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와 함께한 저녁식사

어젠 dpf(독일 동료)가 굳이 저와 저녁을 같이 먹어야겠다며 바득바득 따라붙었어요. "왜 그래야 하는데?" 물으니 요즘 제 얼굴이 '해골바가지'(이런 표현은 대체 어디서 배우는 건지) 같아서 뭘 좀 먹여야 하겠다는 동정심/의무감이 들기 때문이라더군요. 사실 한달 전쯤부터 거울 볼 때마다 패인 볼이 주는 섬뜩함에 놀라고 있던 터라 말문이 턱 막혔습니다.
콜라겐이 많다는 이유로 그가 선정한 메뉴 '족발'을 먹었어요. 제가 먹는 모양새를 지켜보다가 "오른쪽 어금니로 다 씹었으면 꿀꺽 삼켜야지 왜 왼쪽 어금니에게 토스하는 건데?"라는 지청구를 들어가면서요. 

평소 dpf와 단 둘이 있으면 자주 빈 순간이 생겨납니다. 할 말이 없다기 보다는 지금은 이 말을 할 때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곤 해서요. 그래서 그도 제가 마련한 침묵의 흡인력에 호응하여 혹은 배려하듯, 그 진공의 규격에 맞는 미소만 지어보이곤 하죠. 근데 어제 저녁자리는 그의 잔소리 대잔치였어요. 제 침묵과 그의 침묵이 날카롭게 부딪혀 과도하게 진지한 풍경이 열리던 옛순간들이 절실할 정도였죠. 그래도 당황하지 않고 그의 월권적인 간섭을 다 받아들였습니다. 이만큼 우리가 가까운 사이가 됐나? 짚어보면서.

모든 관계에는 관계를 매개하는 상황이나 의식이 있죠. 대부분의 매개는 자연스러워 자각되지 않지만 매개의 매개성이 황황히 노출되는 경우도 있습니다. 어색하고 불편하지만 그것도 관계의 한 풍경인 거죠. 풍경은 변하기 마련입니다. 어떻게 변할지 알 수 없다는 것도 풍경이 갖는 매력의 한 부분이고요. 혹시 관계가 원치 않는 방향으로 흘러간다 해도 기껏해야 불편하거나 실망하게 될 뿐 아니겠습니까. 저는 그 괴로움의 풍경 속으로 걸어들어갈 준비가 돼 있는 사람입니다. 험험

2. 몇년 전, dpf는 제게 한국어를 일 년 정도 배웠습니다. 그시절 그는 아침마다 머릿속에 떠오르는 서툰 글을 메모지에 적어 제 책상 위에 올려 놓곤 했어요.  삐뚤빼뚤한 글씨로 쓰인 그의 시적인(?) 문장을 음미하는 일이 저의 작은 즐거움이었죠. 
언젠가 아침의 글은 정도가 좀 지나친 것이었습니다. 메모지엔 이렇게 쓰여 있었어요. "너의 얼굴은 싸늘하게 웃는 겨울처럼 차갑다."
한국인이 쓴 글이라면 말할 수 없이 유치하고 상투적인 표현이라고 썩소했겠지만, 이방인에게서 나온 그 수사는 당돌하게 문학적이어서 저를 웃게 만들었어요. 생각에 잠기게도 만들었습니다. 

그 메모를 보고 눈으로 그를 찾아보니, 그는 거리의 소음이 밀려들기 시작하는 창가에 서서 일부러 커피머신을 높이 치켜들고 집중하여 커피를 잔에 따르고 있는 중이었습니다. 마치 시간 밖의 존재인 듯 적요의 극치를 보여주는 모습이었어요. 하여 저는 그의 책상 위에다 이런 답 메모를 남겨 놓았더랬죠. "너의 얼굴은 회의 없는 한 순간처럼 고요하다."

(사전에서 '회의'라는 단어를 찾아 다섯 개의 의미를 정리해 다음날 제시하는 예쁜 짓을 했는데 그날 점심을 제가 샀던가, 아니던가. - -)

    • 사람 사이 관계는 참 묘해요. 제가 종종 가는 수영장이 있는데 갈 적마다 보는 친구가 있어요. 이름도 모르고 뭐하는 친구인지도 당연히 모르죠 저는 지금 세어보니 총 6군데 수영장을 다니고 있는데 이 A라는 수영장에 가면 늘 그 친구를 봅니다. 같은 레인에서 한시간 이상 돌면 보고싶지 않아도 그의 속속들이(?)를 알게 되죠. 그 뿐인가 수영장 물은 영자의 입에 반쯤 들어 왔다 나간 물이고 발닦은 물이기도 하죠. 물론 샤워는 하고 들어가게 되어 있다만 검사하는게 아니니. 그러다보니 한 레인에서 한시간 뺑이를 치면 말 한 마디도 안섞어본 그친구와 전우애가 생길정도. 어느날 이 친구가 안 보이면 꽤 섭섭할듯. 계약서에 흔히 arm's - length pricing 이란 말을 많이 쓰죠. 적당한 거리를 유지해야 하는데 사람사이에는 이게 기계처럼 안되더라는.
      • 어떤 관계는 자기 내부에 있던 축을 바깥으로 내던지게 만든다죠. 모든 만남이 그렇진 않을지라도 결정적인 어떤 만남은 그렇다면서요.
        선배로 부터 "너무 늦기 전에 너도 죽음의 충동이 일 정도로 퍼포머티브하고 에로틱한 자아와 마주하게 하는 결정적 상대를 만나게 되기 바란다~"라는 축복인지 저주인지 모를 말을 들은 적이 있어요. 
        음. 그 무아적이고 도깨비적인 '관계의 매혹' 이미지는 가슴을 스쳤는데, 의식에 클로즈업되지 않은 것 보면 저는 이번 생에서는 가망없는 일인 듯합니다. ㅋㅎ
        • no,no, 그 선배 참 이상한 환상을 주입하시네. 나를 설레게 하는 결정적인 사람을 만나는 건 걱정할 필요가 없어요. 세상은 넓고 괜찮은 사람들은 생각보다 무지 많으니까요. 정신없이 살다보면 어느새 내 옆에 있을 겁니다. 문제는 두가지 관문을 통과해야 하는데 일단 상대방도 나만큼 결정적으로 설레이느냐이고 그렇다 해도 이 관계를 제도권적으로 승인을 받아야 하느냐를 결정해야 합니다. 피곤한 일이죠. 더 큰 문제는 이 감정이 유통기한이 있단 말이죠. 지금은 결정적인 것같아도 언젠간 김빠진 사이다같이 되어 버리는데 이것도 그렇게 쿨하게 대처가 되는 사람이 별로 없죠. 그러니 그 분을 만나도 그저 왔나 보다 하게되는것.
          • 이상한 말로 들릴 줄 알지만 이렇게 밖에 표현이 안 돼서 적습니다. 글에서 '어른'의 풍모가 느껴져요. 


            그리고 어쩐지 저는 앞으로 아무리 나이 먹어도 '어른'은  못 될 부류의 사람이라는 자각이 들고요. (해죽~)



            • 제가 주제넘은 소리를 했는가보네요. 미안합니다. 제댓글들 무시하세요. 딸래미를 키우다보니 저절로 잔소리처럼 되는가 봐요. 뭐 메일이나 전화통화만 하다 실제 고객들 만나면 이리 젊은 분인줄 몰랐다고 호들갑을 떠는데 그거 다 거짓말인가보네요. ㅎㅎ
              • 에? 칭찬으로 드린 말인데 이러시면 아니되옵니다~  저는 오빠가 없기도 하거니와 여성들이 흔히 지인/애인에게 쓰는 '오빠'라는 호칭도 거부감이 들어 한번 안 써봤어요. 사실 덧글에서 '오라버니'의 풍모를 느꼈는데 그 단어를 쓰기 싫어서 '어른'으로 대체한 거여요.

                • 한남 개저씨일뿐이에요. 

    • 내상황에 둘이 어찌될까 몰라도 있었으면 하고 좋아보입니다 


      뭐가 top of the world 란 노래도 있지만 


      차라리 준비가 되어있는 상황이 위에꺼 보다 한수 아래여도 낭만의 정점이기도 하고 


      싸늘하게 웃는 겨울 멋있는데요.


      • Amor Fati. 니체가 사용해서 유명해진 어구죠. 김연자 씨가 이 제목으로 부른 걸 접한 후로 즐겨 듣는 노래예요.
        https://www.youtube.com/watch?v=yfnFVU9HnIs

        가영님은 댓글까지 훤히 꿰고 있는 분이니, 이 영상 속 친구가 저와 어떤 관계인지 모르지 않으실 듯. ㅎ
        귀염뽀작잔망한 영상을 간만에 찾아봤습니다. 
    • 담담하게 조곤조곤 쓰셨지만 글 속에 묻어나는 설렘이 저에게도 전해지는 듯해서 좋네요.


      회의 없는 순간이란 미팅 없는 시간일까 skepticism 없는 시간일까..

      • 저 문장에서의 의미는 당연히 skepticism이죠. 한국어 실력이 일취월장하더니 요즘은 현학적인 용어에 심취한 눈치예요. 저녁 먹으러 간 인사동 거리를 보고 그러더라고요. "인사동은 그동안 풍경의 미덕이 많이 사라졌어."




        이 글  어디에 설렘이 깃들어 있을까? 갸웃하는 맘이 들어 정독해봤어요. 일희일비님의 현재가 만사에 설렘을 느낄 만한 상태이실 것이라는 결론을.... 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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