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해할 수 없는 일들 8

어제 저녁은 동료 레아나, dpf와 함께 먹었습니다. 레아나의 생일 턱이었어요. 
주문한 음식을 기다리는 동안 레아나가 제게 "너는 눈 앞에 있을 때만 현실의 사람인 것 같아. 퇴근 후 집에서 널 생각하면 실재하지 않는 인물인 것 같은 느낌이 들거든."라고 말하더군요. dpf가 빙긋 웃으며 거들었어요. "항상 다른 곳을 바라보고 있는 얼굴이지." 
대학시절, 친구들도 비슷한 표현을 하곤 했습니다. 이상한 일이라고 생각해요. 사람들에게 저란 존재는 '이야기'로 읽히는 게 아니라 '장면'으로만 비친다는 의미일까요?  제가 삶을 직시하고 있지 않은 사람으로 그들에게 비치는 걸까요?  

사실 삶을 직시한다는 건 굉장히 어려운 일이죠. 그건 방대한 노고를 요구하는 일입니다. 이토록 작은 저의 삶조차도 어떤 방대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이 정도의 작은 삶을 만들기 위해서 저는 꽤 진지하고 성실한 노력을 해왔노라 자신할 수 있어요. 이런 말을 하면서 수치스러워 얼굴이 붉어지는 게 아니라 미소가 떠오르니 그것도 참 모를 일입니다.

삶을 정면으로 바라보고 싶습니다. 동시에 바로 그만큼, 오직 그만큼  삶을 정면에서 바라보고 싶지 않기도 합니다. 두 마음의 크기가 동일해요. 삶에서 조금은 비켜나고 어긋나 있어야 한다는 이 확연한 감각이 바로 사소한 제 인생의 방대함이고 집요함인지도 모르겠습니다. '아무도 모르게'가 이 자세의 관건이에요. 다시 말해, 마음이 흥건해지거나 난폭해지지 않고 '어긋나기'.
고요하고 밀도 높은 긴장으로 흔들림 없이, 아니 흔들리되 모든 순간 흔드는 것들에 저항하면서 그렇게 삶을 바라보고 싶다는 소망.

제 일상의 윤곽은 명확하고, 몸도 병들지 않았습니다. 그런데도 요즘 막막하고 힘겹다는 느낌이 자주 들어요. 이것은 외면과 내면의 완벽한 분리를 의미하죠. 지금처럼 이중생활이 완벽했던 적은 없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딸, 동생/누나, 친구, 동료, 노동자로서의 역할 속에 제가 없기 때문이 아니에요. 문제는 그 역할 속에만 제가 있다는 것이겠죠. 일상 속에 내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오직 그 속에서만 내가 존재하는 것. 이것이 저의 불안입니다. 
자아의 분열이나 생활과 괴리된 무엇이 제 안에 있기 때문이 아니라, 오히려 생활과 사회적 페르소나 이외의 모든 것으로부터 멀어졌기 때문에 만족스럽지 않은 것 같아요.

'내가 삶을 직시하지 못하는 것은, 오직 하나의 삶 속에서만 살고 있기 때문이다.'라고, 이 아침에 머릿속에다 써봅니다. 오랫동안 제겐 '이런 삶'과 '저런 삶'이 공존했어요. 그러나 지금의 제겐 하나의 삶 뿐입니다. 그 하나의 삶 속에서조차 미흡하기 그지없는 제가 다른 삶을 반드시 가져야만 한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生은 다른 곳에'라는 말에 민망하도록 끌리는 이유를 도대체 모르겠습니다.
아니 사실은 알고 있어요. 다른 삶의 이미지를 잃고 난 후에는 이 삶에 대해 여유있는 자세를 취할 자신이 없기 때문이라는 것. -_-

2. '한 사람의 성품을 알려면 그의 말이나 침묵,  슬픔이나 생각 이전에 웃는 모습을 보라!'고 도스토옙스키가 말했죠.
레아나의 웃음은 무엇보다도 신뢰를 나타내는 그런 웃음입니다. 그런데 정작 그녀는 생일 식탁에서 "성년이 된 이후로 나는 신뢰나 기대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게 되었어"라고 말하더군요. 그녀의 자의식이 어떠하든, 제 눈에 레아나는 '이쪽'과 전혀 다른 '저쪽'의 현실을 살면서도 '이쪽'의 현실과 박자를 맞추는 법을 잘 익힌 사람처럼 보입니다.

그녀는 업무 외의 대면에서는 토라진 아이 같은 포즈를 잘 취해요. 또한 상황을 다 파악하고서도 짐짓 모르는 척 말간 표정을 짓기를 즐기죠. 그 연기가 몹시 서툴다는 걸 자신도 잘 알기에, 언제든 그녀는 신뢰가 가득 담긴 커다란 눈을 뜨고 웃을 채비를 하곤 합니다.  봄날의 정원처럼 화사하고 따뜻한, 그런 웃음이에요. 얼마나 예쁜지 형용할 수 없답니다.

레아나도 자신의 작은 삶 속에서 '너머'를 바라보고 '저 너머의 빛'에 의해서 살아가기를, 저처럼 끝내 도달하지 못한다 하더라도.
tante auguri a te~ 


    • 레아나의 인생을 이해하는 역할이 주어지게 된거 만으로도 충분한 삶이 되겠습니다.


      딴델 보고있는 사람 같아 하는건 난 좋은 말로 생각됩니다 그래 그런데로.

      • 다른 곳, 다른 삶, 다른 '이야기'를 알려고 하는 마음의 장점은 이것인 것 같아요. 이 삶 속에서 웬만한 일엔 '그럴 수도 있지', '이걸 잃어도 상관없다'고 대범해질 수 있는 것. 그리하여 말의 수가 정해진 장기판 같은, 원하지 않았던 일상을 덤덤하게 살아내게 되는 것. 
        다만 터널 속 불빛 같은 '다른 삶'을 마음 속에  품고 있다는 걸 남들이 눈치챈 사실은 적잖이 민망한 일이라... - -;

        • 다 민망 당하면서 살지 않나요 그러니 민망해서 미안할거 하나도 없음
    • 참여시인으로 분류되는 어느 시인이 어느날 고궁을 나오면서 절정에 서 있지 못하고 현실로부터 비켜서 있는 자신을 비겁하다고 노래를 하지요. 기름덩어리만 나왔다고 설렁탕집 돼지같은 주인년에게나 욕을 하는 자신이 얼마나 작으냐고 한탄하는데 사실 그 시인의 삶은 그렇게 옹졸하지도 않았거든요. 글쓴님은 모르겠으나 그럼에도 사람들이 글쓴님만큼 성찰을 하고 살면 아마도 주위에서 많은 레아나들의 미소를 만날 수 있지않을까.
      • 김수영이 민망해 하는거 보면 미안해 할것도 있는듯 해요
      • 할아버지가 가장 사랑한 시인이 김수영이에요.  릴케나 마르케스처럼 내면의 고향이 있는 사람이라고 감탄하셨죠. 그리고 딱 시를 쓰기에 적합할 만큼 실성했던, 시대정신 자체였던 시인이라고 평하셨고요.
        저는 할아버지만큼 그의 진가를 다 모르지만 그가 문제적 시인이었다는 건 인정합니다. 자기 시대의 이념이나 도덕에 꺾이지 않고 끝까지 파릇파릇힌 청년으로 산 시인이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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