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이 보낸 메시지

마음 졸이던 프로젝트 매듭이 풀려서인지 어제 오후부터 80%로 진전된 몸살을 앓았습니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플러그를 뽑은 사람'이 되어 침대에 누워 집중해서 몸과 싸웠어요. 혈관을 타고 피로와 냉기가 돌아다녀서 몸으로부터 몸을 구출해야 한다는 비장한 기분이 들곤 했습니다.  
평소보다 세 시간쯤 더 잤는데, 중간에 깜짝 정신이 들 때면, 잠이 이토록 좋은 건데 부족했던 모양이구나, 라는 생각을 하고 또 잤어요. 세상도, 사람도, 일도, 무엇도 궁금하지 않았고. 그저 제 안에 떠 있는 가장 작고 밝은 불빛 하나를 가만히 응시하는 게 좋았습니다. 먼 곳으로부터 건너와 잠시 빛나던 저녁 철길의 흰 등 같던 그 불빛.
약 기운으로 들어간 잠 속인데도 이런저런 꿈들이 이어지더군요. 그 중 두 개의 꿈이 기억에 남습니다.

# 신림동 녹두거리에서 저까지 여덟 사람이 모여 소주를 마셨어요. 격식 없이 온갖 모습 다 보여주며 지내던 친구들이 모인 자리였으나, 이상하게 진정으로 친밀한 느낌이 들지는 않았어요. 모두 자로 재듯 어김없는 세상에서 흔히 마주치는 그런 얼굴들을 하고 있었죠. 저 역시 그랬을 거예요.
자리가 편치 않아서 소주 한 병을 비우고는 아무도 눈치채지 못하게 슬며시 일어나 먼저 나왔습니다. 계산을 하려고 식당 주인에게 얼마냐고 묻자, 십만원인데 여덟명이니 당신에겐 만이천오백원만 받겠노라며 단호한 태도를 보이더군요. (이런 디테일까지 선명한 꿈이란 굉장히 우스꽝스러워요. - -)
 
계산을 하고 밖으로 나오니 캄캄한 어둠이었습니다. 순간이동으로 저는 낯선 언덕에 서 있었어요. 취기는 있었지만 피곤하지는 않았고, 어떤 위급도 없는데 어딘지 황량했습니다. 정체를 알 수 없는 사람들이 불안정하고 빠른 걸음으로 비탈진 언덕 한쪽의 골목으로 들어가거나, 골목에서 나오고 있었어요. 그 어둠, 그 언덕에서 저는 순간 어디로 가야할지를 모르는 사람이었습니다. 가야할 곳과 목표가 분명한 사람이었는데, 그 점을 꿈 속의 저는 잊어버린 것 같았어요. 제가 모르는 또 하나의 생명이 제 안에서 지고 있었습니다. 밖도 안도 다 같이 어두웠어요.

목표와 목적은 다른 것이죠. 목표는 몇 번이고 바뀔 수 있지만 목적은 개안 없이는 변하지 않습니다. 또한 목적은 그 전모를 알기도 어려워요. 그 점이 마음에 들기도 합니다. 어쨌든 다음 꿈에서는 목표 뿐만 아니라 목적도 명확히 아는 사람이 되어 있고 싶어요. 이래서 아직 살 날이 남아 있는 것입니다.

# (이건 초현실주의 부조리극 같은 꿈.)

저는 사람들이 가득 찬 극장 안 객석에 앉아 있습니다. 무대에선 제가 아는 남자가 바이얼린을 연주하고 있고, 어머니는 객석의 제 곁에서 하프를 뜯고 있어요. 그런데 마지막 현에 팔이 잘 미치지 않아 힘겨워 하시는 표정입니다.
그때 어디선가 갑자기 커다란 양 한 마리가 나타나더니, 검고 슬픈 목소리로 제게 무슨 말인가를 건네요. 그러나 목소리가 너무 작아서 잘 들리지 않아요. 저는 울먹이는 양의 꿈 속으로 들어가 그 말을 듣습니다. "어디로갈까야, 나는 못을 가졌단다." 양은 제게 천천히 못질을 가했습니다
다시 극장. 눈매가 날카로운 여자가 노래를 하고 있습니다. 그때 책을 싸게 판다는 광고가 극장 밖에서 들려오고, 순식간에 객석의 절반이 비어버려요. 성악가는 노래를 멈추고, 바이얼린을 연주하던 남자가 무대에서 달려 내려와요. 그리고 그는 양의 못질로 인해 피로 물든 제 몸을 안고 울기 시작합니다. 남자의 눈물 속에서 연푸른 새의 뼈가 깨지는 우두둑 소리를 들은 것도 같아요. 어머닌  다른 곳을 바라볼 뿐, 제가 불러도 대답하지 않습니다.

바이얼린 남자의 눈물로 제 옷깃이 젖고 발목까지 흘러내린 슬픔에 극장 바닥이 흥건히 부푸는데도, 가로등엔 하얀 방전의 불꽃이 튀는데도, 그는 울고만 있습니다. 극장 밖에서는 지나던 버스 한 대가 뒤집히고, 바닷새들은 허공에 비명을 흩뿌리는데, 남자는 하염없이 울고 있을 뿐이었어요.
음악이 멈춘 차갑고 넓은 극장 대합실. 저는 막막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봅니다. 왜 내가 이런 꿈 속에 있는 걸까, 의아해 하면서.
(다행히 어떤 꿈도 반드시 끝이 납니다.)

제가 잠들어 있던 동안에도 세상은 한순간도 멈추지 않고 움직였겠죠. 그 속에서 몇 사람이 슬픔으로 쓰러져 죽고, 몇 사람이 사랑에 빠져 정신을 잃었으며, 또 몇 사람이 집에서 쫓겨나거나 통째로 삶을 잃었는지 저는 알지 못합니다. 그러나 잠에서 깰 때마다 새로운 것을 납득한 듯한 기분이 들어요. 
이해와 납득은 다른 거죠. 저는 이해하지는 못해도 납득하는 기분으로 이 세상을 받아들입니다. 문을 엽니다. 여름숲이 보이고 동산 같은 건물들이 보이고 첨탑이 보이고 철길 같은 도로가 보이고 햇살과 구름이 보일락말락합니다. 그러나 저는 납득해요. 바람이 나무와 사랑에 빠져 철길을 낳았다고 해도 납득할 겁니다. 


 
    • 꿈의 내용도 내용이지만 이렇게 소상히 기억하신다는 것도 대단합니다. 저에게는 없는 소양. 

      • 저도 기억하는 꿈은 백에 한둘 정도예요. 이 글은 깨어나자마자 타이핑한 덕이지 안 그랬으면 곧 휘발되고 말았을 겁니다.
        괴테가 잠자리의 머리맡에 노트를 놓아두곤, 영감을 주는 꿈이 스치면 얼른 일어나 기록하고 다시 잠드는 습관이 있었다죠. 근데 아침에 일어나 보면 노트에 적혀 있는 건 언제나 한 줄로 그어진 직선 뿐이었대요. - -

        • 깨자마자 적어두신 거군요. 본문을 읽는데 꼭 살짝 우울해진 하루키 소설의 한장면..혹은 윤고은 소설의 환상적인 묘사 일부분을 읽는 느낌이 들었어요. 문재(文才)도 타고나는 거라고 생각하는데 글을 쓰는 재능도 재능이지만 일상에서 글을 써낼 거리를 예민하고 날카롭게 포착하는게 더 큰 재능이 아닐까 싶어져요. 점점. 타고난 재능이 크신 것 같아.. 부럽습니다. 

    • 깊은 꿈은 어쩌면 조금 걱정스럽기도 한데 그냥 푹 잠만 자기엔 아쉽죠.

      • 전문가들이 말하길, 기억나지 않는 꿈이 건강한 꿈이라더군요. 꿈은 꾸는 것이니 반드시 갚아야 하죠. 그러니 잊어버리므로써 떼어먹는 게 이득일런지도. (에취!)

        • 정말 안갚아도 되게 잊어버리는구나 인체의 신비여
    • 아, 이미 읽으셨을지도 모르겠지만 윤고은 작가의 알로하라는 소설집 추천드리고 싶어졌습니다. 이 글과 분위기랄까..정서가 좀 비슷하게 느껴져서요. 

      • 접해보지 않은 작가라 검색해보니 등단 15년 차에 문학상 경력도 만만찮은 분이네요. 
        한강을 마지막으로 국내 여성 소설가의 작품은 읽지 않은 것 같아요. 왜일까? 짚어보니, 소설의 매력에 심드렁해진 게 가장 큰 이유겠지만, 한국소설계의 흐름이 마뜩찮은 것도 한 이유인 듯싶습니다. 
        남성 작가의 경우도 마찬가진데, 국내 소설들을 읽으면 마치 어느 항구에 정박한 채 고장난 배를 수리만 하고 있고 바다로 나가 항해는 하지 않는 느낌을 받곤 해요. 그렇다고 자기만의 우주 속에서 깊은 발효적 호흡을 거친 것 같지도 않고요. -_-;

        지난 주에 듀게에서 최은영을 알게 돼 구입했는데 아직 읽지는 않았지만 괜히 흐뭇한 중이에요.  윤고은 작가 접수했습니다. (제 글과 비슷한 정서라니 구미가 확! ㅋ) 이렇게 구체적으로 추천받으면 길 가다 불로소득을 얻은 듯한 기분이 돼요. 고맙습니다.


게시판 2012

번호 제목 글쓴이 조회 날짜
[공지] 게시판 규칙, FAQ, 기타등등 462,410 01-31
[공지] 게시판 관리 원칙. 147,944 12-31
제 트위터 부계입니다. 3 122,155 04-01
130354 새해복 많이 받으세요 10 189 12-31
130353 아바타 3를 보고 유스포 2 194 12-31
130352 [핵바낭] 올해 잉여질 결산 잡담 14 336 12-31
130351 아바타: 불 과 재 보고 왔어요 짤막 소감 6 234 12-31
130350 [영화강추] '척의 일생' 8 250 12-31
130349 흑백요리사 2 8~10회, 싱어게인 4 탑 4 결정 6 287 12-31
130348 Lacombe Lucien(1974) 7 131 12-31
130347 [관리] 25년도 보고 및 신고 관련 정보. 15 325 12-31
130346 Isiah Whitlock Jr. 1954 - 2025 R.I.P. 2 139 12-31
130345 [왓챠바낭] 우편배달부 말고 '포스트맨은 벨을 두번 울린다' 잡담입니다 12 269 12-31
130344 [넷플] 말 많고 탈 많은 '대홍수' 드디어 봤습니다 14 456 12-30
130343 [반말주의] 다들 올해 고생 많았어!! 새해 모두 건강하고 복 터지길 바래!! 12 188 12-3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