 약자는 그 반대겠죠.
      • 말씀하신 내용은 기득권자가 가진 권력의 토대나 그 성격과 관련이 있겠죠.


        대중독재라든가의 상황에서는 대중에 영합하는 권력이 말씀하신 것처럼 젠틀한 것으로 여겨지기도 할테고.


        하지만 그게 권력의 필요조건일까를 생각해보면 그렇진 않을 것 같군요.

    • 7세 5세 아이들을 키우는 중인데 대략 공감되는 것이 애들 사회성이란 게 그때 대략 완성되는 느낌이라는 부분입니다. 어찌된 일인지 (아마 타고나는 부분이 큰 것 같기도) 저 어린 나이에 이미 캐릭터들이 다 잡히고 그에 어울리게 행동들을 하더군요. 더 많이 키워 놓은 주변 사람들 의견도 거의 그렇고 덧붙여서 그게 자라면서 잘 안 변한다고.

      그게 사실이라면 전 미래의 호구 두 마리를 키우는 중이라 좀 애석하지만 뭐 멘탈 건강한 호구로 길러야겠죠. ㅋㅋ



      그리고 전 그 책 읽었습니다. 유치원 때 다 배웠다 뭐 그거요. ㅋㅋ 걍 유치원 선생들이 가르친대로 인생 착하게 살거라... 그런 내용의 20세기 스타일 훈계책이었던 걸로 기억하네요.
      • :) 착한 아이들인 모양이군요.

    • 비장미 넘치는 막줄에 좀 터졌네요. 상식적인 사람이라면 그래서 애들한테는 올바른 사회성 교육이 필요하다고 생각하겠습니다만.. 떼쓰는 아이한테서 괴벨스를 읽는 조선일보 사설적인 상상력이라니.

      • 여러분의 즐거움이 곧 저의 즐거움입니다. :D

        • 의뭉스러운 버릇도 여전하시고. :)

    • 아주 지혜로운 아이들이네요 장래가 기대됩니다.

    • 정말 흥미로운 글이네요. 특히 모욕이 파괴적이지 않고 유치할 때는 대응조차 어려워진다는 분석이요.
      • 파괴적인지 유치한지는 듣는 당사자가 결정할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듭니다.

    • 똥파리로 호명당한 아이에게 감정이입해보면 이 상황은 남아a에겐 드럽게 잔인하고 비참한 상황이겠네요. 이 게임은 여아a 단독으로는 성립하기 어렵고 남아b가 여아a를 사주했거나 최소한 이러한 상황을 용인하여 골목의 질서를 세우려고 했을 경우여야 가능한 상황입니다. 남아b가 질이 안좋은녀석인거죠.
      • ...오늘은 뭐가 마음에 안들었는지 여아a가 남아b에게 선언합니다. '이제부터 오빠를 똥파리라 부를거야'...




        권력자인 남아b가 똥파리인 상황입니다. 남아a는 형아를 똥파리라 부르니 싫은거라 잔인하고 비참할 상황은 아닙니다



        • 헉. 남아a가 아니라 b가 호명된거네요. 제댓글은 무시하세요.
    • 남아b가 무던한게 착하네요. 머리도 약삭빠르지 않은 거 같고요. -‘내가 똥파리니 넌 이제부터 구더기야, 바퀴벌레도 좋고’ -이렇게 나올 법한데 애원하는거 보니.
    • 그리고 이 넷은 스타코트몰에 잠입하게 되는거죠.

      • 1*년 뒤

        남: 나 군대간다.

        여: 잘다녀와라 똥파리.

        남: (진심 화내며) 아 씨! 그렇게 부르지 말라고!

        여: 그럼 뭐라고 불러.

        남: ...자...ㄱ...

        여: 뭐래. 술이나 드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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